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까지 할리우드 좌파들이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해 만들어진 하원비미활동위원회(HUAC)에 소환된 적이 있다. 비미활동위원회에 소환된 영화감독, 작가들은 할리우드 자체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다. 이들 중에서는 살기 위해 동료를 공산주의자를 지명한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증언을 거부했고 그렇게 블랙리스트 인사가 되었다.

 제14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상영작 <레드 할리우드>(1996~2003) 한 장면

제14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상영작 <레드 할리우드>(1996~2003) 한 장면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영화 장면을 인용한 영화 비평의 일종)의 대가 톰 앤더슨이 노엘 버치와 다년간의 협업 끝에 완성한 <레드 할리우드>(Red Hollywood, 1996~2013)의 시작은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쟈니 기타>(1954)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비엔나(조안 크로포트 분)를 경계하던 마을 주민들은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그녀와 인연이 있던 마을 소년을 고문하며 비엔나를 공범으로 몰 것을 종용한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소년은 비엔나가 사주해서 벌인 일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고, 이 장면은 194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까지 좌파 성향의 영화인들을 블랙리스트로 몰았던 당시 시대상황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과 자막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강렬한 인상을 선사한다.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1930년대 말부터 50년대 초까지 할리우드 영화 속 장면을 차용한 <레드 할리우드>는 그 당시 공산주의자로 활동했거나 한때 좌파적 성향을 가진 적이 있는 감독, 작가들의 작품을 인용한다.  1940년대 말 좌파 성향 영화인들에게 가해진 탄압을 조명하면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감독과 작가들의 작품 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좌파 사상의 상징과 흔적들을 찾아낸다. 오직 영화 속 장면 인용들로만 구성된 톰 앤더슨의 전작 <로스앤젤레스 자화상>(Los Angeles Plays Itself, 2003)과 달리 <레드 할리우드>는 당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삽입하며 그들의 진짜 속사정을 들어보는 시간을 갖는다.

다년간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를 연구해온 톰 앤더슨은 비미활동위원회에서의 증언을 거부한 영화인들이 공산주의 사상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메시지가 담긴 영화를 만들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영화 <트럼보>(2015)의 실존 인물이자 40년대 말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가 각본에 참여한 영화들 중 상당수는 가부장제에 맞서는 여성들의 용감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30년대 말 좌파 영화인들의 관심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풍자와 더불어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자신들이 제작하는 영화에서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오프닝의 인용 장면으로 등장한 영화 <쟈니 기타>는 살기 위해 동료 영화인들을 고발해야했던 당시 좌파 영화인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우화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톰 앤더슨의 주장은 블랙리스트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사실로 입증되거나 톰 앤더슨만의 가설임으로 판명난다. 하지만 40년대 말 좌파성향을 가진 영화인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 사상이 담긴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영화 속에 자신들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주입시킨다.

블랙리스트 영화인들에 의해 담긴 좌파 사상들을 전쟁, 노동, 여성, 인종 차별 등 몇 가지 섹션으로 나누어 정교하게 분석한 <레드 할리우드>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정치사회적으로 탄압을 받았던 영화인들을 절대적으로 신화화하지 않는다. 대신, 톰 앤더슨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수많은 영화 푸티지(특정사건을 담은 장면) 발췌와 블랙리스트 영화인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톰 앤더슨이 진정으로 알고 싶어 하는 블랙리스트와 관련된 수많은 진실들을 찾고자 한다.

 제14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상영작 <레드 할리우드>(1996~2003) 한 장면

제14회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상영작 <레드 할리우드>(1996~2003) 한 장면 ⓒ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좌파 메시지 담은 영화가 불온한가

<레드 할리우드>에 따르면 당시 블랙리스트에 연루된 영화인들은 억울하게 좌파로 몰린 피해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좌파 사상 신봉자이면서, 그들 자신이 가진 공산주의 사상을 영화 속 한 장면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개중에는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엉뚱하게 공산주의(혹은 소련) 체제 찬양 영화로 몰리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럼에도 영화를 통해 사회의 모순된 단면을 함축적으로 그리고자 했던 대부분 블랙리스트 영화인들의 신념은 확고했다. 직설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레드 할리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좌파적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정치사회적으로 낙인을 찍을 정도로 불온한 행동인가.

비미활동위원회를 만들 정도로 할리우드의 좌경화를 걱정했던 미국 정부의 우려와 달리, 그들이 낙인찍은 블랙리스트 영화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뒤집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것도 아니었으며, 소련에 동조하는 것도 아닌 그저 자신들의 조국 미국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전쟁)을 반대하고 미국이 좀 더 노동 친화적이고 여성, 인종 차별이 덜한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좌파 성향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비미활동위원회는 그런 그들에게 블랙리스트(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고,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른 대가는 혹독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서야,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문제에 관심이 많은 톰 앤더슨에 의해 재조명되기에 이른다. <레드 할리우드>는 최근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심한 몸살을 앓았던 한국에도 여러 가지 생각을 안겨주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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