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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자의 삶은 가끔 허무하다. 모든 사람이 기록을 하는 시대, 무엇이 기록할 것이고 또 무엇은 그렇지 않은지 판가름하기도 어렵다. 애써 기록을 한다한들, 그 기록을 누군가 다시 알아봐주지 않으면 어딘가에 묻히거나 먼지 덮힌 채 잊혀질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찾아 혹은 인간이 손대 이미 망가진 광경과 현장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짐작컨대, 그 기록과 노동의 순수성만을 따지자면 이들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엇보다도 이 순수한 기록들은 인간에게 경각심을 심어준다. 경계해야 할 개발행위들, 존경해야 할 자연의 섭리, 또 한낱 일부분인 인간의 위치를 깨닫게 한다.

BBC처럼 뉴스만으로도 경쟁력 가진 언론사가 다큐멘터리 <지구(Planet Earth)>와 같은 시리즈에 에너지를 쓰는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인간이 이 자연 속에서 얼마나 작은지 느끼게 해, 적어도 살아가는 동안 파괴에 동참하는 습관과 문화에 대해 반성하자는 것. 우리는 며칠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런 일을 하던 한국인 기록자를 두 명이나 잃었다. 한국독립PD협회 회원 고 박환성 PD, 고 김광일 PD. 지난 14일 오후 8시 45분(한국시각 15일 오전 3시 45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EBS <다큐프라임 - 야수와 방주> 제작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고 박환성, 김광일 PD를 추모하는 한국독립PD협회 게시물.
 고 박환성, 김광일 PD를 추모하는 한국독립PD협회 게시물.
ⓒ 한국독립PD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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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미 PD를 통해 이 소식을 알게된 뒤, 나는 이들의 작품을 찾아봤다. 언젠가 EBS에서 본 적이 있던 <말라위, 물 위의 전쟁>의 감독이 바로 돌아가신 박환성 PD였다. 변변찮은 도구도 없이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말라위 호수 어부들의 모습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박 감독은 이 밖에도 <다큐프라임>을 통해 다수의 작품을 '납품'했다고 여러 곳에 소개돼 있는데 구체적인 정보들은 찾기 쉽지 않았다.

안타까운 사실 두 가지 중에 하나는, 두 PD가 작업한 작품들에 그들의 이름이 제대로 표기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EBS 공식 누리집에도 박환성 감독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아마 <다큐프라임> 제작에 참여한 수많은 스태프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 EBS 공식 누리집 바로가기

착취당하고 이용당한 '그들의 기록'

기록한 자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 모순이 곳곳에 있다.

김광일 PD의 경우에도 제작에 참여한 작품을 검색으로는 찾기가 어렵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이들의 기록은, 노동은, 착취당하고 이용당했다. 박환성 PD는 마지막 출국길 직전, 박 PD가 따낸 정부 지원금 40%를 '간접비' 명목으로 가져가야겠다는 EBS의 요구에 맞섰다. 관행이란 이름 아래 저작권을 양도하고, 창작자의 권리를 헐값에 넘겨야 하는 독립PD들을 대표해 싸웠다.

다른 안타까운 사실은 내가 일했던 YTN에 이들의 사망 기사가 없다는 것. 누리집을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 않는다. 뉴스가 되지 않는 내용이라 생각했을까. 아무도 몰랐을까. 뒤늦게라도 알게 된다면 기사를 쓸까.

다룰 이야기가 많은 사망이다. 언젠가 더 자세히 적겠지만, 여러 언론사, 특히 방송사 내 이같은 '불공정 계약 노동자'들은 아주 많다. 무슨 사고가 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오로지 혼자 책임져야 하는 독립PD, VJ, 작가, 앵커, 디자이너, 개발자들. 여러 장비과 기술을 활용해 기사를 '제작'하고 '방송'해야 하는 뉴스채널의 경우 번듯하게 이름을 내건 기자 외에도 적어도 십수 명의 동료들이 함께 일한다. '촬영기자' '그래픽디자이너' 이름을 3초가량 뉴스 말미에 내보내긴 하는데, 그나마도 실수로 빼놓을 때가 있다.

출연자가 있는 대담, 토론의 경우 그 원고들을 사전 작성하는 작가들이 수두룩하고, 선거철에 제작되는 각종 화려한 그래픽들도 적어도 스태프 서너 명이 참여해 만든다. 혹시나 이같은 구조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껄끄러워 두 독립PD의 사망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

가장 열악한 위치에서 일해왔던 '독립 다큐 PD'의 삶

독립 다큐멘터리 PD들은 이같은 언론계 구조 속에서도 가장 열악한 위치에서 영상을 제작해왔다. 하도급의 하도급을 받는 계약 관계, 그러면서도 창작자로서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한다. 들은 것은 적지만, 아마 내가 모르는 부당한 일과 희생은 더 많았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지만, 두 PD는 여전히 이승의 규율에 묶여있다. 남아공 현지에서 사망한 고인들의 시신을 국내로 옮기려면 많은 비용이 든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기록에 뒤늦게나마 고마움을 표하는 마음으로 나도 이들을 위해 모금 운동에 동참했다.

* 다시 한번, 고 박환성, 고 김광일 PD의 명복을 빕니다. 동물들과 더 가까이 지내시며 저승에서는 조금 더 편안히 지내시길. 일과 후에 한 잔씩 하셨다던 맥주도 실컷 드시길.

최원석 드림.

<말라위 호수 위의 전쟁>


덧붙이는 글 | 한국독립PD협회는 고 박환성 PD, 고 김광일 PD의 무사귀환을 위한 장례집행위원회를 꾸려 지난 23일 유가족과 함께 고인들이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습니다. 장례집행위원회는 남아공 현지에서 사건 경위를 정확히 파악해 이후 있을 공판에 대비하고, 유가족의 뜻에 따라 시신을 고국 땅으로 무사귀환 시키는 일을 중점적으로 할 예정입니다.



태그:#박환성, #김광일, #독립PD, #EBS, #다큐프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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