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청춘이란 무엇일까요? 정의를 보면, 만물이 푸른 봄철 또는 그런 시기라고 돼 있습니다. 만물이 푸른 봄철에 주위를 둘러보면 '어머, 예쁘다'는 말이 절로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여러분은 청춘에 살고 있습니까? 주위는 푸르른데 내가 느끼는 법을 까먹은 게 아니냐는 생각에 이르게 됐을 때, 무작정 산티아고로 향했습니다. - 기자 말

이 곳이 800km 길의 목적지라는 걸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여러 이유에서.
▲ 산티아고 대성당 이 곳이 800km 길의 목적지라는 걸 받아 들일 수 없었다. 여러 이유에서.
ⓒ 박현광

관련사진보기


산티아고로 가기로 했다. 생각이 너무 많았다.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뭐 하면서 먹고 살지?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청춘을 위로하는 글이 올라오지만, 여전히 불안한 게 청춘이다.
▲ 열정에 기름 붓기 페이스북 페이지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씩 청춘을 위로하는 글이 올라오지만, 여전히 불안한 게 청춘이다.
ⓒ 페이스북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경산님이 댓글에서 회원님을 언급했습니다' 페이스북 알람이 떴다. 내가 태그된 게시물은 '열정의 기름 붓기'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의 한 게시물이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남들이 시키는 것 말고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세요, 꿈을 찾아 노력하세요, 포기하고 싶다고요?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당신의 꿈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열정을 잃지 마세요."

뻔한 말이었지만 위로가 됐다. 하지만 희망 고문에 가까웠다. 카톡을 보냈다.

"산이 형, 나중에 뭐 하면서 먹고 살죠?"
"몰라, 뭐든 해 먹고 살겠지."
"저 이제 27살인데, 아직 하는 것도 없고."
"마, 나는 29살인데, 이러고 있다."

뭐 하면서 먹고 살지? 지난 2016년 1월,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어학연수를 떠났다. '경험을 쌓아서 그릇을 키우겠다'며 떠난 어학연수는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상태로, 취업 준비생이 되기가 두렵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해외로 나가면 짧은 길이라도 작은 길이라도 보일 줄 알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내가 돌아온 뒤 달라진 건 나이가 한 살 더 들어 있었다는 것과 그만큼 불안감이 더 심해졌다는 것뿐이었다.

주위 친구들은 직장인이 돼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몰라 방황하는 대학생이었다. 내가 신세타령을 하면 산이 형은 좀 더 깊은 한숨으로 날 위로했다. 산이 형은 직장 생활을 조금 하다가 해외로 뛰쳐나와서 나보다 두 살 많았지만 나와 같은 처지였다. 우리는 답답할 때마다 한숨으로 서로를 위로하곤 했다.

어학연수가 부럽다고? 그 또한 내게는 스트레스였다

짧게 요약하자면, 어학연수는 외로운 파스타 한 그릇과 같다. 그리 자유롭지도, 그리 낭만적이지도 않다.
▲ 이것이 어학연수다. 짧게 요약하자면, 어학연수는 외로운 파스타 한 그릇과 같다. 그리 자유롭지도, 그리 낭만적이지도 않다.
ⓒ 박현광

관련사진보기


어학연수 일 년, 영어 실력 측면에서 보자면 완전히 실패였다. 그 흔한 토익, 토플 점수는 고사하고, 어학원 수료증조차도 없었다. 다니던 어학원을 5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영어는 책상머리에서 느는 게 아니'라는 핑계로 여행을 다녔다. 덕분에 외국인 울렁증은 없어졌지만, 이력서에 넣을 구절 한 줄 마련해오지 못했다.

문제는 그 일 년을 아버지에게 받은 돈으로 쏘다녔다는 거다. 돌아오고 보니 아버지가 통장에 넣어 주었던 자취방 전세금이 탈탈 털려 있었다. 밀려오는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동시에, 한편으론 억울했다. 통장에 있는 돈을 몽땅 쓸 줄 알았다면 차라리 여행이라도 마음 편하게 할 걸! 어학원을 때려치운 뒤, 어학연수도 아니고 여행도 아닌 어정쩡한 선에서 나머지 7개월을 보냈었다. 지난 일 년간 '부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정작 내게는 일 년 동안의 생활이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무언가 얻어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여행을 해도 스트레스 공부를 해도 스트레스였다.

이제 정말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마음 편히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했다. 딱 10개월만 일하고 번 돈으로 여행하자 싶었다. 물론 떠나기 전에 '이게 맞는 건가?' 수 없이 되물었다. 지금 떠나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내 시계는 상대적으로 너무 느려지는 것이었다. 친구를 앞에 앉혀두고 눈물을 흘려가며 내 안의 분열된 자아가 싸우는 모노드라마 한 편을 찍기도 했다. 결국, 호주로 갔다.

"너 뭐하냐?"

호주에서 일한 지 4개월째, 내 수 많은 자아 중 항상 날 채찍질하는 놈이 내게 물었다. '나 뭐하지?' 내 계획대로라면,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가서 대학을 졸업하면 29살이었다. 갑자기 불안함이 날 휘감았다. 늦은 나이가 아니라며 누나들은 날 응원했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마침 취업 프로그램과 연계된 IT 수업 공지가 떴다. 초보자도 참가할 수 있고,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준다고 했다. 당장 취업을 하지 않더라도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법을 배워두면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사실 돌아갈 핑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확실하냐? 너 이대로 갈 거야?"

이번엔 내 안의 '자유로운 영혼'이 물었다. 예견된 일이었다. 좋다, 타협하기로 했다. IT 수업은 7월에 시작하니까 남은 기간 여행을 하기로.

"나 이제 뭐 하지?"

"툭툭아저씨 날 더운데 얼른 가죠" 더위가 짜증 났을 뿐. 한 시간만에 끝난 나의 앙코르와트.
▲ 기대했던 앙코르와트였거늘! "툭툭아저씨 날 더운데 얼른 가죠" 더위가 짜증 났을 뿐. 한 시간만에 끝난 나의 앙코르와트.
ⓒ 박현광

관련사진보기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까지 동남아시아를 돌기로 했다. 말레이시아의 세계 3대 반딧불이 습지를 가도, 태국에서 타이 마사지를 받아도, 캄보디아의 상징인 앙코르와트를 가도 기쁘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만 가득했다. '일단 여행에 집중하자'고 아무리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봐도 걱정은 껌딱지처럼 내게 딱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가자, 산티아고로

영화 <위대한 독재자> 중 한 장면. 마지막 연설 장면은 가슴을 울린다.
 영화 <위대한 독재자> 중 한 장면. 마지막 연설 장면은 가슴을 울린다.
ⓒ (주)엣나인필름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생각은 너무 많이 하지만 너무나 조금만 느낍니다."

베트남에 위치한 한 숙소에 도착해 침대에 누웠다. 마지막 여행지였다. 나가봐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차라리 푹 쉬자 싶었다. 휴대폰을 들어 페이스북을 켰는데,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 마지막 부분이 올라와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맞다, 내가 지금 아무것도 못 느끼는구나. 머릿속에 똥이 가득 차서 내 뇌 속에 새로운 영상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기분이었다.

"군인들이여! 자기 자신을 짐승에게 넘기지 마십시오. 당신을 노예로 만들고, 당신의 삶을 지배해서, 당신에게 어떻게 하도록, 어떻게 생각하도록, 어떻게 느끼도록 만드는, 기계 같은 심장을 가진 기계 같은 인간들에게 자기 자신을 넘기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기계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인간입니다."

느끼지 못하면 기계와 다를 바가 뭘까. 나 스스로가 기계가 되고 있었다. '느껴보는 것'이 너무나 그리웠다. '와~'하고 느껴본 지가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우선 머리에 든 똥부터 비워야 했다. 자연으로 가자, 탁 트인 곳으로. 순간이었다, 이런 마음을 먹은 건.

처음엔 네팔을 떠올렸다. 내가 살면서 가장 신선한 기분을 가지고 있었을 때가, 네팔에서 산을 오를 때였다. 우선 베트남에서 가까워서 좋았다.

"이왕이면 나중에 가기 어려운 곳으로 가라."

자문을 구했더니, 작은 누나는 내가 네팔에 가는 게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산티아고가 튀어나왔다.

"산티아고는 어떤데?"
"산티아고? 그게 뭔데?"

산티아고는 성경에 나오는 성인 야고보를 뜻하는 스페인 말이다. 산티아고에 간다는 말은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스페인 북서부의 산티아고 데 꼼뽀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위치한 산티아고 대성당에 간다는 말과 같다. 이 길을 까미노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야고보에게로 가는 길'이라고 부른다. 중세 순례자들은 자신의 집에서 걸어 산티아고까지 갔다지만 지금 와서는 몇 갈래 큰 길이 정해져 있다. 그중 프랑스 국경 마을인 생장 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부터 800km를 걷는 게 가장 일반적인 경로다.

길을 통해 세상을 보고자 한다.
▲ 김진석 사진작가 길을 통해 세상을 보고자 한다.
ⓒ 김진석

관련사진보기


이 길을 알게 된 건 <오마이뉴스> 대학생 인턴을 하던 때였다. 김진석 사진작가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산티아고를 다녀온 것이 아닌가. 길 위의 사진가라는 별명을 얻어왔다는 그가 당시 손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게 인상 깊었다.

800km를 걷는다? 사실 호주에 갈 때부터 산티아고는 내게 가고 싶은 여행지 0순위였다. 호주에서 일이 끝나면 피곤해도 뜀박질로 산티아고에 갈 체력을 키웠었다. 스스로 시간도 돈도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일찍이 '다음에'라는 말 뒤로 감춰버렸었다.

800km의 고행길, 아무 생각 하지 않기엔 최고였다. 지금 꼭 내게 필요한 길이었다. 촉박하지만 빨리 걸으면 수업 시작에 맞춰 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페인? 거기 좋겠네."

다음 날, 이틀 뒤 출발하는 비행기를 끊었다. 한 가지 다짐했다. 이번엔 아무것도 얻어 오지 말자고. 그냥 가서 걷고 오자.

덧붙이는 글 | 2017년 5월 22일부터 6월 29일까지 걸어서 산티아고를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은 가명을 썼습니다.



태그:#산티아고, #청춘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