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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왕 히로히토의 포츠담선언 수락 방송은 1945년 8월 14일 녹음돼서 15일 정오와 오후 2시에 각각 방송됐다. 독일 포츠담에서 연합국 명의로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녹음 방송에서 히로히토는 '항복' 대신 '포츠담선언 수락'이란 표현을 썼다. 체면과 위신을 지키고자, 무조건 항복을 간접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당시 총독부 직원이었다가 훗날 외무성에서 한일관계를 담당한 모리타 요시오가 쓴 <조선, 종전의 기록>이란 책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관련해 한반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는 포츠담선언 수락 방송 몇 시간 전에 지금의 서울 충무로역 3번 출구 부근에서 벌어진 회담이 소개되어 있다. 회담 장소는 엔도 류사쿠 총독부 정무총감의 관저였다. 이곳은 수양대군을 거부하고 단종 복위운동을 벌인 사육신 박팽년의 집터다. 지금은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용하는 식당 겸 문화공간인 한국의집이 들어선 곳이다. 

한국의집 입구. 사진 하단의 표지석에는 박팽년 집터임을 알리는 문구가 적혀 있다.
 한국의집 입구. 사진 하단의 표지석에는 박팽년 집터임을 알리는 문구가 적혀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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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맡긴 일본

<조선, 종전의 기록>에 따르면, 15일 아침에 엔도 정무총감이 관저 제2면회실에 만난 사람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이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과 조선중앙일보 사장 등을 지낸 여운형이었다.

엔도 총감은 "오늘 12시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는 조칙(왕명)이 내릴 겁니다"라며 "연합국 군대가 들어올 때까지 치안 유지는 총독부가 담당하겠지만, 측면 지원을 부탁하고 싶습니다"라고 제안했다. 총독부를 대신해서 실질적인 치안권을 행사해달라는 부탁을 그런 식으로 했다.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맡긴 이유 중 하나는 엔도의 또 다른 발언에서 드러난다. 엔도는 "적어도 17일 오후 2시까지는 소련군이 경성(서울)으로 들어올 겁니다"라고 말했다. 엔도는 미국과 소련이 38선이 아닌 한강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강 이북인 서울은 소련군의 수중에 떨어질 거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한강을 경계로 미·소가 분할 점령할 거라는 말은 이기형의 <몽양 여운형>에 나온다.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여운형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정세가 달라졌다. 엔도의 말이, 한국이 분단되고 미·소 양군이 나누어 진주하며, 한강을 경계로 경성은 소련군의 점령 지역이 될 것이란다."

소련이 서울을 점령할 것이라는 정무총감의 말은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맡긴 이유 중 하나를 설명해준다. 서울 주재 일본인들을 소련군으로부터 보호해줄 적임자가 여운형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가담 이듬해인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했다. 공산주의 경력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저한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중도파에 가까웠다. 그래서 일본 입장에서는 타협의 여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여운형한테 치안권을 넘겼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권력을 '공짜'로 넘긴 것은 아니다. 소요를 막아 달라는 조건이 붙었다. 일본인들이 무사 귀환 할 수 있도록 한국인들의 움직임을 막아주는 조건으로 치안권을 내준 것이다. 엔도 총감의 제안을 여운형이 수락함에 따라, 8월 15일부터는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실질적인 정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의 여운형 생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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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는 그렇게 자발적으로 치안권을 내줬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태도가 바뀌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치안권 회수에 나선 것이다. 이번에는 총독부가 직접 나서지 않았다. 조선군관구(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를 앞세웠다.

8월 16일 조선군관구 사령부는 '관내 일반민중에게 고함'이란 포고문을 통해 "민심을 교란하거나 치안질서를 해치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군은 단호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총독부가 여운형과 건준한테 치안권을 넘긴 상태에서 일본군이 치안 문제에 간섭한 것이다. 여운형과의 약속을 깨기 시작한 것이다. 

8월 18일에는 한층 더 심한 간섭이 나왔다. 조선군관구의 나가야 보도부장이 경성방송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주조선 일본군은 엄연하게 건재하며, 치안을 문란케 하는 경우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력을 행사할 것이니 군 당국의 발표에 유념하기 바란다"고 경고했다. 치안 문제와 관련해 무력을 행사하겠다고 언명한 것이다. 8월 15일 아침의 치안권 이양 약속을 좀더 강하게 파기한 것이다.

8월 21일에는 한층 더 강력한 파기 조치가 나왔다. 최근우 건준 총무부장과의 회담에서 조선군관구 측은 건준의 간판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여운형을 통해 건준에 치안권이 넘어간 상태에서 건준의 해체를 요구한 것이다. 치안권을 회수하겠다는 통고였던 것이다. 

물론 일본군이 요구한다고 해서 건준이 해체될 리는 없었다. 8월 21일이면 일본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발전해 있었다. 한국인들은 일본군과 일본경찰을 무시한 채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일본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건준을 직접 해체하지 못하고 건준 해체를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우 부장이 '약속이 파기되면 국민적인 궐기를 일으키겠다'는 식으로 위협하자, 그 자리에서 조선군관구는 건준 해체 요구를 취소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최종 수용한 것은 8월 14일이지만, 최초 수용한 때는 8월 10일이다.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의 입장은 포츠담선언 수용으로 급선회했다. 8월 10일 일본은 '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천황의 지위는 훼손하지 말아달라'는 단서를 달았다. 연합국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8월 14일, 아무런 단서도 달지 않고 포츠담선언 수락 방송을 녹음했던 것이다. 

8월 10일에 일본이 조건부 수용 의사를 밝히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연합국은 일본의 항복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런 전제 하에서 미국은 38선 분단을 내부적으로 확정했다. 일본이 최종 항복하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다.

미국의 한국학 권위자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38선을 긋는 결정은 전적으로 미국이 취한 것으로서 1945년 8월 10일과 11일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이때 확정된 미국의 입장이 소련측에 전달된 것은 8월 15일이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대로 확정한 것이다.

모래 위에 그린 38선.
 모래 위에 그린 38선.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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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태도가 급변한 이유

미군이 서울을 점령한다는 소식이 공식적으로 전해진 것은 8월 20일이다. 이 날 미군 B-29 전투기가 서울 상공에서 "미군 제24군단이 조만간 상륙한다"는 전단을 살포했다. 하지만 최영희 한림대 사학과 교수는 <격동의 해방 3년>에서 일본 정부가 15일이나 16일 미국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었을 개연성이 높다고 말했다.

진실화해위원회 김영택 위원의 논문 '8·15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을 선택한 배경과 담판 내용'에서도 총독부가 16일에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논문에서는 총독부 체신국의 8월 16일자 업무명령 등을 근거로 들고 있다.

체신국의 한국인 직원들은 8월 15일 이탈했기 때문에, 16일에는 일본인들밖에 없었다. 본국 귀환 준비를 서둘러도 시원찮을 일본인 직원들한테 체신국은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종전처럼 근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런 지시가 8월 16일 내려진 것은 '소련군이 서울에 오지 않는다'는 정보를 그날 입수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게 이 논문의 설명이다. 

엔도 정무총감은 소련군이 서울에 올 거라고 예상하고 8월 15일 아침 여운형에게 치안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8월 16일에는 총독부가 38선 획정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소련군이 아닌 미군이 서울에 올 거라는 소식을 이 날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중도파 공산주의자를 앞세워 소련과 타협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8월 16일부터 일본의 태도가 급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전쟁을 벌였고 미국한테 핵무기 2방을 맞기는 했지만, 일본 입장에서 미국은 인연이 깊은 나라다. 일본은 1854년에 미국과 국교를 맺었다. 또 1870년대부터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의 도움에 힘입어 세계적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소련보다는 미국이 일본한테 더 친숙했다.

결정적으로, 미국은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그런 미국이 서울을 점령한다고 하자, 일본인들이 갑자기 자신감이 생겨 태도를 바꿨을 가능성이 높다. 미군의 서울 점령이 자신들의 무사귀환 가능성을 높일 거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8월 16일부터 일본인들은 8·15 해방을 취소시키고 싶었다. 미군이 온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일본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 8월 15일 방송 내용이 입에서 입으로 번지면서 "일본이 망했다"는 소문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급속히 확산됐고, 8월 16일부터는 한국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건국준비위원회는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을 따를 것 같으면 "불과 수주 만에 농촌 지역을 지배하게" 될 정도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당시 한국은 농업 사회였으므로 수주 만에 농촌을 지배했다는 것은 수주 만에 한반도 전역을 지배했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 정도로 건준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8월 16일부터 일본이 8·15 취소 버튼을 백번·천번 클릭해도 소용없을 정도로 한국은 이미 독립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태그:#8.15 해방,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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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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