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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1 '평화주의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순, 그는 침략을 미화했나
③-2 일본 현지에서도 엇갈린 반응, <바람이 분다>에 침략 반성은 없었다

 불이 붙어 추락하는 제로센.

불이 붙어 추락하는 제로센. ⓒ 롯데엔터테인먼트


사랑이 아닌 제로센을 선택한 지로

"여보, 살아요. 살아요!" - 영화 <바람이 분다> 사토미 나호코(里見菜穂子)의 대사 중에서

영화 말미 지로의 꿈속. 제로센이 불타며 우수수 추락한다. 카프로니는 지로에게 말한다. "비행기는 아름답지만 저주받은 꿈이다. 넓은 하늘을 모두 삼켜버려"라고. 전쟁에 동원돼 수많은 인명을 학살한 제로센이 단 한 대도 돌아오지 못했고 지로의 꿈은 '베드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움츠려있던 지로에게 나호코는 "살아요"라고 외친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나호코의 이 마지막 대사는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과연 나호코의 목소리는 지로에게 닿았을까? 아마 자신이 죽고 홀로 남게 된 연인에 대한 애잔함이 담겨 있었으리라. 그러나 정황상 지로에게 전범기 제로센을 만들어 전쟁에 동참했던 경험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의미가 훨씬 두드러져 보인다. 내막을 알기 위해 먼저 이 연인들의 사연을 따라가 보자.

청년 지로는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기차가 탈선했을 때 허둥지둥하던 나호코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한 별장에서 지로와 나호코는 우연히 다시 마주친다. 나호코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로에게 다가가 사랑을 고백하면서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사랑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당시 '죽음의 병'이라고 일컬어지던 결핵을 앓고 있던 나호코에게 허락된 시간이 거의 없었던 것.

 결핵 환자를 수용하는 산골 요양시설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나호코.

결핵 환자를 수용하는 산골 요양시설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나호코. ⓒ 롯데엔터테인먼트


결혼 전 병세가 악화한 나호코가 몸져누워있을 때. 나호코의 아버지는 나호코의 곁을 떠나기 힘들어하는 지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에게는 일이 있다. 남자는 일을 해야 하는 존재다"라고. 그 얘기를 들은 지로는 수긍한다. 여기서 '일'이란 제로센의 설계 작업을 뜻한다. 결국, 나호코의 아버지는 아픈 딸을 제쳐두고 전쟁에 도움을 주는 설계 작업에 매진하라고 지로의 등을 떠민 셈이다.

제로센 설계와 나호코와의 사랑이라는 '미션'을 병행하기에 지로는 힘이 부쳤다. 나호코의 병세가 위중하단 걸 알면서도 사랑을 약속한 지로. 그만큼 간절했기에 죽어가는 나호코와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지만, 행복은 아주 잠시였다. 나호코는 지로에게 아무 말 없이 요양병원이 있는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죽음을 맞는다. 지로는 제로센을 만드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나호코가 스스로 떠났다는 걸 깨닫고 왈칵 눈물을 쏟는다. 나호코가 사라지면서 마침내 완성된 제로센은 전투기로써 하늘을 누비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지로와 나호코의 사연은 언뜻 흔히 볼 수 있는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제로센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없었던 지로가 마침내 나호코를 떠나는 과정을 비춰보면 단순한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 죽어가는 부인을 내버려 두면서까지 제로센에 심취했던 지로의 태도를 보자. 한계에 다다른 사랑보다는 전쟁에 돌입한 국가(일제)의 안위에 힘을 쏟겠다는 오싹함이 읽히지 않으시는지. 이렇듯 영화는 분명 '침략 미화' 논란이 불거질만한 장면을 곳곳에 담고 있다.

그동안 애니메이션을 통해 꾸준히 '전쟁은 안 된다'는 울림을 전해왔던 거장 하야오는 어디로 가버렸나. 그가 한국 팬들의 뒤통수를 친 걸까? 아니 우리가 하야오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부터는 하야오의 발언을 살피면서 그가 평소 침략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또 어떤 한계를 지닌 인물인지 알아보자.

'아베 비판' 진보주의자 하야오의 모순

 왼쯕은 비행에 나선 제로센을 바라보며 점검하는 지로. 오른쪽은 지로의 선배와 일본 해군.

왼쯕은 비행에 나선 제로센을 바라보며 점검하는 지로. 오른쪽은 지로의 선배와 일본 해군. ⓒ 롯데엔터테인먼트


하야오는 전쟁 금지 조항이 담긴 일본 헌법 제9조를 개헌해 '군사대국 일본'을 꿈꾸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정면으로 겨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정반대의 생각이다. 군사력으로 중국의 팽창을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며 좀 더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위해 일본은 평화헌법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전쟁책임에 대한 자기 뜻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모호해졌다. 해서는 안 될 일은 해서 안 된다고 확실히 인식해야만 한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침략전쟁을 하는 것은 어떠한 이유를 대도 어떻게 미화해서도 절대로 안 된다. 침략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원칙은 반드시 지킬 필요가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도쿄 외국 특파원협회 소속 기자들을 도쿄 소재 '스튜디오 지브리'에 초청해 이뤄진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 위의 두 발언은 하야오가 오키나와 현의 후텐마 미군비행장을 같은 현 내 헤노코 미군기지로 옮기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밝히는 가운데 나왔다. (2015년 7월 13일)

이처럼 하야오는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대해 비판했다. 현재 일본에서 '일제의 침략은 잘못됐으니 반성하자'라는 주장은 진보주의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과연 하야오를 우리의 기준대로 진보주의자라고 못 박을 수 있을까? 한국과는 상황이 크게 다른 일본의 인물에게 '한국식 잣대'를 그대로 들이댈 수 있냐는 물음이다.

침략에 대한 일본의 정서는 한국인들의 사고방식과는 다르다. 이를테면 우리가 광복절이라고 부르는 8월 15일을 일본에서는 종전기념일이라고 한다. 즉 '전쟁이 끝났다'는 뜻을 강조하는 건데 여기에는 전쟁의 가해자가 아닌,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전투기의 공습을 받았다는 피해자 의식이 짙게 깔려있단 평가다. 전후 패전국 일본을 점령한 GHQ(General Head Quarters: 연합국 최고사령부, 1945년 10월 2일부터 1952년 4월 28일까지 패전국 일본을 점령했던 연합국의 관리기구)는 'A급 전범'을 비롯한 전쟁에 동참한 고위 인사들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공직 추방령을 단행했다. 그러나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전범국의 지위를 벗고 국제무대에 복귀하자 전범세력들은 다시 활짝 기지개를 켰다.

현재 장기집권을 이어가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그가 소속된 집권 자민당의 상당수 정치인은 당시 공직에서 추방됐다가 화려하게 재기한 전범세력들의 후손이다. 자민당은 1955년 정권을 잡은 이래 일본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2009년부터 2012년까지를 제외하고 중앙권력에서 밀려난 적이 없다. 자민당이 일본의 교육을 좌우해온 상황에서 침략을 반성하는 목소리는 크게 성장하지 못했던 것. 지난해 12월 중순 일본 제2의 도시 요코하마(?浜)시의 교육위원회(한국의 교육청)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학살한 사실을 누락한 역사교과서 부교재 개정판을 발행하려 해 거센 비판을 받은 사례도 있다.

일본에서는 '대일본제국 시기(우리에게는 일제강점기)'를 가리켜 '오래되고 좋은 시절'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전 작들과 분위기가 다른 <바람이 분다>를 보면 하야오 또한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편에서 언급했듯 하야오는 전쟁 당시 제로센의 부품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한 집안에서 태어나 '비행기광'으로 자라났다. 비록 그가 젊은 시절 첫 직장인 토호 영화사에 취직해 활발하게 노동조합 활동을 펼치고 반전(反戰)과 평화를 외치며 꾸준히 "침략은 잘못됐다"고 목소리 높여왔지만, 그 한계가 명백하단 얘기다.

하야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아쉽다

 피를 토하는 나호코의 뒤로 일장기가 날개에 그려진 추락한 제로센의 잔해가 겹쳐진 장면.

피를 토하는 나호코의 뒤로 일장기가 날개에 그려진 추락한 제로센의 잔해가 겹쳐진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런 한계는 일본 문화계에서 곧잘 목격된다. 코미디언이자 <기쿠지로의 여름> 등의 영화를 낸 거장 감독 키타노 타케시(北野武)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키타노는 "가난할지라도 헌법을 지키는 평화로운 일본을 모두가 힘내서 지향해야만 한다"는 입장을 밝히며 일본의 군사 대국화를 경계했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겨냥해서는 "20만 명 이상 (피해를 입었다니) 자릿수가 다르다. (한국에서의 위안부 문제는) 16인을 조사하면서 시작된 것이 20만 명이 됐다"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계는 명백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야오는 일본에서 가장 거침없는 강경 진보주의자다. 하야오의 뒤를 잇는 것으로 주목받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알려진 호소다 마모루(細田守) 감독, <너의 이름은>으로 유명세를 탄 신카이 마코토(新海誠) 감독 등의 후배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작품에서 주로 '연인 간 문제'를 집중한 것과 달리, 하야오는 전쟁이 파괴한 세상을 조명해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하야오는 이전 작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에서 역경을 뚫고 나가는 당찬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웠다. 아울러 어리석은 전쟁과 파괴는 그만두고 더불어 평화롭게 살자는 선명한 메시지를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이전 작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세상을 훨씬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선택을 했다. 반면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들은 그저 정해진 상황에 맞춰 열심히 살아가고자 힘썼다. 묵묵히 제로센의 설계에 임하는 지로의 모습, 죽어가면서까지 지로의 꿈을 맹목적으로 응원하는 수동적인 여성 나호코의 존재가 그를 증명한다. 전쟁으로 치닫는 군국주의 일제에서 저항 없이 현실에 순응하는 태도를 여실히 나타낸 것. 그런 만큼 한국에서 <바람이 분다>의 제목을 빗대 '우경화의 바람이 분다'라는 싸늘한 반응이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

하야오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2013년 7월에 낸 무료 소책자 <열풍>을 통해서 "위안부 문제도 각 민족의 긍지 (와 관련된) 문제니까 제대로 사죄하고 잘 배상해야만 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렇기에 <바람이 분다>를 만든 하야오는 참 아쉽다. 침략을 성찰하면서도 전쟁 시기의 '제로센을 만든 남자'를 그려낸 모순에 빠졌으니 말이다. 제로센을 만드는 과정을 어떻게 꿈을 좇는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침략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불가능한 하야오의, 일본 지성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주권방송>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미아쟈키하야오 제로센 나호코 일본애니메이션 바람이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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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정세, 일본의 동향에 큰 관심을 두며 주시하고 있습니다. 적폐를 깨부수는 민중중심의 가치가 이땅의 통일, 살맛나는 세상을 가능케 하리라 굳게 믿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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