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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립형 소농 10만 농군'을 길러내자. 대도시에 기형적으로 집중돼 결국 도시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는 청장년층을 농촌으로 이주, 분산시켜내자. 농촌에서, 농업을 생업현장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도록 기회를 만들어주자. 그들에게 천지사방에 놀리고 있는 농토를 경작하게 하자. 살 집도 빌려주고 영농·생계자금도 지원해주자. 농산물은 우선 정부에서 제값 쳐서 팔아주자. 이른바 '자립형 소농 10만 농군'이 우리 농촌을 지탱하고 살아간다면, 문제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겠는가."

십수 년 전 어느 신문에 실은 기고문이다. 이 주장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유효하다. 사실상 한국에는 소농(小農) 정책이란 부실하거나 부재하다고 본다. 소농 정책이 버티고 있어야 할 자리는 대신 '살농(殺農) 정책'이 차지하고 있다. 최소한 1960년대 제3공화국 이래 농정당국의 구호는 정권마다 미시적 변화는 있었으되 근본적인 농정의 철학과 기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EU의 전형적인 소농이지만  오스트리아 최고의 빵을 만드는 '오스트리아 티롤의 프리히너호프 가족농‘
▲ 오스트리아의 소농 EU의 전형적인 소농이지만 오스트리아 최고의 빵을 만드는 '오스트리아 티롤의 프리히너호프 가족농‘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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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정책의 부재 또는 '살농정책'의 건재   

소농 정책 대신 살농 정책이 득세하고 있다고 믿는 합리적인 추론과 논거는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진보적 경제학자 박현채를 통해 볼 수 있다. 박현채가 남긴 한국농업, 한국경제, 민족경제, 민중운동 관련 저작들을 읽고 나면 "왜 이 나라 농업, 농촌, 농민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일단 그는 농지개혁의 실패, 잉여농산물 도입 등으로 질곡에 빠진 우리 농업, 농촌 적폐의 뿌리를 적나라하게 해부한다. 나아가 협업농업 등 외과처방 수준의 본질적, 혁신적 해법까지 제시한다.

박현채에 따르면, 한국 소농의 몰락, 소농정책의 부재, 살농정책의 건재는 1966년 민주공화당 정책연구실의 농업기본법안으로부터 출발한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전형적인 농업국가였다. 국민 10명 가운데 6명은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순정한 소농이었다. 당시 농업은 가장 중요한 국가경제이자 국가기간산업에 다름 아니라서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민주공화당은 농업의 운영기조부터 서둘러 정한 것이다. 농업국가로서 명운이 달린 중차대한 국가적 숙제였던 셈이다.

당시 민주공화당은 한국농업의 생산력 정체와 빈곤의 원인이 농업 경영의 영세성에 있다고 봤다. 진단과 분석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처방은 정확하지 않았다. 박현채식의 표현과 어투를 그대로 살리자면, "과소경영 청산을 위해 농업을 자본제적 경영을 통한 확대재생산의 경제단위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또한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윤이 실현되는 형태의 농업경영에로 농업을 자본주의화 시키는 것으로 개념되어지는 중농정책을 시행하도록" 정부에 무거운 의무를 부과하고 말았다.

또 박현채는 "그간 한국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분업 체계에 긴밀한 관련을 가짐으로써 유지되어 왔다"면서, "그것은 식량문제의 경우 값싼 미국 잉여농산물의 도입으로 저농산물 가격정책을 견지하고, 저노임을 기초로 한 가공수출의 증대로 수입재원을 확보한다는 전략이 기축을 이루도록 되어 있었다"고 갈파했다. 그래서 "한국은 만성적인 식량 및 원자재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합리적이고 통찰력있는 주장에 얼마든지 공감하고 동의한다. 그렇다면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에 정통성이 결여된 특정 정치권력에 의해 소농의 몰락은 일찍이 기획되고 예정되었던 게 아닌가.

‘마을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소농을 키우는 ‘순창 농촌생활학교’
▲ 순창 농촌생활학교 ‘마을에서 먹고 살 수 있는’ 소농을 키우는 ‘순창 농촌생활학교’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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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정책은 경제학이 아닌 사회학, 복지학으로

이후, 지난 50년 동안 살농정책을 고수하고 있는 한국 농정당국의 핵심 미션은 기업화, 산업화, 규모화'일 것이다. 농업선진화, 농촌지역개발, 6차산업, ICT 융복합농업, 스마트농업 등 현란한 수사와 장식의 농정구호에서 일관된 방침과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글로벌경제 시대에 규모화, 집단화, 공업화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그런 국제적 시장질서까지 고려해 수립한 거시농정의 특혜를 받을만한 농민, 농업법인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2016년말 기준으로 106만호 정도 잔존한 우리 농가의 평균 농지보유 면적은 1.56ha에 불과하다. 그나마 1ha 미만인 농가는 전체 농가의 65%가 넘는다. 평균 농업소득은 1006만8000원이다. 그나마 농업소득 1000만 원도 안 되는 농가가 역시 65%, 70만 가구에 달한다. 농가인구의 40%가 65세 이상의 노인이다. 그러니까 한국 농부의 표준형은 1,5ha의 농지에서 농사를 지어 한해에 1000만 원을 버는 영세 고령농의 처지인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소농이란 농사만 정직하게 지어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사회취약계층의 표본집단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런 열악한 소농의 생활현장에서 '돈 벌어 부자 되는 농업'이나 '고부가가치 고소득 첨단농업' 같은 농업경제학의 전략과 방식은 대다수 한국 농민들에게 궤변이나 거짓말로 오인받기 십상이다. 소농, 가족농, 고령농이 지배하는 생계형 농업 구조에 매달린 한국 농업의 현실에 기업농 중심의 상업농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따라서 소농들끼리 협동과 연대를 통한 공동 생산, 공동 가공, 공동 유통 방식의 공동체 농업모델에 기댄 사회적 농업이 거의 유일한 소농의 활로라고 믿는 이유다. 

무엇보다 소농들이 모여 사는 마을공동체로서 우리 농촌을 단순한 생산의 공간으로만 조망하고 활용하는 건 편협한 시각이다. 농부들이 농사라는 생업에만 매달리는 곳은 농촌이 아니라 농장이라 부르는 게 더 마땅하다. 따라서 농촌을 '삶과 일'이 하나되는, 생산의 공간과 생활의 공간이 조화되는 복합적 공간으로 재설계, 재생할 필요가 있다. 결국 농정 연구자와 정책입안자들은 소농을 단순한 경제활동 인구로서뿐 아니라 사회복지의 수혜 대상으로 대우하는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그러자면 농정의 패러다임이 전업농, 기업농 위주의 '돈 버는 농업'이라는 상업화, 규모화 일변도 패러다임에서 소농, 가족농 중심의 '사람 사는 농촌' 중심 패러다임으로 전향적으로 이동되어야 한다. 소득 중심 농업경제학의 시각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농민 기본소득 등 기초생활 보장제, 다원적 공익농업 직불제 등 농가 소득 보전책을 비롯해, 보건, 주거 등 사회안전망, 영농공동체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플랫폼을 토대로 한 농촌사회학, 사회복지학 측면의 법, 정책, 제도 정비 및 개보수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순정한 소농을 꿈꾸는 귀농인들이 협동해서 경작하는 홍성 홍동면의 협동농장
▲ 홍성 협동농장 순정한 소농을 꿈꾸는 귀농인들이 협동해서 경작하는 홍성 홍동면의 협동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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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농정책의 사회학적·복지학적 해법, '농민 기본소득'

소농정책의 당면 지상목표는 단순명쾌해야 한다. 소농의 기초생활이 가능하도록 지원하느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자면 국가와 정부는 농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줘야 한다. 이른바 '월급형 농민 기본소득제'가 그것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수호하는 공익적 농민이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국민의 세금으로, 정부의 예산으로 소득을 보전해주자는 것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EU 선진농업국들은 농가소득의 50%~90%까지 직불금으로 농가의 기본소득을 보전해준다. 그 결과 대다수 EU 회원국들의 식량자급률은 100%가 넘는다.

물론 EU와는 역사와 차원이 다른 한국 특유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때문에 당장 전면 시행이 어려울 수 있다. 그렇다면 일단 일본의 청년취농급부금, EU의 청년농업직불금 처럼 젊은 귀농인, 소농에게 정착금 용도로 한시적·조건부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단계부터 시행하면 된다. 가령 일본의 경우, 농업을 새로 시작하는 소농(45세 미만)에게 연수기간 2년과 농업 개시 후 5년 등 최장 7년간 해마다 150만 엔(약 2천200만 원)씩 최대 1천50만엔(약 1억5천40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그런데 "농민에게 먼저 기본소득을 주자"는 주장을 하면 도시민, 노동자 등 일반 국민들은 좀 불편할 수 있다. 먹고 사는 게 마찬가지로 힘든 도시노동자, 도시빈민들은 "왜 농민에게만 기본소득을 주느냐"며 비판하고 저항할지 모른다. 농사를 짓지 않는 농촌지역 주민들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농정의 진실과 기본소득제의 가치를 국민 속으로 널리 전파하고 공유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농민 기본소득은 오로지 농민만을 우대하는 목적이 아니라"고, "소농에게 기본소득을 주면 농민들은 이농, 폐농해 도시난민으로 몰려들지 않고, 기왕의 도시난민들도 얼마든지 귀향, 귀농할 수 있을테니, 결국 도시를 살리고 국가를 살리는 유력한 해법"이라고, "그래야 농민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국민은 농민의 생활을 지킬 수 있지 않겠냐"고.

농민 기본소득제와 별도로 기존의 '농업직불금제'도 병행해서 개선해야 한다. 현행 제도와 시스템은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비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운영되는 10개의 농업직불금 제도는 각각 목적, 예산, 법률, 지침, 운영기준 등이 다르고 한정된 예산을 나눠 쓰다 보니 제도당 예산규모도 작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직불금의 수급 대상인 농민의 만족도, 인지도가 극히 낮다. 쌀수매제에서 쌀 직불제로 전환하면서 수매가격을 완전히 대체하지도 못했을 정도다.

무엇보다 농지 규모, 생산성과 연계되는 지급방식으로 대농과 소농간의 소득 양극화를 부추기는 부작용도 심각하다. 따라서 EU처럼 운영방향을 소득보조에서 농업·농촌을 공공재로서 바라본다는 관점에서 다원적․공익적 기능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가령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은 '농가 단위로 기본소득 직불금을 지급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법정 최저임금소득의 50%를 농가에 보충 지원한다고 가정하면, 농가 호당 약 월 50만 원, 연간 600만 원을 지급하면 된다. 이 기본소득을 '농가 직불금' 개념으로 전국 농가 110만호에 일괄 지급한다면 연간 총 6.6조 원 정도가 소요된다. 2013년 기준으로 농가 평균소득의 17.4%, 또는 총 농림생산액의 24.4%에 해당하는 규모다.

순천 유경마을 소농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텃밭
▲ 소농의 텃밭 순천 유경마을 소농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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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나라를 지키는 '독일의 사회적 소농'처럼

'직불금, 가족농, 협동조합, 농업학교, 그리고 농업회의소'. 독일 등 EU의 '사람 사는 농촌' 중심 선진농정을 지탱하는 핵심장치가 바로 이 5가지 정책일 것이다. EU의 농부들은 농가소득의 50% 이상을 국가로부터 '직불금'으로 지급받는다. 그래서 부부와 후계농 자식 등 2대 가족농만으로도 얼마든지 자급하고 자립하고 자족하는 기초생활과 농가경영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독일의 '가족농'들은 개별적으로 수익성이나 상업성만 좇으며 경쟁하지 않는다. 혼자 이기적이고 배타적으로 고립되지 않는다. 농업학교를 졸업한 정예의 농민들은 생산자조합(gemeinschaft), 농업협동조합(genossenschaf)을 이루어 공동으로, 유기적으로 협동하고 연대한다. 또 90%의 소농들이 모인 농촌지역사회는 농업회의소를 통해 지역농정을 사실상 자조․자치하며 WTO, 곡물메이저 등이 지배하는 세계농업질서에도 당당하고 지혜롭게 맞선다.

이러한 독일 등 EU 선진농정의 뼈대와 바탕은 EU의 농업개혁(Agenda 2000)에 따른 것이다. 1999년 EU 이사회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7년간 시행할 농업개혁안(Agenda 2000)에 합의한다. EU 공동농업정책을 기존의 농업 중심 정책에서 농촌개발, 환경보전 등도 고려한 통합정책으로 전환, 농업생산의 1축 외에 농촌개발의 제2축(second pillar)을 새로 도입한 것이다. 이때 지지가격 수준의 인하와 직접지불에 의한 부분적 보상, 환경정책의 EU 공동농업정책 통합, 농업의 다원적 기능 접근방식에 의한 농촌개발 등을 주요 원칙으로 삼았다.

독일의 농업은 '돈 버는 농업'이 아니다. 독일의 농부들도 '뼈골 빠지게'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정부도, 농부도 농업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정부는 대농이나 기업농만 챙기지 않고 가족농과 소농도 다 포용하는 정책을 편다. 특히 자립형 소농을 육성하는 농업교육을 유난히 강조한다. 녹색직업(Gruenen Berufe)으로서 농부는 단순한 직업이 아닌 미래가 보장된 평생 직장이라는 철학을 품고 있다. 수만 명의 독일 청소년과 청년들이 11살 중학교 과정부터 농부가 되려고 농업학교(직업학교; Hauftschule)에 기꺼이 진학하고 농사장인(Meister)을 꿈꾸는 이유다.

전체 인구 대비 2%를 점유하는 독일 농부 가운데 94%에 달하는 30만여 농가가 가족농이다. 가족농 가운데 소농은 55% 정도다. 이처럼 독일 농업의 주력인 가족농 시스템을 유지하는 장치와 비결은 바로 농지 상속 원칙이다. 독일 농가에서는 자녀 가운데 장남이 농지를 단독으로 상속받는다. 자녀들끼리 농지를 분할하지 않는다. 대를 이어 가족농으로 자생할 수 있도록 적정한 농업경영규모를 유지시키려는 목적이다. 장남이 승계를 원하지 않으면 차남, 딸 순으로 농지 상속권한이 오직 한 자녀에게 단독으로 승계된다.

독일처럼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한국의 소농이 농촌에서 살아남으려면 독일처럼 협동하고 연대하는 '사회적 농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여기서 사회적 농민이란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지 않고, 남과 공동체를 더불어 생각하는 농민"을 말한다. 마을과 지역의 안과 밖에서 서로 협동하고 연대할 자세와 각오가 서 있는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농민을 의미한다. 혼자 하는 것보다 남과 더불어 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이롭다는 진실을 자각한 농민을 뜻한다. 이런 '사회적 농민 10만 농군'만 우리 농촌을 지키고 살 수 있다면 농촌은 물론, 도시도, 국가도 '사람이 살만한 세상'으로 정상화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 정기석 : 농촌과 도시가 서로를 살리는 '농부의 나라'를 그리고 지으며 남녘 산골의 마을연구소(Commune Lab)에서 먹고 사는 사회적 詩人이자 귀농 15년차 마을주의자



태그:#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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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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