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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 관련 사진.
 영화 <박열> 관련 사진.
ⓒ 메가박스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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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친구와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했다. 그 영화는 바로 <박열>. 일제강점기 당시에 일본 본토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박열 선생(아래 박열)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박열은 참 파란만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에는 어떨까? 해방 이후에도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다음은 영화에서 다루지 못한 박열의 뒷이야기이다.

사회주의자 박열, '반공주의' 노선을 택하다

영화에서 박열은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나온다. 그래서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여 더욱 격렬한 활동을 펼치고는 했다. 그는 다이쇼 일왕, 왕세자 암살을 공모한다. 이 과정에서 발각된 박열은 부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수감된다.

암살 공모로 인해 박열은 '대역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나 부인 후미코는 결국 옥사한다. 여기까지가 영화 <박열>의 내용이다.

해방 이후에 박열은 일본 형무소에서 풀려난다. 약 22년 2개월을 복역한 끝의 일이다. 감옥에서 나온 그의 나이 43세. 아직은 젊은 나이였다. 재미있는 점은 그 다음부터다.

1946년 10월 3일, 출소한 박열은 재일본조선거류민단(현재의 민단)의 단장을 맡는다.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은 우익 성향의 교포단체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자였던 그가, 우익 단체의 수장을 맡은 것이다. 오랜 수감생활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1948년, 경교장에서 사진을 찍은 양근환, 김구, 박열.
 1948년, 경교장에서 사진을 찍은 양근환, 김구, 박열.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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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박열의 본격적인 반공주의 행보가 시작된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백범 김구를 필두로 대대적인 반탁운동이 펼쳐진다. 박열 역시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위원이 됐을 정도로 말이다. 당시에 반탁운동이 '제2의 독립운동'으로 인식됐던 때다. 그것을 고려한다면, 박열은 그러한 '제2의 독립운동'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반공주의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나 싶다.

이 무렵에 박열은 역사에 남을 일을 해낸다.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삼의사 유해 송환을 도운 것이다. 삼의사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의 의사(義士)를 일컫는다. 그리하여 박열은 순국한 삼의사의 유해송환을 무사히 마친다. 박열의 노력으로 묘역이 조성됐다. 그것이 바로 현재 효창공원에 위치한 '삼의사묘'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총을 쏘거나 폭탄을 던지는 것처럼 '폼나는 일'로 여겨지지 않아서일까? 애석한 일이다.

반공주의자 박열, 전쟁 중에 납북 당하다

민단간부들과 사진을 찍은 박열. 가운데가 박열이다.
 민단간부들과 사진을 찍은 박열. 가운데가 박열이다.
ⓒ 박열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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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이후에도 활발한 반공활동을 펼친다. 1947년에는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글까지 신문에 실었을 정도다. 우익진영의 거물인 이승만과 두 차례 회담을 갖기도 했다. '과거의 사회주의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우익적인 색채를 표출한 셈이다.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하지만 박열의 이러한 독선적인 행보는 독이 됐다. 민단 내에서 불만이 터진 것이다. 결국 박열은 단장직에서 사임했다. 사임 이후에는 '박열장학회'와 '박열문화연구소'를 설립하며 인재양성 활동을 펼친다.

1949년, 박열은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에는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여 활동한다. 민단의 단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정치적인 활동을 그만둔 것이다. 아마도 지쳤으리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옛 혁명가는 유유자적한 삶을 원했다. 그러나 세상은 옛 혁명가를 가만두지 않았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3일 만에 서울은 함락됐다. 당시 박열은 서울에 남아 있었다. 일설에는 "국민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며 잔류했다고 한다. 결국 박열은 인민군에 의해서 납북당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묘연하다.

박열의 행적이 밝혀진 것은 사망했을 때다. 1974년 1월, 북한은 박열의 죽음을 통보했다. 옛 혁명가의 파란만장한 삶은, 결국 그렇게 끝났다.

파란만장했던 박열의 삶, 해방 이후도 기억하자

1974년, 박열의 추도식. 이후 박열은 건국훈장에 추서되기까지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74년, 박열의 추도식. 이후 박열은 건국훈장에 추서되기까지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박열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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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은 사망 후에 푸대접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수여되는 건국훈장에서 제외된 것이다. 어쩌면 사망 당시 박열이 북한 내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기에 그런 것 같다.

그렇다고 박열이 북한 내에서 크게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일본 출신, 그것도 '전향한 반공주의자'를 북한에서 얼마나 대우해줬을까? 그렇게 옛 혁명가는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을 받는가 싶었다.

그럼에도 박열에 대한 발굴은 늦게나마 이루어졌다. 마침내 1989년, 박열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하면 늦었지만, 그래도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후 교과서에도 박열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를 주제로 삼은 영화도 개봉했다. 하지만 애석한 점도 많다. 박열에 대해서 단순히 사회주의자로만 알려지는 점이다. 효창공원 삼의사묘의 유해송환을 시킨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는 단순한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반공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애국'을 위해서 그 수단으로 이념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만큼 박열은 단순하지 않은, 정말로 입체적인 인물이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애국자다.

혹시라도 박열을 '사회주의 빨갱이'라고 모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해방 이후의 행적을 알려주길 바란다. 끝으로 출옥 후에 박열이 남긴 말을 알리고자 한다. 1946년, <신조선혁명론>을 집필하여 남긴 말이다. 박열 선생, 이런 애국자의 삶을 기억하는 것도 후손인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나는 사고하고 행동한다. 온몸을 바쳐 온 독립운동의 일꾼으로서 한 병졸로서 일한다.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보다 정의로운 것을 지표로 한다."


태그:#고충열, #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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