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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8월 27일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첫 방문지인 지린성 지린시의 우쑹호텔을 빠져나오고 있는 모습이 일본 NHK의 카메라에 잡혔다.
 지난 2010년 8월 27일 중국을 방문하고 있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첫 방문지인 지린성 지린시의 우쑹호텔을 빠져나오고 있는 모습이 일본 NHK의 카메라에 잡혔다.
ⓒ N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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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접경지대는 남한에 사는 우리가 북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창이다. 지금처럼 직접 북한에 갈 수 없는 '단절기'에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 됐다. 그래서 지금은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그러함에도 특정 분야 논문이나 르포 기사 정도가 있을 뿐 이 지역에 대한 종합적인 자료는 부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북한 전문가인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지난 1996년부터 현재까지 20년 동안 공직에 있던 기간과 특별한 시기를 제외하고 매년 한 두차례씩  북중 국경지대를 답사하면서 모은 자료와 연구 성과를 담아 <북한-중국 국경: 역사와 현장>(세종연구소)을 출간했다.

이 전 장관은 이 책에 대해 "북-중 국경의 역사와 현황을, 경계자 지닌 이론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종합적으로 서술한 단행본"을 자임했다. 그는 2000년과 2104년에도 각각 <북한-중국 관계 1945-2000>와 <북한-중국 국경 획정에 관한 연구>등의 북중 관계 연구서를 낸 바 있다. 

북, 1962년 국경조약으로 1909년 간도협약에 비해 1200㎢ 더 얻어

<북한-중국 국경: 역사와 현장>(세종연구소)
 <북한-중국 국경: 역사와 현장>(세종연구소)
ⓒ 세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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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중 국경지대의 상징 중 하나인 백두산과 관련해, 김일성 주석이 중국에게 백두산의 상당 부분을 뺏겼다는 통념이 있다. 중국을 통해서라도 직접 백두산에 가볼 기회가 많아지면서 많이 약해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이렇게 알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는 '팩트'가 아니다. 사실상 국권이 상실된 1909년에 일본과 청이 맺은 '간도협약'에 따라 백두산 천지와 백두산 16개 봉우리가 청의 영토가 됐던 데 비해, 1962년 북중간 국경조약으로 천지 면적의 54.5%를 확보한 것을 비롯해 서울 면적(605.21㎢)의 두 배 정도인 약1200㎢의 영토를 넘겨받았다. 

북한은 또 황금평을 비롯한 압록강 상 유인도 10개 전부와 두만강의 유인도 2개 중 1개를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전 장관은 중국 자료 등을 통해 이를 분석하면서 1962년 당시 중-소 분쟁과정에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높았던 것이 그 배경이라고 짚었다. 이는 역으로 중국이 실리보다는 '분쟁 가능성 차단'을 우선했다는 것이다.

이 전 장관은 또 이전에 언론에 공개했던 "마오쩌둥 '요동은 원래 조선 땅' 발언 확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담았다.

중국 외교부가 펴낸 <모택동접견외빈담화기록휘편>과 <외사공작통보>에 따르면, 마오쩌둥(모택동) 주석과 저우언라이(주은래) 총리가 북한 대표단을 만나 "당신들 선조는 당신들의 영토가 요하를 경계로 한다고 말했으며, 당신들은 현재 당신들의 압록강변까지 밀려서 쫓겨왔다고 생각한다.…당신들이 역사를 기술할 때 이것을 써 넣어야 한다"(마오저뚱 1958년), "당신들의 경계는 요하 동쪽인데, 봉건주의가 조선 사람들을 압록강변으로 내몬 것이다"(마오저뚱 1964년),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으며 심지어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1963년 6월)라고 말했다.

꼼꼼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 전 장관은 북한과 중국간 국경통과 지점들의 위치 및 종류와 기능, 교량의 수, 발전 시설 등에 대해 전수 조사했다. 여기서 현재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중간 교량 숫자(13개)가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해 만든 교량(19개)보다 적으며, 북중은 1949년 수교 이후 2010년까지는 단 하나의 교량도 새로 만들지 않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 전 장관은 "북중 국경은 경제협력의 가교로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냉전시대 북한과 중국은 대외적으로 공고한 동맹을 과시했으나 북중 국경은 그에 걸맞은 기능을 하지 못했다"고 그 배경을 분석했다. 이념과 안보에 비해 경제협력은 부차적이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 분기점이 왜 2010년이었을까.

2009년 수교 60주년 기념으로 평양을 방문한 원자바오 총리는 김정일 위원장과 '경제기술 협조에 관한 협정', '경제원조에 관한 교환문서'들을 비롯해 교육, 소프트웨어 산업, 관광 등 다방면의 교류 활성화를 위한 협정을 맺었다. 탈냉전 이후 양국이 맺은 가장 광범위한 경제협력 합의였다.

죽음 앞둔 김정일 2010~2011년 세 차례 중국 방문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자료사진).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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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2010년 5월과 8월에 두 번이 중국을 방문한 김 위원장은 후진타오 주석과 만나 나선시와 황금평·위화도 지역 공동개발, 공동관리 경제특구 건설 등에 합의했다. 김 위원장은 죽기 7개월 전인 2011년 5월에 다시 방중해 지린성과 헤이룽장성 등 5천km에 달하는 장거리 중국 산업시찰 여행을 했다.

이 전 장관은, 김 위원장이 2008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회복한 뒤 그 후유증을 겪는 중에도 이같이 강행군을 한 배경을 "후계자 김정은에게 넘겨줄 국가생존전략이 중국식 개방임을 분명히 하는 한편 북한 지도부와 주민, 그리고 중국 지도부에게 자신의 분명한 의지를 보여주려 한 것"이라면서 "2010년 이후 북중경협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국면에서도 비교적 빠른 속도로 폭을 넓히며 발전해왔다"고 진단했다.

그는 후계자인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경제개방 의지도 상당하다고 본다. 2013년  당 중앙위원회 3월 전원회의에 경제개방전략을 공식화하고 이후 개방정책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같은 협력에는 중국 측의 '욕구'도 있다. 중국 중앙정부가 해안가에 비해 성장이 둔한 변경 지구의 발전에 관심을 갖게 됐고, 북한과 인접한 동북 3성도 적극적인 대외경제협력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국의 경제협력은 북한의 계속된 핵실험에 따른 국제 제재로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 전 장관은 그럼에도 "(제재로 인한 지체와는) 다른 한편에서 양국 경제주체간의 협력 욕구가 강해 이 제재를 뚫고 국경을 매개로 한 경제교류가 점점 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며 "이 추세는 북핵문제가 '대화·협상' 또는 '해결 진전'쪽으로 전환될 경우 대세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태그:#북중 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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