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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주로 시골에서, 사람 사는 집들이 한 데 모여 있는 곳'이다. 사전의 정의 그대로 하자면 시골이 아닌 곳은 마을이라 부르기 어색하다. 이치에 맞지 않다. 굳이 '시골에서'라고 수식한 이유가 있을텐데, 무엇보다 마을이라고 하면, 생활과 생업 그리고 쉼과 놀이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라야 적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먹고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도시에서는 도무지 그게 어렵다. 부득불 생활과 생업이 격리되거나 격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토록 도시에서 마을을 만들려고 애쓰는 여러가지 운동이나 사업은 마을에 대한 절박한 그리움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비록 농촌이라고 마을의 모습이 온전히 남아있지 않다. 그동안 도시화, 산업화의 부작용과 후유증으로 심각하게 훼손되고 상처 받았다. 젋은이의 온기, 공동체의 활력이 사라져 과소화, 형해화, 공동화된 마을같지 않은 마을이 한두곳이 아니다. 10년 후의 우리 농촌을 생각해보라. 누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 농촌이 이렇게 된 발단은 18세기 영국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세계사적으로 18세기 중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이래, 자본주의화 이래 농촌은, 마을공동체는 동력과 희망이 무너지고 사라졌다. 공유지(commons)에 기대 생계를 이어가던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 상품화해서 사적 소유(Enclosure, 운동)를 일상화한 게 치명적이었다.

이때 토지를 상실했거나 토지에서 추방된 농민들은 반란으로 저항했으나 어김없이 토벌, 진압되었다. 힘이 없어 용기와 겁이 많았던 농민들은 농업 이외의 노동을 거부하는 '유랑'이나 '걸인'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축구와 자본주의의 종주국 영국의 지배층은 1834년 야비한 묘안을 생각해냈다. 역사적으로 악명높은 개악 구빈법이다. 최저생계비 이하 노동자들에 대한 생활수당을 보장하던 스피넘랜드(Speenhamland) 법을 무원조 원칙의 신 구빈법으로 개악한 것이다.

이때 농촌에서 쫓겨나 도시에서 유랑걸식하던 빈민들은 낙인이 찍힌 채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반인권적으로 소나 말 같은 동물처럼, 노예처럼, 기계적 노동에 적응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농민 출신 도시빈민들은 굶어 죽지 않으려면 그토록 부당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농촌지역에 사람이, 마을이, 공동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명상동호인들이 공동귀농해 ‘마을 살이’를 함께 하는 <보은 기대리 선애빌생태공동체마을>
▲ 보은 선애빌 도시의 명상동호인들이 공동귀농해 ‘마을 살이’를 함께 하는 <보은 기대리 선애빌생태공동체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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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 최고의 전문가는 '마을주민' 

마을공동체의 몰락에 위기감을 느낀 국가나 정부는 공권력과 국비까지 동원해 마을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다. 마을을 재생하고 활성화시키려는 정책목적이다. 이른바 '마을 만들기'를 위한 운동과 사업을 독려하고 촉진하고 있다. 하지만 마을만들기 3대 책임주체인 행정도, 주민도, 전문가도 마을만들기를 힘겨워한다. 행정은 진정성과 공정성이 미흡하고 주민은 이해도와 참여도가 부족하다. 그 일을 직업으로 하는 전문가 조차 전문성과 사명감이 충분치 않아 역부족이다. 하면 할수록, 마치 잘 하고 싶어도 잘 할 수 없는 고역이나 고행처럼 느껴질 정도다.

무엇보다 '한국형 마을 만들기'는 태생적 한계와 시행착오의 실패 마저 떠안고 있다. 출발부터 '마을 만들기'를 '농촌관광지화' 또는 '생태공원화'와 동일시하는 어리석은 판단착오와 오류가 잠복되어 있었다. 그 결과, 외부인의 구경거리나 체험거리에 불과한 관광지, 공원 등의 전시행정과 유휴시설이 전국 도처에 양산되고 말았다.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다 하드웨어 조성 위주의 토건사업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말았다. 마을을 외부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내부인을 위한 삶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무시한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 

그런데 이쯤에서 총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오래된 관행과 관성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과연 마을은 옳은 것인지, 마을이 곧 공동체인지" 등 원초적인 의문에 스스로 대답해야 한다. 마을만들기는, 마을공동체는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지만, 그 선의 자체가 사실은 위선이나 과장, 자기변명이나 과시용 포장은 아니었는지 뒤를 돌아봐야 한다. 마을이나 마을공동체는 과연 모두를 위한 절대선인지, 유일한 대안인지, 다시 한번 철저히 학습하고 훈련하고 실천해야 한다. 

결국 실질적인 방법으로 기왕의 '토건적 마을 만들기'를 '사회생태적 마을 살리기 또는 마을살이'로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마을이 품고 있는 사회적이고, 인문적이고, 문화적인 요소와 자원들을 더욱 주목해야 한다. 원주민, 귀농인, 출향인 등 내부인의 인간다운 생활과 생존을 보장하는 삶의 질 높이기를 당면한 지상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자면 학습과 교육이 먼저다. 그래서 '마을교육공동체'부터 건설해야 한다. 마을에 학교가 살아남아야, 마을이 곧 학교가 되어야 마을이 살아남을 수 있다. 마을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어른들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 마을의 작은 학교를 살리고 학교협동조합도 만들고 사회적 경제 교과서도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과 품성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한국생태공동체마을 네트워크회의 출범에 앞장 선 생태공동체운동가 황대권선생.
▲ 황대권 선생 한국생태공동체마을 네트워크회의 출범에 앞장 선 생태공동체운동가 황대권선생.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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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만들기'가 아닌 '마을 살리기 또는 마을살이'를 하는 데 마을 공동체사업에 임하는 태도와 마음가짐과 방법론은 사회적경제를 수단과 도구로 하면 적합할 것이다. 농촌상생기금, 마을공동체·사회적경제 융합지원센터, 공공 조달시장 등으로 '생활 중심 마을공동체사업'으로 인식과 틀이 전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농촌마을의 주인은 마땅히 농민이다.

농민이 농정의 주인이자 결정권자가 되어야 한다. 농민을 농정의, 또는 '농정협치'의 주인으로 세우기 위해 '민간 주도형 농업회의소'가 설치되어야 한다. 이때 행정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잊지 말아야 한다. 관이나 공공은 지원을 핑계로 민간의 자율성과 자존감을 통제하거나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국가기간산업인 농업이 그렇듯 농촌 일도 사사롭게, 아무나 장사꾼처럼 뛰어들면 안 된다. 농촌마을 공동체의 미래와 희망을 기획하고 설계하고 개발하는 일의 속성 자체가 근본적으로 농업과 농촌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과 이해를 갖추어야 수행할 수 있는 고난이도의 업무다. 생태, 환경, 조경, 관광, 건축, 도시계획, 농학, 임학, 식품공학, 농경제학, 농업경영학 등은 문론, 인문학과 사회학의 지식과 역량이 조화롭고 깊이 있게 통섭되어야 한다. 물론 학교 안에서의 전공, 학점과 학위보다 학교 밖에서 현장 경력이 더 필요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마을공동체사업에 관한한 최고의 전문가, 책임자는 공무원도, 교수도, 연구원도, 컨설턴트도 아닌 바로 그 마을주민이라야 할 것이다.   

“생태마을이 희망이다”. 지난 6월 17일, 한국생태공동체마을 네트워크회의 가 출범했다.
▲ 한국생태공동체마을 네트워크회의 “생태마을이 희망이다”. 지난 6월 17일, 한국생태공동체마을 네트워크회의 가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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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기술적인 농사 공동체'가 아닌 '인문사회적인 생활 공동체'를

근본적으로 '만드는 마을'이 아니라 '살아가는 마을'이려면  '농촌사회'를 바라보는 시각과 패러다임부터 전환되어야 한다. 일단 어떻게든 혼자 살아보려는 '독립마을'에서 더불어 살아가려는 '연대마을'로 진화해야 한다. 어차피 농부가 혼자서 '좋은 농사'를 짓기는 어렵다. 농사를 지어서 먹고살기도 어렵다. '자연인처럼' 내 멋대로 살면 자유롭기는 할 것이나 자칫 지역사회에서 잊혀지거나 사라질 위험이 있다. 농촌사회에서 '사회적 농부'가 되려면 마을주민, 지역사회는 물론, 도시민, 소비자들과 지속적․유기적으로 교류하고 거래해야 한다. '농업회의소 중심 자생적 지역학습조직', '농민․노동자, 농민․도시민 상생기금', '도시민(도시농업인) 직거래 네트워크' 등을 이웃과 더불어 공조, 협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개인에서 '사회인'으로 진보해야 한다. 농촌에서도 개인주의자니 이기주의자는 불편한 존재로 환영받지 못한다. 공동체의 갈등과 분쟁의 원인으로 낙인 찍힌다. 마을공동체의 이웃, 지역사회의 타인을 이타적으로 배려하는 공익적․공공적 시민의식과 선도적 실천역량부터 갖추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 사회적협동조합 등 지역공동체 운동', '로컬푸드 유통, 토종종자 보전 등 풀뿌리 순환자치경제네트워크 구축', 평화통일농업, 생태농부학교 등 우주적 각성과 수행운동 등에 자발적, 선도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가령 충북 단양 소백산 자락의 한드미마을을 그런 '사회인들이 모인 연대마을'의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그저 단순한 농촌마을이거나 체험휴양마을이 아니라 생활공동체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마을지도자인 정문찬 대표가 국내 최초 농촌유학센터로 모교인 대곡초등학교를 살려낸 이후, 십수명의 청년, 귀농인들이 산골마으로 들어왔다. 농촌마을체험 사업을 비롯해 농촌유학센터, 지역아동센터, 마을공동식당 등을 운영하는 '한드미유통영농조합법인'에서 최소 2천만원 이상의 연봉을 일과 삶이 하나되는 공동체마을을 함께 일구고 있다.

홍성군 홍동면의 마을공동체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와 '문당리 마을발전100년계획'으로 대변된다. 1958년 개교한 국내 대안학교의 효시, 풀무학교는 마을공동체 정신을 창조하고 마을공동체사업의 일꾼을 생산하고 있다. 현재 홍동면에는 농업 및 가공, 농촌관광, 교육, 문화, 공동체, 에너지 등 50여개의 마을․지역공동체사업 관련 단체가 활동중이다. 문당리, 운월리를 중심으로 귀농인을 포함한 마을주민들이 주도하는 이런 다양한 민간조직이 홍동면 지역공동체 활성화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들이 자생적인 생활문화공동체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생태계)의 모습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순수 민간주도형 중간지원조직 '지역센터 마을활력소'는 최소한 홍동면 안에서 벌어지는 마을공동체사업은 홍동면 주민의 머리와 손으로 자주적으로 해결해보려는 각오와 의지를 실천이다.

지금 관제 마을공동체사업을 주도하는 농식품부나 행자부는 "그동안 지자체․민간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되는 마을만들기에 대해 일관된 원칙 및 방법 등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며 관련법을 발의해놓은 상태다. 지역개발사업의 효과성․형평성 증대를 위해서도 법제화는 필요하다는 논리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 '마을 만들기' 또는 '농촌마을공동체' 사업환경과 현실에서는 설사 법이 새로 만들어진다고 해묵은 고질적 난제들이 해결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법 이전에, 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의 문제, 조직의 문제, 그리고 목적의식과 가치관의 문제가 더 본질적인 병인이다.

법을 만들기 전에 "마을 만들기를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하려 하는지"에 대한 답을 먼저 구해야 한다. '마을 만들기'나 '농촌공동체'의 법과 제도를 거론하기 전에, 개념과 패러다임부터 재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마을주민이 아닌 행정이나 외부 용역업자가 주인이자 독과점 수혜자 처럼 행세하는 시행착오를 되풀이한 기왕의 '토건적 마을 만들기'부터 그만 두어야 한다. 이제 내부인(원주민, 귀농인, 출향인 등)의 생활과 생존을 보장하는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회생태적 마을 살리기'로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전환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마을기업 중심의 마을살리기', '살림마을 목적 마을살리기', '중간지원조직 기반 마을살리기'가 합리적이고 실천적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책임지고 일할 사이나 조직이 없는 농촌마을에서는 공동체사업조직이 가장 중요하다. 사업의 책임주체로서 '지속가능한 마을기업'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이때 마을기업을 세우고 꾸릴 '훈련된 마을시민'이 함께 준비되어야 하며, 거기에 마을기업의 창업과 경영을 지원하고 마을시민들을 발굴하고 교육할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중간지원조직'도 지역마다 든든히 자리잡아야 한다.

홍성 홍동면 ‘사회생태적 마을 살이’의 허브이자 센터 구실을 하고 있는 <밝맑도서관>
▲ 밝맑도서관 홍성 홍동면 ‘사회생태적 마을 살이’의 허브이자 센터 구실을 하고 있는 <밝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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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채'와 '강준만'을 읽으면 마을공동체가 읽힌다

그런데 마을이나 마을공동체를 제대로 보려면 마을만 공부해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농업, 농촌, 농민은 물론, 농업경제학, 농촌사회학, 심지어 정치환경까지 두루 살펴봐야 한다. 그러자면 '박현채'를 새삼 다시 꺼내 읽어볼 필요가 있다. 박현채는 '산업화 과정들의 문제들을 규명하고 체계적 대안을 마련하려는 한국적 정치경제학'으로서 이른바'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진보적 경제학자이다. 한국 국민경제의 독자적 가능성을 제시하며 사회변혁운동에 앞장 선 실천적 경제이론가로서 평가된다. 특히 실천적으로 전근대적 생산양식을 극복하기 위해 협업농업의 양성을 강조했다. 또 농업문제뿐 아니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문제, 원조경제의 본질, 자본주의 세계경제에서 국민경제의 독자적인 존재 가능성까지 고민했다.

박현채가 남긴 '한국농업의 구상', '한국경제와 농업', '한국경제구조론', '민족경제와 민중운동' 등의 저작을 읽으면 "왜 이 나라 농업, 농촌, 마을공동체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 비로소 알 수 있다. 1960년대 중반, 당시 민주공화당은 한국농업의 생산력 정체와 빈곤의 원인이 농업 경영의 영세성에 있다고 봤다. 진단은 비교적 정확했으나 내놓은 처방이 문제였다. 박현채의 진단과 분석을 그대로 옮기면 "과소경영 청산을 위해 농업을 자본제적 경영을 통한 확대재생산의 경제단위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또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윤이 실현되는 형태의 농업경영에로 농업을 자본주의화 시키는 것으로 개념되어지는 중농정책을 시행하도록 정부에게 의무지웠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농촌이 안고있는 문제, 마을공동체의 적폐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발화되었다고 이해된다. 박현채는 "그간 이 한국경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분업체계에 긴밀한 관련을 가짐으로써 유지되어 왔다. 그것은 식량문제의 경우 값싼 미국잉여농산물의 도입으로 저농산물 가격정책을 견지하고, 저노임을 기초로 한 가공수출의 증대로 수입재원을 확보한다는 전략이 기축을 이루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국은 만성적인 식량 및 원자재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살농정책'의 불가피한 이유를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마을만 보고 생각해서는 마을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을만 공부해서는 마을을 잘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을 둘러싼 농업의 경제와 농민의 생활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세계의 근현대사와 국제 정치, 그리고 공동체 사회의 이면까지 더 들여다 봐야 한다. '박현채'를 다시 꺼내 읽어볼 필요가 있다. 마을공동체로 가는 길이 그 책 속에 있을지 모른다.

수백년 동안 ‘마을 만들기’가 아닌 ‘마을살이’로 지켜온 <순천 유경마을>
▲ 순천 유경마을 수백년 동안 ‘마을 만들기’가 아닌 ‘마을살이’로 지켜온 <순천 유경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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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마을이 딛고 있는 현실인 지역사회의 문제까지 이해하려면 '강준만'도 읽어봐야 한다. "지방은 서울의 '내부식민지'이고 '식민지 독립투쟁'이 지방을 넘어서 나라를 살리는 길" 이라는 게 전북대 강준만교수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는 "헌법은 아무도 지키지 않는 빈껍데기, 아니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다"면서, "지방은 정치ㆍ경제ㆍ문화ㆍ교육ㆍ언론 등 전 분야에서 서울에 종속된 '내부 식민지'"라고 개탄한다. 강 교수는 "지방정부의 자율성도 낮을 뿐더러 재정 독립성도 약하다"는 게 근본적 문제라고 지적한다. 특히 인사와 예산의 종속은 지방정부의 '중앙에 줄 대기' 경향을 키웠다는 것이다.

강교수의 지적처럼 지난날 지역불균형발전으로 인한 지역격차 또는 지역 불평등은 곧 경제적 기회, 정치적 접근성, 문화적 향유의 격차로 직결되었다. 결국 지역감정이라는 사회적 갈등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국가의 통합적 발전을 저해한 것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지역불균형 또는 차별의 원인이 결국 권력의 중앙집중에 있으므로 지방의 자율과 분권은 불가피하다. 그래야 지방은 '서울, 수도권의 식민지'에서 독립할 수 있다.

그러자면 우선 '지방'이란 용어부터 고칠 필요가 있다. '지역'이라고 하는 게 바람직하다. 지방이란 용어는 '서울'을 중앙으로 보고 나머지 지역은 변두리 또는 들러리로 무시하고 홀대하는 시각과 인식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동안 지역마다 외부나 상부에 의존하는 외생적 지역발전전략의 폐해와 상처는 심각했다. 특히 상부, 즉 중앙정부의 시혜적 배분에 의존하는 외생적, 기생적 지역발전 전략은 지역의 창의력, 능동성, 독립성을 마비시켰다. 박현채의 고발대로 '살농정책'에서 벗어나야, '강준만'의 비판대로 지역이 독립해야 '사회생태적 마을 살리기'는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마을학개론(an introduction to Communology/ 마을에서 먹고 사는 법) : 귀농을 하거나 자발적 하방을 해서 마을에서 먹고 살려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마을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마을, 공동체, 마을시민. 마을기업, 대안마을, 대안농정, 그리고 대안사회를 열심히 공부해서 체화해야 한다. 그러면 마을에서 사람답게 먹고 살 수 있다.



태그:#마을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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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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