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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4박 5일간 '2017 대학생 나라사랑 역사탐방'을 실시했습니다. 전국의 역사학과 및 교육대학교 재학생 30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은 일본 가나자와·도쿄 지역 일대의 독립운동사적지 등을 둘러보고 한·일 양국의 역사청산과 화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탐방 간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해 탐방 수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덴노(天皇)가 이를 통치한다', '덴노는 신성하므로 침범할 수 없다' - 대일본제국 헌법 제1조·3조(1889년 제정)

왕조가 여러 번 바뀌었던 한반도와 달리 일본은 여러 차례의 정치적 변동의 와중에도 덴노(일왕)만큼은 하나의 혈통으로 이어져 왔다고 주장한다.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막부의 통치권이 덴노에게 이양되면서 덴노는 상징적 존재에서 일본을 통치하는 최고 통수권자로 부활했다. 그런 덴노의 지위를 확인시켜준 것이 바로 1889년에 제정된 대일본제국 헌법(일명 '메이지 헌법')이었다.

덴노에게 신성불가침의 지위와 권력이 부여되면서, 일본 사회는 급속도로 일원화되기 시작했다. 일본 전역에 드리운 전쟁의 광기, 그 중심에는 덴노가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책임에도... 여전한 덴노의 지위

덴노 가문을 상징하는 일본의 국화문양
 덴노 가문을 상징하는 일본의 국화문양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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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 후 메이지 헌법이 '평화헌법'으로 개정되면서 덴노의 위상도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됐다. 권력 역시 내각으로 이양됐다. 그런데도 덴노는 여전히 일본의 상징적 군주로 그 지위를 존중받아왔다.

그러한 덴노의 권위가 잘 드러난 공간이 바로 '고쿄(皇居)'라고 할 수 있다. 도쿄 시가지에 자리 잡고 있는 고쿄는 덴노 일가가 사는 궁성이다.

현재 고쿄는 정원인 '히가시교엔(東御苑)'을 제외하고는 시설 대부분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대신 1년에 한 번 덴노의 생일에 맞춰 제한개방을 하고 있다. 이날이 되면 덴노는 멀리서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곤 한다.

니주바시를 지나 궁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니주바시를 지나 궁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일반인들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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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성 입구 초소에서 보초를 서는 경비대원들의 모습
 궁성 입구 초소에서 보초를 서는 경비대원들의 모습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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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교엔은 넓은 잔디밭과 궁성들로 조성되어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기 전, 우리는 먼저 기념촬영을 하기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삑! 삑!'

신경질적인 호루라기 소리에 탐방단 일행이 모두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무리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다 실수로 잔디밭으로 넘어가자 경비원이 제재를 가한 것이었다. 가이드가 "별걸 다 가지고 예민하게 반응한다"며 툴툴거렸다. 그만큼 이곳의 경비는 삼엄한 편이었다.

고쿄 히가시교엔의 경비초소
 고쿄 히가시교엔의 경비초소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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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럴진대 덴노에게 신적인 권위가 부여되었던 과거엔 경비가 얼마나 삼엄했을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 이곳 고쿄에서는 무려 두 번이나 폭탄투척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가. 그 첫 번째 사건이 바로 1924년 1월 5일, 의열단원 김지섭이 궁성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니주바시 의거'였다.

의열단원 김지섭, 덴노를 향해 폭탄을 던지다

의열단원 김지섭 의사의 의거현장인 '니주바시'
 의열단원 김지섭 의사의 의거현장인 '니주바시'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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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주바시(二重橋)는 고쿄를 둘러싼 해자(垓子: 방어를 위해 성곽 둘레에 조성한 도랑) 위에 조성된 다리를 말한다. 고쿄엔 석조와 목조다리 두 개가 있는데, 니주바시는 뒤편에 위치한 이층 목조다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석조다리가 니주바시로 더 많이 알려졌다. 니주바시 의거 역시 석조다리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당시 재일본 조선인들은 하루하루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1923년 9월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자경단(自警團: 민간 자치경찰)을 필두로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비극이 일어난 탓이다.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한 의열단은 일본 본토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임무를 띤 채 파견된 이가 바로 김지섭(1884~1928) 의사였다.

일본인으로 가장한 채 밀항에 성공한 그는 첫 번째 목표로 '제국의회(지금의 국회의사당)'를 노렸으나 그때 제국의회는 하필 휴회 중이었다.

김 의사는 제국의회 근처에 고쿄가 있는 것을 알고는 곧바로 다이쇼 덴노(大正天皇: 1879~1926)를 폭살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그러나 거동을 수상히 여긴 궁성 경비대에 의해 정체가 탄로 나고 말았다.

그는 곧바로 폭탄 1개를 던졌으나 습기에 찬 탓에 터지지 않았다. 이에 경찰을 쓰러트린 뒤 니주바시로 달려가며 나머지 두 개의 폭탄을 던졌으나, 그 역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현장에서 체포된 김 의사는 법정투쟁 끝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판결에 분노한 그는 "무죄를 주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나를 사형에 처하라"며 재판부를 향해 일갈했다.

"나의 정신은 법률의 정신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법률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민중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에 그 정신이 있지 아니하냐? 나도 우리 조선 동포들의 자유, 생명, 재산을 위하여 이번 행동에 나선 것이다. 그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이러므로 나는 나의 무죄함을 주장한다. (중략) 나를 무죄로 못하겠으면 너희들은 곧 나를 사형에 처하라."

비록 그가 던진 폭탄은 불발에 그쳤고, 덴노를 폭살하겠다는 목적도 이루지 못했으나 일본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한 청년의 의기를 드높인 쾌거였다고 할 수 있었다.

김 의사의 의거 현장인 니주바시 입구까지는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니주바시 앞에 서서 궁성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꼭 90년 전의 급박했던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사쿠라다몬 일대를 진동케 한 이봉창의 폭탄

사쿠라다몬 입구의 표지석
 사쿠라다몬 입구의 표지석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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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성의 외측문인 사쿠라다몬. 1932년 1월 8일, 이 부근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의 폭탄투척의거가 일어났다.
 궁성의 외측문인 사쿠라다몬. 1932년 1월 8일, 이 부근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 의사의 폭탄투척의거가 일어났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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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주바시를 지나 고쿄의 뒤편으로 돌아가면 외측문인 사쿠라다몬(櫻田門)이 등장한다. 사쿠라다몬 사이로 러닝셔츠를 입은 시민들이 헤드셋을 낀 채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지금은 오후의 여유를 만끽하는 시민들로 평온하기 짝이 없는 곳이지만, 니주바시 의거 이후 꼭 8년 만인 1932년 1월 8일, 이곳에선 또 한 번 천지를 뒤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이봉창(1901~1932) 의사가 관병식 참관 후 돌아오던 쇼와 덴노(昭和天皇: 1901~1989) 행렬을 향해 폭탄을 투척한 것이다.

당시 쇼와는 첫 번째 마차에 타고 있었으나 이 의사가 두 번째로 들어오는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지는 바람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마차에는 궁내대신이 타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마차 일부를 부수고 호위병력에 상처를 입히는 데서 그쳤다.

사쿠라다몬 의거 역시 덴노 폭살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성공이나 다름없었다. 니주바시 의거에 이어 전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의사의 의거로 놀란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임시정부는 이 의사의 의거로 다시 활력을 얻었다. 무엇보다 그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안겼다. 당시 중국은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으로 항일의식이 고조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인들조차 감히 해내지 못한 덴노 폭살시도를 일개 한국인이 해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이봉창 의사(1901~1932)의 모습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이봉창 의사(1901~1932)의 모습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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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문들은 '한국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장하도다, 한인'이라는 제목으로 이 의사의 의거를 대서특필했다. 뒤이어 벌어질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와 더불어 이 의사의 의거는 국제사회에 한국인들의 굳건한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이들의 의거에 감격한 중국 국민정부의 장제스(蔣介石: 1887~1975) 총통은 훗날 전후방침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영국·중국 세 정상이 모인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중요 의제로 상정했다.

그 결과 '현재 한국민이 노예 상태 아래 놓여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는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는 한 개인의 의로운 행동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위대한 사건이었다고 하겠다.

슬라이드 화면에 '전범기'를 띄었더니...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 탐방 소감을 발표하는 학생들의 모습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 탐방 소감을 발표하는 학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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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군국주의의 상징인 전범기(욱일기)
 일제 군국주의의 상징인 전범기(욱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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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 밝았다. 이날 밤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다. 귀국을 앞두고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탐방 소감을 발표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짧았던 탐방 기간 각자 인상 깊었던 지역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발표했다.

학교, 지역, 나이, 성별 등 다양한 면면만큼이나 학생들이 느낀 바도 다양했다. 학생들은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앞에서 다 함께 애국가를 부를 때 뿌듯했다", "일본의 현역 정치인이 과거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죄했을 때 울컥했다", "일본인들에게 우리가 겪은 아픈 역사를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는 등의 소감을 밝혔다.

그중에서도 이산하(국민대 한국역사학과 3)군의 발표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산하군은 "솔직히 역사를 전공하고 있지만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며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도 그냥 중국 어딘가에서 돌아가셨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 설마 일본까지 와서 돌아가셨을 줄은 몰랐다"고 고백해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여기 함께 답사 온 친구들 모두 언젠가 교사가 되거나 학자가 되어 강단에 서게 될 텐데 우리가 이번에 배운 사실들을 널리 알려달라"며 "나 역시 내가 처한 위치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한 사실들을 전파하겠다"고 당부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윽고 내가 속한 조가 발표할 시간이 됐다. 우리 조는 나의 제안에 따라 야스쿠니에서 촬영했던 '전범기(욱일기)' 사진을 대형 슬라이드 화면에 띄웠다. 난데없이 등장한 전범기 사진에 모두 의아한 눈치였다. 마이크를 잡은 조장 전승지양(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4)양이 전범기를 띄운 까닭을 대신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날 우리가 전달하고자 했던 키워드는 바로 '반면교사'였다. 전범기는 과거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고 지금은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점점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우익세력을 대변하는 깃발이다. 우리는 과거로 회귀하려는 일본의 반역사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동시에 우리 역시 그러한 과오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자는 취지로 전범기를 띄웠던 것이다.

오랜 시간 우리는 일본의 무책임한 역사의식에 대해 비판하며 사죄를 촉구해왔으나, 과연 우리 자신도 떳떳하게 '과거사 청산'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6·25 전쟁 당시 운용됐던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켜왔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해왔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명분 없는 베트남전쟁 참전에 대한 끊임없는 정당화 시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하 시도 그리고 여전히 국립현충원에 잠들어있는 친일부역자들 문제까지. 과연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과거사 청산을 떳떳하게 끝마쳤노라 주장할 수 있는가.

그래서 전범기는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반면교사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일본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역시 우리 안의 또 다른 '전범기'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자성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학생들은 서로가 발표한 생각에 대해 박수로 화답하기도 하고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은 학생들의 뜨거운 토론 열기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 6부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약산과 의열단>, 박태원 저, 깊은샘, 2015.10.12.



태그:#이봉창, #김지섭, #의열단, #독립기념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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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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