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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을 쓰는가'를 쓴 <1984>의 작가 조지 오웰
 '왜 글을 쓰는가'를 쓴 <1984>의 작가 조지 오웰

2. 왜 글을 쓰는가

글은 왜 쓰는지에 대한 질문은 내게 먼저 던져야 할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밥 먹기 위해서 글을 쓴다. 생계형 글쟁이다. 그래서인지 작가 김훈이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생각의나무 펴냄)에서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일갈한 이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학창 시절, 나는 정말 잠깐 문학에 대해 고민을 했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법대를 강하게 원하셨던 부모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르는 효자(?)였던 만큼 나는 결코 학과 선택에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법대를 지원했다.  

인재를 몰라보는 그 학교는 안 가는 게 더 낫다고 눙쳤지만 보기 좋게 낙방한 나는 분루(憤淚)를 삼키며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렸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아주 다행한 일이 일어났다. 유식하게 말해 전화위복(轉禍爲福). 재수 시절, 맹장염 수술이 잘못돼 복막염이 되면서 병원에 꽤 오래 입원하는 일이 발생했다. 급기야 이 사태는 나의 법대 진학 프로세스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하였고, 성적에 맞춰 문사철(文史哲)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글은 왜 쓰느냐는 질문 앞에서,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법대에 갔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했던 것이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보면 대학에 들어가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시절 잠깐 스쳤던 문학이 크게 와 닿았었다. 그래서 문학공부를 한답시고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비롯하여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를 베껴 쓰기 시작했다.

공책에 작가들의 주옥같은 문장들을 모나미 볼펜을 꾹꾹 눌러 써나갔지만 공허함은 좀처럼 달래지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문학을 사치로 느끼게 했던 1980년대 당시의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최전방 철책선 앞에서 나는 그게 소질 없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내가 문학은 아니지만 글을 다시 쓰게 된 것은 언론사 입사시험 준비를 하면서다. 복학하면서 취업형 인간이 되었던 나는 국어, 영어, 상식은 그런대로 해볼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문제는 작문이었다.

서론-본론-결론, 아니면 기승전결로 구성을 도식화하여 작문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수학에 도무지 재능이 없던 전교1등이 수학도 암기해서 전과목 1등급을 받듯이 그런 노력을 했던 것 같다. 덕택에 나는 신문사와 잡지사, 출판사를 전전하며 글쓰기로 밥벌이를 해오고 있다. 공부로 접근했던 작문이 도화선이 되어 지금도 책을 쓴답시고 노트북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으니 글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랬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문학에 잠시 빠졌을 때도, 언론사에서 일을 할 때도 마음 한쪽 구석엔, 구체적으로 설명은 안 되지만, 뭔가 쓰고 싶은 충동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충동이 결국 글 쓰는 직업을 갖게 했고, 그 직업을 통해 글쓰기에 더욱 빠지게 되었던 것 같다.

여러분도 '왜 글을 쓰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와 비슷하지 않나 싶다. 글을 쓰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뭔가'가 글쓰기로 이끈다. 몸과 마음에서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 쓰는 것이다. 

왜 그런 충동이 일까.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타자들이다. 오늘 있었던 부부싸움일 수 있고, 친구와 술 마시면서 실컷 떠들고 놀았던 일일 수 있고, 요즘 정치판에 대한 관전평일 수 있고, 아님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말로 해도 될 터인데, 굳이 글로 쓰려고 하는 것은 왜일까. 말보다 글쓰기가 편해서일 수 있고, 말보다 글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당해서일 수 있고, 시간이나 장소 등 여건상 글로 써야 하는 것일 수 있다.

글을 왜 쓰느냐고 하면 '그냥 쓰고 싶어서 쓴다'는 게 정확한 답변일 것이다. 그냥 쓰는데,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1924년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에서 실종된 영국 등반가 조지 말로리의 그 유명한 어록이 그래서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산이 있어 그곳에 간다(Because it's there)."

"달리기를 수행"으로 여긴다는 소설가 김연수는 "사람들이 내게 왜 달리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냥 달리면 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 달리고 싶으면 달리고, 달리고 싶지 않으면 달리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왜 글을 쓰는가는 물음을 받았어도 그렇게 대답했을 것 같다."라고 했다.(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

소설가 천운영은 경향신문 '천운영의 명랑한 뒷맛'이란 칼럼에서 "이해하고 싶어서 쓴다. 무언가를, 나를, 누군가를, 관계를, 현상을, 세상을, 하지만 이해하기 어렵다. 애를 쓴다. 애를 쓰고 쓰다보면 소설이 마무리된다."고 했는데, 여기서 소설 대신 '글'이란 말로 바꿔보자. 그렇다. 글쓰기는 아마도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소설가 강영숙은 "복수하고 싶어서, 실연해서, 존재감을 가지려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글이 떠올랐던 순간, 글이 쓰였던 순간의 이미지는 무엇인가에 절망해 맨바닥에 떨어져 있을 때 내 옆에 아무도 없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도서관협회 문학나눔의 '행복한 문학편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냥 살기 위해 씁니다. 우울함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요"라고 말한다.

글은 왜 쓰는가에 대해서는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이 아주 명쾌하게 정리한 바 있다. 그는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글쓰기, 적어도 산문에 있어서는 네 가지 욕망이 있다고 했다. 인용해본다.

①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이다,

②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③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④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아마도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여기 인용한 조지 오웰의 네 가지 욕망 중 하나, 두서넛, 아님 모두 다에 속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 네이버 블로그 '조성일의 글쓰기 충전소'에도 포스팅했습니다.



태그:#글쓰기, #왜 글을 쓰는가 , #조지 오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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