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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리 낭골의 아틀리에
 화암리 낭골의 아틀리에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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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 화백의 아틀리에는 충주시 동량면 화암리에 있다. 화암을 순우리말로 하면 '꽃바우'다. 도로명 주소로는 화암낭골길이다. 여기서 낭골(浪谷)은 물결 골짜기라는 뜻이다. 산골짜기 위로 올라가면 한강의 물결이 보이기 때문이다. 낭골은 정말 오지 중 오지였다. 그러나 충주댐이 생기면서 마을 앞으로 길이 났고, 그 때문에 찻길이 좋아진 편이다. 그러나 시내버스가 하루에 2회밖에 운행하지 않아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나는 승용차로 충주댐을 지나 상류로 올라갔다. 2㎞쯤 올라가면 충주호선착장이 나온다. 충주호선착장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신단양까지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서운리 방향으로 2㎞를 올라갔다. 그러면 낭골 시내버스정류장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100m쯤 떨어진 마을 한가운데 문은희 아틀리에가 있다. 1994년에 이곳과 인연을 맺었으니 벌써 24년이 지났다.

아틀리에의 문은희 화백
 아틀리에의 문은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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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온 결정적인 계기는 김구산(金龜山: 1937-2016) 선생이었다고 한다. 김구산은 1977년까지 중앙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내고, 1978년 출가해 승려가 된 분이다. 법명은 법암(法巖)이다. 그가 동방불교대학 교수를 하며 낭골에 먼저 자리를 잡았고, 그의 추천으로 문 화백이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는 김구산 선생의 불교 강의가 문 화백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든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점점 외롭고 불편해진다고 한다. 교통도 불편하고 친구도 없고 그림에 몰두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아직은 몸이 건강한 편이고 정신도 멀쩡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선지 문은희 화백은 많은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해준다. 문 화백은 자신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는 미술관이 세워지길 바라고 있다.

남관 화백에게 그림의 기초를 배우다

남관 필적
 남관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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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 화백은 그림의 출발을 스케치라고 생각한다. 대상을 선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없으면 그림이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풍문여고 2학년 때인 1948년 남관 미술연구소를 찾아간다. 노량진에서 전차를 내린 다음 흑석동 미술연구소를 찾는데 한나절이 걸렸다고 한다. 그것은 당시 미술연구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고개를 두어 개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남관(南寬: 1911-1990)은 1935년 일본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인 1947년 이쾌대(李快大), 이인성(李仁星) 등과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1948년 한국에서는 두 번째로 미술연구소를 열었다. 문은희를 본 남관 선생은 웃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여자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남자들 사이에서 스케치를 배우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문 화백의 스케치
 문 화백의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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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남관선생이 강조한 것은 스케치의 중요성이다. "손에서 스케치북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스케치와 드로잉은 인물, 동물, 자연을 그릴 때 특징을 잡아 생명력을 불어넣는 개념이다. 대상에 나만의 개성을 부여하는 훈련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분보다는 전체를 보는 눈을 키우도록 했다. 이러한 것이 문은희로 하여금 천 점 이상의 스케치를 남기도록 했다.  

남관 미술연구소에서 만난 친구가 판화가 황규백(黃圭伯: 1932-)이다. 황규백은 그 후 파리에서 공부하고 현재 뉴욕에 살면서 세계적인 판화가의 반열에 올랐다. 황규백은 6.25사변 때 문은희 가족이 밀양으로 피난을 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황규백은 1974년 황규백 판화전을 처음 열었고, 1989년 현대화랑에서 판화 인생 20년을 정리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2015년 5월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황규백 화백의 그림 인생 60년을 정리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남관 미술연구소를 찾는 문은희를 보고 당시 풍문여고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김경승(1915-1992) 조각가가 미술부를 만들었다. 김경승 선생은 도쿄 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경성사범학교 선생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했다. 1949년 제1회 국전부터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대표작으로 이순신장군상(1955), 맥아더장군상(1957), 김구선생상(1968) 등이 있다.  

결혼 조건은 '미대에 보내주는 것'

문은희의 결혼 사진
 문은희의 결혼 사진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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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의 대학 입학은 6.25사변으로 늦어졌다. 또 미술에 대한 애착 때문에 결혼에 대해서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전쟁 후 부모님의 독촉으로 선을 보게 되었다. 서양식 예식장을 운영하던 문은희의 어머니와 당시 천도교 부교령이던 황의철(1928-1994)의 아버지가 사돈을 맺자는 생각에 자신의 딸과 아들을 만나게 해 준 것이다.

문은희는 황의철의 첫인상이 좋았다고 말한다. 우선 잘 생겼고, 건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혼 후 대학에 보내주어야 한다는 조건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1954년 큰아들 문연이 태어났다. 1955년에는 원하는 대로 홍익대 미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1957년에는 둘째 아들 태연이 태어났다. 두 아들을 키우며 학교 다니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젊음과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아들과 함께 한 졸업식 사진
 두 아들과 함께 한 졸업식 사진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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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58년에 문제가 생겼다. 남편이 공부를 더 한다는 명목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육아와 미술도 어려운데, 이제 집안의 경제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욱이 그때는 원화 가치가 없어 남편의 유학비를 대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고 한다. 문은희는 당시의 어려운 사정을 편지를 통해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다행히 황의철은 8년 만에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그런데 지난 8년간 아내가 보낸 편지는 다 버리고 덜렁 냉장고 하나만 들고 들어왔다고 한다. 이때 문은희는 크게 실망했다. 다행히 남편은 품질관리(Q/C)라는 신학문을 공부했기 때문에 그는 한양공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된다. 품질관리는 당시 떠오르는 실용학문으로 산업체와 학교에서 주목을 받았다.

황의철 교수와 문은희 화백
 황의철 교수와 문은희 화백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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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학교뿐 아니라 관공서와 공장 등을 다니며 품질관리 전도사가 되었다. 그 때문에 집안일은 모두 문은희가 도맡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또한 자기 일만 알지 예술에는 문외한이어서 예술적 파트너로서도 낙제점이었다. 결과적으로 문은희는 예술을 추구하고 황의철은 학문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 그리고 1994년 문은희가 충주호 인근 동량면 낭골에 아틀리에를 마련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또 대학에서 은퇴한 황의철 교수가 마땅히 갈 곳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7월에 황의철 한양공대 명예교수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황의철 교수는 공업 표준화와 품질관리의 중요성을 우리나라에 알린 선구자였지만, 아내와 자식에게는 그렇게 무심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홍익대 미대에 들어가 배운 것은?

청전 이상범 교수
 청전 이상범 교수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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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희가 대학에 들어가 다시 그림을 시작한 것은 1955년이다. 처음에 들어갈 때는 회화과였는데, 2학년 때 동양화와 서양화 전공으로 분과되면서 동양화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것은 서양화를 통해서는 서양의 화가들을 능가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녀가 지금까지 배운 서양화의 스케치 기법에 동양적인 채색과 정신을 더하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때 동양화과를 이끄는 교수는 이상범, 김기창, 천경자 세 사람이었다. 문은희는 가장 먼저 이상범 교수를 따랐다. 그것은 그의 산수화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기창 교수에게서는 인물의 역동적인 필선을 배울 수 있어서, 가끔 연구실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면 청전 제자가 왜 내게 왔냐고 핀잔을 주곤 했다고 회상한다. 

평생의 스승 운보 김기창
 평생의 스승 운보 김기창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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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상범 교수는 산수를, 김기창 교수는 인물을, 천경자 교수는 채색을 주로 지도했다. 당시 청전은 이미 화단의 원로이며 과의 간판 교수였다. 운보 역시 40대의 교수로 전통과 종교의 새로운 소재에 천착하고 있었다. 그는 문은희에게 평생의 스승이 되었다. 이에 비해 천경자 화백은 30대의 젊은 교수로 새로운 화풍을 실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자교수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은희 선생에게 과천 현대미술관에 있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진위에 대해 물어보았다. 문 화백은 위작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것은 위작을 그려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란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 내 작품이 아니라는데, 검찰과 화상들은 진품이라고 하니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는가! 또 최근에 이우환 작가의 작품도 문제가 되었다. 이건 거꾸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라 하는데, 경찰은 위작이라고 하고 있다. 미술계가 정말 혼란스럽다. 

두 아들은 어떻게 키웠을까?

아들를 안고 학교에 간 문은희
 아들를 안고 학교에 간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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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시험 때 만삭으로, 입학 후 아이를 안고 학교에 나타난 문은희를 본 학생들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문은희는 그게 그리 창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오히려 당당하게 아이를 데리고 수업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케치 여행을 떠날 때도 아이를 데리고 가곤 했다. 그러면 남학생들이 아이를 안아주고 업어주고 해서 그림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았단다. 

또 청전 이상범 교수가 "너는 결혼해서 학교에 들어올 정도로 의지가 대단하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또 자신의 화실에 와서 작품 활동을 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문은희는 청전 화실에서 그림공부를 하게 되었다. 청전은 "작품 활동을 할 때는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도 해주었다고 한다. 의지와 평상심, 이것이 청전에게서 배운 예술철학이다.

그러나 1957년 둘째가 태어나자, 삶은 곧 전쟁이었다. 생활을 하면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가정부가 있어 살림을 맡아했기 때문에 육아와 공부만 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두 가지 일도 분리가 어렵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림 그린다는 명분으로 남들처럼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 문은희 화백의 자식들 중 둘이 예술의 길로 들어섰지만 엄마만큼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다.


태그:#결혼, #남관,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 #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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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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