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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 여느 때 같으면 보던 책을 가방에 담고 갈 준비를 할 시간인데 난 잠시 멈칫한다. "아가씨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술 시켰어요"라는 말을 시시껄렁한 농담처럼 내뱉던 이들이 아직 문밖에 있었다.
 퇴근시간. 여느 때 같으면 보던 책을 가방에 담고 갈 준비를 할 시간인데 난 잠시 멈칫한다. "아가씨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술 시켰어요"라는 말을 시시껄렁한 농담처럼 내뱉던 이들이 아직 문밖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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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야... 얼른 가."

퇴근 시간. 여느 때 같으면 보던 책을 가방에 담고 갈 준비를 할 시간인데 난 잠시 멈칫한다.

"아... 언니, 잠깐만요. 아까 손님들이 밖에 계셔서요."

1시간 반 정도 가게에 머물다 가신 남성 손님들. 매번 술을 가져다줄 때마다 "결혼했어요? 안 했어요?", "아가씨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술 시켰어요"라는 말을 시시껄렁한 농담처럼 내뱉던 이들이다. 나가서 한참을 가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중이었다. 언니는 나의 말을 바로 알아듣고는 "그래, 조금 있다가 가" 하신다.

저녁 아르바이트를 구하면서 가장 걱정됐던 건 퇴근 후, 집까지 걸어가는 그 시간이었다. 다행히 가게는 큰길에 있고, 집까지 곧바로 가는 길도 좁은 골목길은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있는 걸 몇 번 발견하곤 뱅 돌아서 집으로 가곤 했다.

나름의 원칙도 정했다. 일하는 단체에서 1차(?) 퇴근 하면 꼭 집에 들러 불을 환하게 켜놓을 것, 가게에서 퇴근하면 피곤하더라도 매번 동선을 달리해서 집으로 갈 것. 가끔, 집으로 바로 가는 길에 여성분이 걸어가고 있으면 그녀의 존재를 의지해 함께 걷곤 하는데, 그런 일은 일주일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다.

아마도 여기까지 읽은 분들 중에서 '뭘 그리 예민하게 구느냐', '무슨 유난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내가 통과해 온 삶 속에서 체득하고 싶지 않았지만 체득하고야 만 공포이며,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나는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나는 지금부터 온전히 내 몸이 통과해 온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미리내의 이야기인 동시에 무수히 많은 82년생 김지영, 92년 김지영, 2002년 김지영... 그녀들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온전히 내 몸이 통과해 온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미리내의 이야기인 동시에 무수히 많은 82년생 김지영, 92년 김지영, 2002년 김지영... 그녀들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온전히 내 몸이 통과해 온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미리내의 이야기인 동시에 무수히 많은 82년생 김지영, 92년 김지영, 2002년 김지영... 그녀들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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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시골의 작은 중학교

여자아이들이 유독 싫어하는 선생(님이라는 말도 쓰고 싶지 않다)이 있었다. 그가 유독 체벌을 많이 한 것도, 그렇다고 숙제를 많이 내준 것도 아니었지만 여자아이들은 그를 만나면 슬슬 피하곤 했다.

그는 수업시간이면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의 몸을 만지곤 했다. 그가 나의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나의 팔 안쪽 살을 주물렀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그것이 성추행이라는 것을, 그런 개념 자체를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이 매우 불쾌하고 나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는 것은 매우 선명한 몸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 성인이 된 어느 날 신안의 어느 남선생이 지적장애 여자아이를 성폭행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 친구들과 나는 그 선생이 분명히 맞을 거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제야 우리가 그 당시 소리내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가 했던 행동이 성폭력이었고, 모두가 다 공동의 피해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 대학 시절 농촌활동

대학 시절 매년 봄, 여름으로 농촌 활동을 갔다. 우리는 '농촌 봉사활동'이 아닌 농민들과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농촌 활동'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활동에 정성을 다하곤 했다.

그 시절, 나의 역할은 학교 측 농활 대표. 농활 마지막 날, 농민회 분들과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농활을 마쳤다는 기쁨을 나누며 마지막 마무리 집회를 했다. 모두가 들떠 있던 순간, 몇 명의 농민분들이 나를 따로 불러 '학교를 총괄하느라 고생했다'며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운하게 보낼 수는 없다'는 말에 결국 한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함께있던 분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한 명의 남성 농민분과 나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어색한 분위기. 그리고 그가 나를 향해 던진 말.

"어이, 너 남자한테 얼마나 대줘봤어?"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이지' 싶어 멍하게 있었지만, 그가 계속 내뱉는 말들이 성희롱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순간, 화가 나기보단 두려웠다. 그 공간엔 그와 나밖에 없었고, 당장 그곳을 빠져나올 방법도 마땅히 보이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는 계속 성희롱을 하더니 급기야 나를 끌고 어딘가로 가려고 했다. 급하게 그 공간을 빠져나와 아는 농민회 선배에게 전화했다. 상황 설명도 하지 못한 채 울먹이며 그저 도와달라고 말했다. 선배는 가게 상호명을 듣고 바로 달려와 나와 함께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의 차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그리고 한동안 나는 나 자신을 원망했다.

'왜 거길 무턱대고 따라간 거야?'
'왜 그 순간 그에게 단호하게 화내면서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한 거야?'

그 질문은 그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셋] 20대 시절, 언니와 함께 원룸

아침에 일어났는데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 내 지갑만 안 보였다면 어디선가 잃어버렸겠거니, 짐작했겠지만 언니의 지갑까지 없어진 걸 확인하고서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확인하던 순간, 언니와 난 이야기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혼자 있었으면 분명..."

서로 '강간'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우린 알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그냥 이런 해프닝으로 끝나진 않았을 거란 걸.

[넷] 여자 둘 살던 옆집

새벽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잠이 깼다. 그리고 이어지던 투덕거리는 소리. 옆집이다. 복도형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던 때, 옆집에 사는 분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진 못했지만 그래도 서로 눈인사는 건넨 터였다. 그 집에 엄마와 딸, 두 사람만 사는 건 알았다.

강도가 들었구나 짐작한 우리는 신고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며 이불 속에 들어가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당장 밖으로 나가 그들을 도와줄 순 없었다. 우리도 공포에 압도된 상황이었으니까.

경찰이 출동하는 소리를 듣고 그 새벽 꼬박 밤을 새우며 두 사람이 무사하길 빌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어느 날 옆집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셔서 늦은 퇴근을 하던 그녀는 그날따라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새벽에 딸이 먼저 강도를 발견해 소리를 질렀고, 칼을 들고 있던 강도는 몇 번 위협하다 도망갔다고. 그녀는 연신 '신고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고 밤마다 옆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딸로 추측되는 울음소리. 그 소리를 매일 밤 듣던 나도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틀 동안 고열에 시달렸다. 급기야 시골에 계시던 엄마가 올라오셔야 했다. 그리고 매일 밤 울던 그녀의 딸과 그녀는 한 달도 안 돼 이사를 갔다.

지난해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매스컴에서는 그 사건을 '묻지마 살인' '조현병 환자에 의한 살인'이라고 설명했다. 화장실에 숨어든 가해자가 6명의 남성을 그냥 지나쳤고, 7번째로 들어온 그 여성을 살해했음에도. (사진은 해당 화장실과 관계 없는 자료 사진)
 지난해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매스컴에서는 그 사건을 '묻지마 살인' '조현병 환자에 의한 살인'이라고 설명했다. 화장실에 숨어든 가해자가 6명의 남성을 그냥 지나쳤고, 7번째로 들어온 그 여성을 살해했음에도. (사진은 해당 화장실과 관계 없는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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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살아남았지만, 몸은 기억한다

지난해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매스컴에서는 그 사건을 '묻지마 살인', '조현병 환자에 의한 살인'이라고 설명했다. 화장실에 숨어든 가해자가 6명의 남성을 그냥 지나쳤고, 7번째로 들어온 그 여성을 살해했음에도.

그 사건 이후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는 '#살아남았다'는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다. 수많은 여성들이 '나도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면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라며 함께 분노하고, 함께 울었다.

나 또한 원룸 작은 방 침대에서 SNS에 쏟아져 나오는 그녀들의 슬픔과 폭력의 기록을 보며 함께 울었고, 또 아팠다. 몇 해 전 옆집에서 들려오던 그 비명과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처럼 몸이 아파왔다. 그래도, 난 적어도 살아남았다. 그 시간, 그 자리에 다행히도 나는 없었고 대신 이름 모를 '그녀'가 있었다.

그런데 다시 그날의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고 있다. 2017년 3월, 온라인 방송 플랫폼 아프리카TV에서 활동하는 한 남성 BJ가 미용서비스를 받는 영상을 올린다. 방송엔 여성 혼자 샵을 운영한다는 정보가 담겨있다. 해당 방송은 섬네일부터 성적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문구를 사용했다.

이 방송을 본 30대 남성은 그녀가 혼자 일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인터넷 사이트, 카페 등을 통해 가게 주소와 카톡 ID를 알아내 예약을 잡았다. 그리고 손님으로 가장해 살인을 저질렀다. 이는 명확히 혼자 가게를 운영하던 '그녀'에 대한 '타겟팅'이었다.

지난해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지난해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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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에 뜬 이 기사를 보고 나는 지금 함께하고 있는 가게 사장님과 나를 떠올렸다. 내가 퇴근하고 나면 새벽에 홀로 가게를 지키고 있을 그녀와 늦은 밤 퇴근해 길을 걷고 있을 나를 말이다. 결국, 그녀와 나는 또 살아남은 것인가. 운좋게...

사건 보도 후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는 나는 이 상황들이 너무나 끔찍하다. 언제든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임당할 수 있다는 현실 자체도 끔찍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따로 있다.

"여자 혼자서 하는 곳 강남에 또 있나요?", "예쁘냐?", "혼자 일하니까 그렇지"라는 기사의 댓글, 억울하게 죽임 당한 그녀가 죽어서도 '왁싱녀'가 되는 상황, 여성들이 '여혐살인사건' 해시태그를 달며 사건을 공론화하자 작년 5월처럼 '이 사건이 여혐범죄인지 아닌지' 따지려는 시도.

나는 묻고 싶다. 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범죄 피해자의 약 90%가 여성(2017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강력 범죄 피해자 3만 1400여 명 중 88.9%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이것을 '여성을 향한 폭력'이라고 부를 수 없는지.

왜 우리가 여성혐오 문제에 관한 논의를 한번에 뭉뚱그리는 "사이 좋게 지내요"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왜 "살아남는 걸 걱정하는 존재가 아닌, 동료 시민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외침에 "너 메갈이지?"라는 조롱 섞인 이야길 들어야 하는지.

지금 우리가 이 죽음 앞에 해야 하는 것은, "그녀가 나였다"며 울고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고, 침묵하며 참아왔던 이들이 터트린 분노와 외침을 들어주는 것이며, 용기를 내 거리로 나선 이들과 같이 걷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태그:#여성혐오, #젠더사이드, #여성살해, #왁싱샵살인사건, #강남역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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