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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인사검증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개혁이나 국정을 훼방할 의도로 이것이 악용되는 경우도 있다. 장관 후보의 인격이나 직무능력에 대한 정상적인 검증을 벗어나, 지나치게 지엽적이거나 전혀 엉뚱한 영역을 건드리는 인사검증은 그런 의도를 깔고 있는 것이기 쉽다.

그런 인사검증에 분노를 터뜨린 이가 있었다. 조조·유비·손권의 조조가 바로 그 사람이다. 소설 <삼국지연의> 속의 조조가 아니라, 실제 역사서 <삼국지> 속의 조조가 그처럼 가혹하고 불순한 인사검증에 격분을 토로했다.

중국 역사가 후한(한나라의 후신, 25~220년)시대에서 삼국시대(220~265년)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조조는 후한 황제를 자기편으로 만들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 조조가 원소와의 관도전투에서 승리해 북중국 실력자로 급부상했지만, 아직 북중국을 통일하지는 못했을 때였다.

당시의 중국 달력으로 건안 10년 9월, 양력으론 205년 10월 1일에서 30일 사이였다. 조조가 담화문을 발표했다. 가혹하고 불순한 인사검증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이 조조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지> 무제본기에 기록돼 있다. 조조는 살아생전에 황제가 된 적이 없지만, 아들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된 뒤 무황제 즉 무제로 추증되었다. 그래서 그의 역사가 <삼국지> 무제본기에 실린 것이다. 

서로 비방하며 인사검증 남용하는 실태 비판한 조조

중국 하북성(허베이성)의 갈석산에서 찍은 조조 상상화.
 중국 하북성(허베이성)의 갈석산에서 찍은 조조 상상화.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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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문에서 조조는 "불법적으로 당파를 결성해 서로 결탁하는 것은 고대의 성인들이 몹시 싫어했던 일"이라며 부자간에도 당파를 달리하고 서로 비방하며 인사검증을 남용하는 자기 시대의 실태를 비판했다. 그런 뒤에 그는 과거에 있었던 과도한 인사검증 사례를 지적하며, 유사한 일들이 자기 시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탄식했다.

조조가 언급한 과거 사례 중 하나는 직불의(直不疑)였다. 직불의는 한나라 문제 황제 때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직불의 열전에 나오는 인물이다.

직불의가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임용됐을 때다. 한나라 때의 태중대부는 고위직은 아니었다. 중간 간부 정도였다. 하지만 직불의가 황제의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태중대부 취임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이로 인해 인사검증의 칼날이 그의 코끝에 바짝 다가갔다.  

태중대부에 임명된 직불의는 황제 앞에 나아갔다. 감사를 표시하고 황제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바로 이 자리에서, 인사검증 결과를 제시하며 직불의를 공격하는 비판자가 있었다. <사기> 직불의 열전에 따르면, 비판자는 직불의와 황제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직불의는 용모는 매우 뛰어납니다. 하지만, 형수와 은밀히 정을 통하고 있습니다. 저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황제는 순간 당황했을 것이다. 애써 발탁한 인재가 패륜아라니, 앞이 캄캄해졌을 수도 있다. 비서들이 일을 어떻게 한 건가 하는 원망이 머리를 스쳤을 수도 있다. 조조가 담화문에서 언급한 사안이 바로 이것이다. 

직불의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남이 자기를 욕해도, 잘못이 없으면 굳이 해명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같은 방에 사는 동료 관료가 휴가를 받아 귀가했다. 그 동료가 짐을 챙기다 '또 다른 동료 관료'의 황금을 실수로 자기 보따리에 넣었다. 자기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또 다른 동료 관료'는 황금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다짜고짜 직불의부터 의심했다. 그러자 직불의는 해명도 않고 사죄를 했다. 그러고는 황금을 사서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휴가를 마친 동료가 돌아오면서 모든 오해가 풀렸다. 직불의는 당연히 사과를 받았다. 이때부터 직불의는 훌륭한 인격의 보유자로 유명해졌다고 직불의 열전은 말한다. 

북경(베이징) 시내의 한 서점에서 찍은 현대판 <사기史記>.
 북경(베이징) 시내의 한 서점에서 찍은 현대판 <사기史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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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직불의는 남의 공격을 받아도 적극 해명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이 오늘날의 인사청문회에 나온다면, 억울한 비난을 들어도 제대로 해명도 않고 계속 고개만 숙여댈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직불의도, 자신이 형수와 사통한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그것도 황제 앞에서 그런 말을 들었으니, 더욱 더 그랬을 것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직불의는 혼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사기> 직불의 열전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형이 없는데? 무슨 말이지?"

비판자는 직불의한테 형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황제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한 점을 보면, 남한테 전해들은 이야기를 사실로 확신했을 수도 있다. 직불의를 낙마시키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인사검증을 부실하게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직불의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으로서보다는 허무맹랑한 인사검증을 받은 사람으로 더 유명해졌다. 그래서 수백 년 뒤의 조조가 직불의를 거론하며 인사검증 실태를 비판했던 것이다.

'관료된 뒤 장인을 구타한 제오륜'?

직불의 사례에 이어 조조가 거론한 또 다른 사례는 제오륜(第五倫)이다. 조조의 담화문에는 제오륜이란 이름이 아니라, 관례(성인식) 때 받는 이름인 자(字)를 사용한 제오백어(第五伯魚)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제오륜은 후한 때인 서기 1세기에 활약했다.

제오륜은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고 기득권층인 왕실사돈(외척)의 전횡을 비판했다. 그래서 미움을 살만 했다. 후한 초대 황제인 광무제는 그런 이유로 그를 좋아했다. 후한 역사서인 <후한서>의 제오륜 열전에 따르면, 광무제는 그를 처음 본 뒤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제오륜의 중용을 막으려고 광무제의 귀에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흘려 넣는 신하들이 있었다. 그들의 비난 중 하나는 '제오륜은 관료가 된 뒤에도 장인어른을 구타하는 놈'이라는 것이었다. 제오륜은 패륜아라는 것이었다.

반대자들이 이런 소문을 퍼뜨린 것은 제오륜과 광무제의 접촉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광무제는 소문에 현혹되지 않고, 일단 만나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제오륜 열전에 따르면 광무제는 "내가 듣기로 자네는 관리가 된 뒤에 장인을 구타한 적이 있다던데"라고 입을 뗐다. 그러자 제오륜은 이렇게 답했다.

"신은 세 번 결혼했습니다. 세 번 다 아버지 없는 여성과 결혼했지요."

제오륜의 중용을 막을 목적으로 급하게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반대파들이 기본적인 인적 사항조차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조는 제오륜 같은 사례가 자기 시대에도 생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불의에 이어 제오륜의 사례를 거론했던 것이다.

조조는, 가혹하고 불순한 인사검증은 해당 후보한테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 임금과 하늘에도 죄를 짓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것은 흰 것을 검다 하고,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라고 그는 담화문에서 비판했다.

가혹하고 불순한 인사검증은, 적절한 인재와 함께 개혁이나 국정을 수행해야 할 군주의 발목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조조가 그런 행위를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비판한 것이다. 조조는 "이런 폐단이 없어지지 않는 것이 치욕스럽다"고 말했다. 제발 그런 짓들 좀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게 조조의 바람이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것 때문에 담화문까지 냈을까.


태그:#인사청문회, #인사검증, #직불의, #제어륜,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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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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