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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이 탄 차가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때, 그곳 파출소 앞에 서 있던 트럭 한 대가 갑자기 달려나와 몽양의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몽양의 차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몽양 일행이 어리둥절하는 찰나, 두 발의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몽양의 거구가 풀썩 거꾸러졌다. 흉한 하나가 자동차 범퍼로 뛰어오르고 몽양을 향해 권총 두 발을 쏘았던 것이다. - 481p.

독립투사이자 진보운동가였던 몽양 여운형은 해방 2년 뒤 괴한들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1947년 7월 19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딱 70년이 흘렀다. 오늘날 여운형은 한국 진보정치의 기원으로 평가받는다. 어떤 삶을 살았기에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를 기억하고, 그의 삶으로부터 미래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일까.

서거 70주년을 맞아, 여운형의 비서였던 이기형 시인의 <여운형 평전>을 다시 보며 여운형이 걸어온 길을 짚어 보고자 한다(평전이기에 일정 부분 내용을 요약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힌다).

한편 평전을 쓴 이기형 시인은 1917년생으로, 1938년 여운형을 처음 만난 후 여운형 자택을 드나들며 교류를 맺었다. 해방 이후에는 비서로서 여운형의 곁을 지켰다. 여운형의 친척 사위이기도 하다.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의 당위를 알리다

 <여운형 평전>,이기형 저,실천문학사
 <여운형 평전>,이기형 저,실천문학사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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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운형의 집안은 동학과 인연이 깊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작은아버지가 모두 동학당이었다.

할아버지 여규신은 동학 창시자인 수월 최제우와 교류했으며, 작은아버지 여승현은 갑오년 동학운동에 참가했다. 특히 동학의 최고 경전으로 꼽히는 <용담유사>를 발행한 곳이 작은할아버지 여규덕의 집일 정도로, 작은할아버지 여규덕은 동학의 핵심 일원이었다.

그런 집안 환경 덕에 여운형은 양반이었음에도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는 평등적 사고를 기를 수 있었다. 또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했지만,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와 중국 금릉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8년, 여운형은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서른 세 살의 나이로 항일운동 조직인 신한청년당을 창당한 그는 이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과 오늘날의 외교부 차관 격에 해당하는 외무부 차장을 맡았다. 

이 해 여운형 삶에서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 삼일운동 직후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일본정부가 여운형을 도쿄로 초청한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명망이 높았던 여운형을 설득해 기존의 항일운동을 보다 온건한 자치운동으로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여운형의 도쿄행에 대해 임시정부 내에서 찬반이 분분했으나, 안창호의 지지를 받은 여운형은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보장을 조건으로 도쿄행을 결정했다. 도쿄에서 일본의 장관, 육군대신, 정무총감 등을 만난 여운형은, 일제 치하에서 자치권을 보장받는 게 조선에도 이롭다는 일제의 주장을 요목조목 반박했다. 그의 논리에 감화를 받은 일본 장관이 '여운형 만세'를 외칠 정도였다.

담화를 마친 여운형은 곧바로 도쿄 제국호텔에서 기습 기자회견을 기획한다. 일본인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특파원 약 5백명이 모인 자리에서 여운형이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주제로 일장연설을 벌인 것이다.

'일본 조야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일본 의회 귀족원과 중의원, 대의원들은 논란과 물의로 수일간 일대 공방전을 벌였다. 이 연설로 몽양은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 인물로 부상되었으며, 그의 명성을 더욱 높아졌다.' -135p.

삼일운동으로 폭발한 조선 사람들의 분노를 체제 안에서의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고자, 도쿄로 여운형을 초청했던 일본을, 여운형이 도리어 역이용한 것이다. 일본이 여운형으로 하여금 수도 한복판에서 세계 각국을 상대로 자국의 만용과 조선이 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할 기회를 준 셈이다.

그럼에도 사전에 언론의 자유를 약속했던 터라 일본은 여운형을 처벌할 수 없었다. 무사히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더욱 활발하게 항일, 반제운동에 매진한다. 이때 쑨원, 마오쩌둥, 레닌, 호치민 등과 교류, 원조를 받기도 한다.

이후 여운형은 항일운동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돼 3년형을 살게 된다. 복역 후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을 맡아 언론을 통한 국내 항일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총독부에 의해 신문이 폐간되고 중일전쟁이 터져 일제의 말살 정책이 점차 심화되자, 국내를 떠나 일본으로 간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은 일본 고위층, 지식인들을 만나며 정보를 얻고 동향을 살폈다. 여운형은 머지않아 일제가 항복할 것임을 예측하고 조심스럽게 해방 후를 준비했다. 라디오를 듣지 못했던 대부분의 일반 민중들이 해방 당일까지도 해방을 몰랐던 것은 물론, 해외 독립운동가들한테서도 해방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운형의 판단은 매우 앞선 것이었다.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온 여운형은 건국준비원회를 발족시켜 일본총독부로부터 행정와 치안을 인수받는다. 이를 통해 해방 후의 혼란을 방지하고 안정을 도모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미군정은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 등 여운형을 배척했다. 좌파였던 그의 경력과 친일 세력들의 모함 탓이었다.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를 국내 언론이 오보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터지면서, 좌우 대립은 더욱 심화된다. 남쪽에 미군이 주둔하고 북쪽에서는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진영 간에 백색테러가 난무하고 이는 남북이 분단될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해 1946년 7월, 중도좌파였던 여운형은 중도우파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한다. 이 기간에 여운형은 미군정과 협상하고 김일성을 만나 설득하는 등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마저 좌우 양극단 세력에 의해 난관에 부딪히고 좌우합작위원회도 힘을 잃게 된다.

이에 지친 여운형은 정계를 떠나 잠시 고향 양평에 은거하지만,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등 급박한 상황에 임박하자, 다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좌우 중간파를 결합하고자 한다. 하지만 창당 2달여 뒤인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타리 자가용 안에서 괴한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우리가 여운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피살되기 2달 전의 모습이다.
 1947년 5월 24일 근로인민당 창당식에서의 여운형 선생. 서거 2달 전의 모습이다.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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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서거까지 2년간 12차례의 테러를 당했을 정도로, 독립운동과 좌우합작운동 과정에서 수십 차례의 테러 위협에 시달렸던 여운형으로서는 어쩌면 이는 예정된 귀결이었는지 모른다.

그도 생전에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여운형 스스로도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짐작했던 것 같다. 혁명가다운, 여운형다운 최후였던 것이다.

여운형이 죽자 좌우합작운동은 급격히 와해되고, 이에 더욱 급격해진 좌우대립은 이듬해 1948년 남북이 각각 단독정부를 세움에 따라 결국 민족 분단을 맞는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남북 대립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진보는 여운형의 삶에서 무얼 배울 수 있을까. 보수정권 9년이 지나 촛불의 염원을 안고서 민주정부가 출범한 오늘날, 진보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상, 진보정당과 진보언론, 시민단체의 행보도 과거 보수정권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보는 새 정부와 공생적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외로운 길을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운형이라면 아마 전자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좌파였던 여운형이 우파와 함께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좌우합작운동을 했듯이, 사안에 따라서는 충돌이 있을지언정, 문재인 정부와 함께 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운형의 길만이 꼭 옳은 것은 아니다. 저마다 여러 방법이 있고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다만 어떤 길을 선택하던지간에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여운형이 모든 관계에서마다 중도를 꾀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여운형이 합작하려 했던 대상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상식과 양심을 가진 우파였을 뿐,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서 일제는 타도의 대상이지 협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가 일제와의 관계에서 중도를 찾고 협의점을 찾으려 했다면, 도쿄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아 이광수와 최남선와 같은 친일파의 뒤를 따르게 됐을 것이다.

오늘날 진보는 이 점을 잘 헤아려야 한다. 무턱대고 외길을 가는 것도, 누구하고나 타협을 맺으려는 것도 곤란하다. 그 대상을 구분해야 한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가이자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사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기형 시인이 쓴 <여운형 평전>의 서평입니다. 여운형 선생을 곁에서 직접 뵌 분이기에 생생함이 있느나, 서술이 다소 고루한 면이 있습니다. 여운형 선생을 처음 접하시는 분은 김삼웅 저, <여운형 평전>(2015)을 먼저 읽기를 추천합니다.



여운형 평전

이기형 지음, 실천문학사(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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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철학과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보다 나은 삶과 더 정의로운 나라를 꿈꿉니다. 녹색당ㆍ이재명캠프에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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