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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성의 정문(남문) 풍남문
 전주성의 정문(남문) 풍남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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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840-19 산성천 도랑가에 작은 안내판 하나가 담에 등을 붙인 채 읽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산성천 건너편 산비탈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쌓아놓은 성곽이 앙증맞게 예쁘다. 등산객의 허리 정도밖에 안 될 높이의 성곽이지만 요철 모양의 성가퀴까지 갖췄다.

성가퀴까지 갖춘 낮은 성벽 등 '예쁜' 남고산성 길

산성으로 가는 길이 이곳만큼 정감 있게 가꾸어진 곳은 처음 본다. 성가퀴를 따라 오가는 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윽고 몸을 돌린다. 작은 안내판의 해설을 읽는다.

'충경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정난의 공적을 기려 세운 사당이다. 이정난은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았다. 64세의 나이로 말을 타고 전장에 나아가 300여 명의 왜군을 무찔렀고 그 공훈으로 전주부성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러한 공의 용기와 충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순조 때 충경공의 시호를 나라에서 내렸다. 오늘날 전주시를 동서로 가로지른 도로를 '충경로'로 명명한 것은 충경공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정난 사당 충경사
 이정난 사당 충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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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재실인 남고재가 있고, 오른쪽에 관리사가 있다. 뜰이 끝나는 정면에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가파르게 눈에 들어온다. 계단 위의 외삼문이 공연히 위태롭게 느껴진다. 잠시 호흡도 고를 겸 본 안내판의 설명을 읽는다.

'이정난(李廷鸞) 선생(先生) 사당(祠堂)

충경공(忠景公) 이정난은 중종 24년(1529)에 전주에서 태어났다. 선조 원년(1568)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전주에서 7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전주성의 4대문을 수비하는 한편 남고산성(南固山城)과 만경대(萬鏡臺, 남고산성 서문 옆) 등에 복병을 배치하여 침입해 오는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의 왜군을 막았다.

정유재란(1597) 때에는 전주 부윤 겸 오늘날의 징병관이라 할 수 있는 삼도 소모사(三道召募使)로 있으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돕는 일에 힘썼다. 선조 33년(1600) 72세로 세상을 떠났고, 순조 7년(1807) 조정에서 충경공이라는 시호를 내려 공의 우국충절을 기렸다.'

남고산성은 사적 29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충경사에서 남고산을 향해 500m가량 들어가면 곳곳에 남아 있는 성곽을 볼 수 있다. 후백제의 견훤이 도성인 전주를 방어할 시설로 축성했다고 하여 견훤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보는 남고산성의 성벽은 견훤이 쌓은 것이 아니다.

 남고산성, 이정난은 이곳에 복병을 배치하여 (조선군 군대가 많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일본군의 전진을 막았다.
 남고산성, 이정난은 이곳에 복병을 배치하여 (조선군 군대가 많을 것이라고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일본군의 전진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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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고산성은 임진왜란 유적이다. 남고산성은 이정난이 의병들을 매복시켜 왜군의 진입을 막은 곳으로, 성곽 자체가 임진왜란 때 축성되었다. 그 후 1813년(순조 13) 고쳐 쌓았는데, 이때부터 성에 남고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의 전체 둘레는 3km가량 되지만 많이 허물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집터 흔적을 보면 남고산성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듯하다. 군사 시설도 많아서 동문과 서문, 지휘소인 남장대와 북장대,  관아, 화약고, 군기고, 창고가 있었던 자리도 확인된다.

남고사 승려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었다

지금도 성 안에는 지난 역사를 말해주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고사를 보면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활약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남고사의 승려들도 임진왜란 당시 산성을 지키는 병사였다.

성 안에는 성의 시설, 규모, 연혁 등을 기록한 '남고진 사적비'도 있다. 특이한 유적은 관성묘이다. 완산구 동서학동 611을 주소로 가진 관성묘는 촉 황제 유비의 의형제 관운장을 모시는 사당이다. 

 충경사에서 산성천 물길을 따라 남고산성 쪽으로 들어가면 관운장을 모시는 관성사가 나타난다. 사진은 관성사의 외삼문.
 충경사에서 산성천 물길을 따라 남고산성 쪽으로 들어가면 관운장을 모시는 관성사가 나타난다. 사진은 관성사의 외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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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천을 따라 계곡 안으로 점점 들어간다. 700m가량 물소리를 들으며 호젓한 길을 걸으면 문득 산성천 건너편에 성벽이 나타난다. 성벽이 높은 곳에서 물가로 떨어질 듯이 쌓여 있다. 남고산성 안내판에서 100m만 더 길을 따라 들어가면 관성묘를 볼 수 있다. 이번에는 관성묘 안내판을 읽는다.

'관성묘(關聖廟)

이 사당은 『삼국지』로 우리에게 낯익은 관우(關羽) 장군을 무신(武神0으로 받들어 제사 지내는 곳으로, 주왕묘(周王廟) 또는 관제묘(關帝廟0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관우를 신봉하는 신당이 널리 전파된 것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이 서울의 남묘에 관우를 조각한 신상을 안치한 데서 비롯된다.

전주의 관성묘는 고종 32년(1895)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金聲根)과 남고산성을 책임지던 무관 이신문(李信文)이 제안하여 각 지역 유지의 도움을 받아 건립했다. 사당 안에는 관우의 상이 있고, 그 양쪽 벽에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그린 벽화가 있다. 관우의 신성을 믿는 사람들은 매년 초 이곳을 찾아 한 해의 행운을 점치기도 한다.'

 풍남문의 홍예(무지개) 모양
 풍남문의 홍예(무지개)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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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세나 되는 고령에도 분연히 칼을 세워 왜적을 물리친 이정난 선비가 역사에 남긴 또 다른 유적은 '전주 풍남문'이다. 이정난 선비는 전라 감사가 도망가 버려 관군이 무너진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전주성을 수호했다.

전주성은 정유재란 때 파괴된다. 1388년(고려 공양왕 1) 처음 지어진 전주성의 남문은 1734년(영조 10)에 이르러 크게 다시 지어졌는데, 1767년 화재로 불타는 바람에 1768년(영조 44) 관찰사 홍낙인이 다시 새로 지었다. 풍남문(豐南門)이라는 이름은 1768년부터 쓰였다.

이정난이 지킨 진주성, 정유재란 때 파괴돼

풍남문은 앞면은 1층과 2층이 모두 3칸 규모이지만 옆면은 1층은 3칸, 2층은 1칸으로 되어 있다. 2층 너비가 줄어든 것은 1층 안쪽에 있는 기둥을 그대로 2층까지 올려 모서리기둥으로 사용한 결과이다. 문화재청은 '이 같은 수법은 우리나라 문루(門樓)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방식이다. 부재에 사용된 조각 모양과 1층 가운데칸 기둥 위에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점들은 장식과 기교를 많이 사용한 조선 후기 건축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루 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라고 설명한다.

풍남문은 경기전 출입문에서 불과 200m 거리에 있다. 경충사도 풍남문에서 대략 1,200m 떨어져 있다. 전주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이었던 풍남문은 오늘도 전주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풍남문의 전 이름은 명견루였다.
 풍남문의 전 이름은 명견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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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어진 박물관에 가면 명견루 현판을 볼 수 있다. 유리 속에 갇혀 있는 현판 아래에 '명견루 현판'이라는 제목의 작은 설명이 놓여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명견루 현판의 크기는 325× 105cm이다.

'1734년(영조 10) 전라 감사 조현명이 전주부성을 수축하면서 성문 위 3층 문루를 "明見樓(명견루)"라 이름 하였다. 조현명이 전주성을 수축할 때 백성들이 이를 반대하고 불평하자 조정에서 논란이 일어 공사가 중단되었는데, 축성 재원의 출처와 농민들의 유료 사역(노동)을 자세히 적어 보고함으로써 영조의 특명으로 공사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래서 현군(賢君)인 영조의 명견(밝은 생각)이 있었기에 축성 공사가 가능했다는 뜻으로 "명견루"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풍남문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이 풍패였다. 조선은 이성계 조상의 고향인 전주를 '풍패향'이라 불렀다. 풍남문은 '풍'패향 전주성의 '남문'이라는 뜻이다. 홍낙인은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처럼 조선이 강하고 큰 나라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전주성 정문에 풍남문이라는 현판을 달았을 것이다. 

 전북 고부 주산마을 <무명 동학 농민군 위령탑>. 주산마을은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했던 곳이다.
 전북 고부 주산마을 <무명 동학 농민군 위령탑>. 주산마을은 전봉준 등이 봉기를 준비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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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는 풍남문이라는 큰 이름을 붙였건만

하지만 홍낙인의 염원과 달리 풍남문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도 조선 왕실 아닌 다른 주인을 섬겼다.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고도 나라가 일신되지 못했다. 권력의 집중은 심해지고 부정부패가 날로 심해졌다. 이정난과 같은 참된 선비는 드물었다. 조선 중 · 후기의 국가 최고 기관이었던 비변사의 활동을 일기체로 기록한 정부 공식 문서 「비변사 등록」조차도 1892년 1월 27일자에 '요즘 수령들은 관직을 여관처럼 여겨 장부는 모두 서리에게 맡겨 놓고 오직 뇌물 받는 짓만 일삼는다.'라고 기록했을 정도이다.

1893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전국에서 60여 차례 민란이 일어났다. 1894년 1월 고부 농민들이 봉기했다. 이어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떨치고 일어났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의 지휘부는 대규모 농민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를 누려온 무리를 없앤다.' 등의 행동 강령도 발표했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 풍남문에서 관군과 협상

1894년 4월 7일, 농민군은 고부 황토재에서 관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그 후 5월 31일에는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조선 조정은 동학군 진압을 위해 청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일본도 뒤질세라 군대를 조선 땅에 들여보냈다.

조선 땅이 외세의 전쟁터가 될 위기에 놓였다. 동학군도 정부도 원하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전개였다. 양측은 풍남문에서 만나 군사 행동을 중지하고 대개혁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전주 화약'을 맺었다.

 풍남문
 풍남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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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그 뒤에 불거졌다. 1894년 6월 21일 서울에 주둔하고 일본군이 궁궐을 점령한 후 친일파 정권을 세우고, 8월 17일 조선에 있던 청군을 몰아낸 다음 농민군을 공격하고 나섰다.

농민군은 9월 2일 두 번째 봉기에 나섰다. 이번에는 전라도만이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황해도 농민들도 대거 참여했다. 하지만 농민군은 일본군과 정부군에 이기지 못했다. 무수한 농민들이 싸우다가 죽고 체포되어 죽었다. 12월에는 전봉준도 체포되었다.

 정읍 황토현 전적지의 <갑오 동학혁명 기념탑>
 정읍 황토현 전적지의 <갑오 동학혁명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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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에도 동학혁명 때에도 선조들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내놓았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광경들을 모두 지켜본 전주성 풍남문 앞에서 우리의 역사를 생각한다. 많은 국민들이 이정난 선비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졌더라면 임진왜란, 농민 봉기, 경술국치 등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동체 정신, 자주 정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한다.

오늘은 충경로를 한번 걸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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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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