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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8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연일 흥행 돌풍을 이어가면서, 영화 속 주인공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정작 타이틀롤을 맡은 박열보다 그의 연인이자 동지였던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관심이 더 뜨거운 것 같다. 실제로 쏟아지는 영화평들을 살펴보면 온통 가네코 얘기들 뿐이다. 오죽하면 영화 제목을 <가네코 후미코>로 했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 말이다.

가네코 후미코, 스크린을 통해 부활하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책 표지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책 표지
ⓒ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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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배우 최희서가 분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연인이기 전에 그 스스로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적 통치를 거부하며 아나키즘을 실현하고자 하는 여성 아나키스트로 등장한다. 박열 못지않게, 아니 때론 박열보다 더 의연하고 당돌한 태도로 옥중투쟁을 벌이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더욱이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묘한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에게 따라붙는 '일본인', '여성', '아나키스트'라는 수식어는 우리가 배워온 역사 속에서도 소수 혹은 약자를 상징하는 키워드들이다.

그런 탓에 우리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가네코가 자리 잡을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 <박열>을 통해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역사적 인물로 대중들에게 성큼 다가섰다.

다행히 가네코는 생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한 옥중수기를 남겼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책은 가네코 자신이 아나키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회상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영화 속에서 가네코가 열심히 집필하는 원고가 바로 이 수기다).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기억

사람은 자라면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가네코 역시 처음부터 세상에 불만을 가진 채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아나키스트로 만든 것은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됐다.

가네코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이모와 눈이 맞아 새 살림을 차렸고, 어머니 역시 여러 남자의 품을 전전하던 끝에 가네코를 친정에 맡겨버린 채 멀리 떠나버렸다.

가네코가 세상에 나와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식마저 내팽개쳐버린 부모의 무책임한 모습이었다. 가네코의 무의식 속에서 자라난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증오심은 바로 불행했던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됐던 셈이다.

"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목청껏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다. 특히 세상의 아버지들이나 엄마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다. '당신들은 정말 아이를 사랑하나요? 당신들의 사랑은 본능적인 모성애가 있을 때만 사랑이고 그 다음은 완전히 당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아이를 사랑하는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하고." - p.76

9살 무렵 "호강을 시켜주겠다"는 친할머니의 말만 믿고 따라나선 조선행은 그에게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

자신의 옥중수기를 재판정에서 낭독하는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의 모습. 영화 <박열> 스틸컷 中
 자신의 옥중수기를 재판정에서 낭독하는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의 모습. 영화 <박열> 스틸컷 中
ⓒ 메가박스㈜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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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는 조선에서 보낸 7년 동안의 생활을 매우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만큼 조선에서의 생활은 가네코에게 강렬했던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네코는 이 당시의 경험을 얘기하지 않고선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가네코가 회상하는 조선에서의 생활은 '노예적 삶' 그 자체였다. 호강을 시켜주겠다던 할머니의 약속과 달리 그는 할머니댁의 '식모'로 전락해버렸다. 그의 할머니는 마지못해 그를 학교에 보내긴 했지만 더 이상의 '은혜'는 베풀지 않았다. 미술 수업을 위해 물감이 필요했던 그에게 할머니는 매정하게 한 마디 던질 뿐이었다.

"넌 말이야, 잊은 것 같은데, 넌 무적자였어. 무적자는 말이야, 잘 들어. 태어나도 태어나지 않은 거야. 학교 같은 데도 갈 수 없어. 가더라도 남들에게 업신여김이나 당하고 말이야. 그런 널 내가 불쌍히 여겨 호적에 넣어준 거야. (…중략…) 그런데 제 주제도 모르고 남들 하는 거 다하려드니 기가 막히는구나." - p.96

남들이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으며 기뻐할 때도 그는 홀로 졸업장을 받지 못한 채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있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 이유를 몰라 답답하기만 했던 그는 비로소 자신이 남들과 다른 이유를 깨달았다. 호적에 없는 무적자였기 때문이다!

한창 어리광 부릴 나이의 소녀에게 가족으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하는 경험은 얼마나 가혹한 폭력인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한 가네코는 실제로 이때 자살을 처음 결심한다.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깊은 강물 속에 빠져죽겠노라며 강가로 달려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푸른 나무와 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가네코는 '내가 왜 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비로소 그는 악착같이 살아남아 세상에 복수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억압과 속박 아래 해방을 꿈꾸다

역설적이게도 가네코의 두 눈을 뜨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당시의 불행했던 기억들이었다. 유년시절 경험한 가족들의 학대, 자신을 성적으로 가벼이 여기던 남자들, 힘 있고 돈 많은 이들에 의해 짓밟히면서도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던 현실들이 가네코의 가슴 속에 분노로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그리고 그 분노는 가네코로 하여금 세상의 부조리에 눈을 뜨고 정면으로 저항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비로소 가네코는 '나 자신의 일'을 해야겠노라 결심한다.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나 자신의 일을 말이다." - p.334

영화 <박열> 스틸컷
 영화 <박열> 스틸컷
ⓒ 메가박스㈜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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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네코에게 박열은 운명처럼 다가왔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박열이 쓴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가슴이 뛰는 경험을 한다. 박열의 시를 통해 그는 박열이야말로 '나 자신의 일'을 함께 할 수 있는 동지임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그 시를 읽었다. 이리도 힘 있는 시가 있으랴. 한 구절 한 구절이 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것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황홀할 정도였다. 내 가슴의 피가 뛰고 있었다. 어떤 강한 감동이 나의 전 생명을 고양하고 있었다." - p.332

가네코의 수기는 그가 박열과 만나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뜻을 함께 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후의 행적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다. 가네코는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체포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그는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됐지만 3개월 만인 1926년 7월 23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한다. 그때 그의 나이 23세였다.

가네코의 수기에는 역사적 위인의 자서전이나 평전에서 드러나는 위대한 업적도, 명성도, 거창한 포부나 신념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가부장적 권위에 고통 받던 한 소녀의 가련한 인생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이 그 어떤 영웅의 서사시보다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희망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수기에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피워내고 끝내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꿈꾸었던 한 평범한, 그래서 더욱 위대한 삶의 여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비록 가네코는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자신을 억압하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나 자신의 일'을 하겠다는 꿈을 이뤄냈다. 어쩌면 그는 눈을 감는 순간,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냈노라 만족스러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치고 힘들 때 비로소 집어들어야 할 책

1931년에 출판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에 실린 가네코 후미코의 캐리커처. 1926년 3월 24일 모치즈키 가츠라가 그린 그림으로, '죽기 직전 저자의 초상'이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1931년에 출판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何が私をかうさせたか)>에 실린 가네코 후미코의 캐리커처. 1926년 3월 24일 모치즈키 가츠라가 그린 그림으로, '죽기 직전 저자의 초상'이라는 설명이 달려있다.
ⓒ 일본국립국회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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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가네코의 수기를 한 번쯤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단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역사적 인물을 기억해달라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역시 절망 속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오늘날의 누군가에겐 가네코의 삶이 희망의 등불이 되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 실낱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을 때, 이 책을 펼쳐보기를 바란다. 가네코의 험난했던 삶의 기록은 당신에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원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머지않아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현상으로서는 멸해도 영원의 실재 중에는 존속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 가네코 후미코

덧붙이는 글 |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이학사, 2012.04.10, 18,000원.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일본 제국을 뒤흔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이학사(2012)


태그:#박열, #가네코후미코, #아나키스트, #일본, #최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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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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