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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의 사진은 모두 필름으로 촬영하였고 사이즈 조절, 약간의 밝기 조정 외에는 어떠한 보정도 거치지 않았으며 사진 설명 앞의 괄호에 있는 정보는 카메라 기종, 필름 종류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입니다. -기자말
꽃지 해변에서 바라본 노을 (67ii/Ektar100)방포항의 방파제 너머로 해가 지고 있다. ⓒ 안사을
직장 동료이자 선배님의 장녀 결혼식이 서울에서 열렸다. 전주에서 출발하는 전세버스에 몸을 실으면 편안하게 갔다올 수 있었는데 불과 12시간 전에 마음이 바뀌었다. 주말 날씨를 확인하고 늦은 시각에 곧바로 짐을 꾸렸다. 카메라 3대와 텐트, 침낭, 옷가지 몇 개를 금세 쌌다. 120짜리 중형필름 10롤, 35미리 슬라이드 필름 2롤과 함께.

이후 몇 시간이 더 지나서야 컴퓨터 화면에서 지도를 키웠다 줄였다를 수십 번 반복한 후 겨우 여행지를 정할 수 있었다. 정오의 예식을 다녀온 후 서해안으로 갈 계획을 세웠다. 오랜만에 낙조를 담고 싶었고, 바다의 반대편으로 눈부신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서해바다로 넘어가는 둥근 달을 담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서였다.
새벽녘의 서쪽 해변 (67ii/Ektar100)이런 파스텔톤의 색을 입은 하늘은 해가 떠오르는 곳이나 지는 곳에서는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편으로 눈을 돌리면 이러한 색을 만날 수 있다. ⓒ 안사을
꽃지해변의 불타는 저녁놀

구름이 낀 날은 노을 풍경이 말 그대로 '복불복'이다. 해가 구름 뒤로 숨으면 잿빛 하늘이 되어버리지만 해가 바다 뒤로 넘어가면서 구름의 밑면에 붉은 빛을 비춰주면 마치 하늘에 불이라도 난 듯한 색깔이 넘실댄다. 관건은 수평선 근처에 구름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얀 구름이 덮인 날, 수평선쪽에 구름이 제 자리를 조금 양보하여 여백의 미라도 보여주는 날에는 하늘에 화려한 색조화장이 입혀진다.

태안반도에서 안면도로 들어가기 직전 만났던 청포대의 풍경은 저녁 노을을 만나려던 여행자에게 전혀 뜻하지 않은 벅찬 선물이었다. 오후 4시경이었다. 잘 곳을 물색하기 위해 야영장이라고 쓰인 이정표를 보고 해변쪽으로 들어가다 만난 노란 금계국이 시선을 끌었다. 박지는 찾지 못했다. 국립공원 구간이었기 때문에 7, 8월을 제외하고는 야영을 금지하고 있었다. 어디서 자야 할지 막막해질만도 했건만 그렇지 않았다. 꽃밭에 온통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청포대 풍경 (67ii/Pro160ns)해송, 갯그랑, 통보리사초 등 갖가지 사구 식물들이 천연의 정원을 이루고 있다. ⓒ 안사을
의자와 금계국 (67ii/Pro160ns)하얀 의자 하나가 금계국 사이에 놓여있다. ⓒ 안사을
꽃길 (67ii/Pro160ns)꽃밭 사이로 부드러운 모랫길이 나 있다. ⓒ 안사을
숙영지로 삼으려고 했던 기지포 해변에도 역시 야영을 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해변마다 붙어있던, 천으로 된 공지문을 가까이서 보니 연중 야영과 취사가 가능한 곳은 딱 한 곳밖에 없었다(7, 8월에는 모든 해변에서 캠핑을 허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텐트를 치고 휴식을 취하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많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야영 및 취사 금지구역 (67ii/Ektar100)잠시 쉬다가 해 지기 전에 떠나면 야영객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 곳에서 쉬는 분들 중 대부분이 취사를 하고 있었다. ⓒ 안사을
지도를 보니 태안해안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경계선이 나와있었고 그 경계선 밖의 사유지에서는 민박과 야영장을 같이 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행히 기지포해면에 딱 한 군데, 야영을 위한 사이트를 제공하는 민박집이 있었다. 전화 연락을 통해 저렴한 가격에 몇 평의 자리를 예약하고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저녁 어스름을 향해 달려가는 서쪽 땅의 끝자락을 향해 조금 더 차를 몰았다.
남매의 실루엣 (nF-1/RDP3)서편에서 비춰오는 햇살 속에서 오누이의 실루엣이 참 훈훈하다. ⓒ 안사을
꽃지해변은 삼삼오오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해가 바다 뒤로 들어가기에는 아직 3시간 가량 남은 시각이었다. 이 때를 위해 챙겨온 반사렌즈를 꺼내어 삼각대에 조립하고 해변으로 내려갔다.

반사렌즈는 렌즈의 경통 내부에 곡면 거울이 들어있다. 이러한 설계로 인해 초점거리가 긴 망원렌즈라 해도 렌즈의 길이와 무게를 절반 이상 줄일 수 있는 이점이 있는데, 덤으로 초점이 안 맞는 곳에 다른 렌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상이 맺힌다. 이러한 상을 소위 '도넛 보케'라고 한다. 이는 빛망울이라는 단어로 순화시킬 수 있을 듯하다.
반사렌즈의 앞모습 ⓒ 안사을
이렇게 도넛 모양의 망울이 나오는 이유는 가장 바깥쪽 렌즈의 한 가운데 거울이 박혀있기 때문이다. 일반 렌즈에도 이런 식으로 가운데 검정색의 동그란 무언가를 붙이면 도넛 빛망울을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주변부를 막고 가운데를 네모 모양으로 뚫어놓으면 초점이 맞지 않는 곳의 상이 네모지게 표현된다. 말랑말랑한 사진을 원하는 이들은 하트 모양을 뚫어서 표현하기도 한다. 이를 흔히 하는 말로 '보케놀이'라고도 한다.
해변의 여인 (nF-1/RDP3)바다를 응시하고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반사렌즈로 담았다. 여인의 상을 조금 흐려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 안사을
갈매기의 쉼 (nF-1/RDP3)갈매기 세 마리가 나무 구조물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안사을
출출한 배를 간식거리로 채우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다 다시 서쪽 하늘을 보니 맥이 탁 풀려버렸다. 구름이 잔뜩 서쪽의 수평선 위를 메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낙담하지는 않았다. 해가 빛을 올려줄 수 있는 틈새 한 줄만 마련되면 어떤 청명한 날보다 강렬한 석양이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불안한 마음과 기대하는 마음이 적절히 섞인 상태로 시계를 들여다 보니 1초의 간격이 더디게 느껴졌다.

짧지만 긴장되는 기다림 끝에 극적으로 수평선 근처에서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오늘은 성공이다! 이제는 해가 바다 뒤로 넘어가도 어둠이 쉬 찾아오지 않고 붉은 조명이 바다를 비출 것이다. 세 대의 카메라, 두 종류의 필름으로 찍은 사진을 시간의 순서대로 배치해본다.
꽃지의 석양 (67ii/Ektar100) 짙은 구름 밑으로 해가 드러난 순간 카메라의 세팅 값을 분주히 바꾼다. 빛의 양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 안사을
꽃지의 석양 (67ii/Ektar100)렌즈의 화각을 바꾸어 아직 파란 색감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까지 함께 잡았다. 할머니 섬과 할아버지 섬이 여전히 사이 좋게 서로를 의지하는 듯 서있다. ⓒ 안사을
꽃지의 석양 (nF-1/RDP3)다른 카메라들보다 필름의 크기가 세 배 이상 작아서 해상력이 떨어질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선예도가 좋고 대비가 센 슬라이드 필름을 넣었다. 35mm 필름 사이즈(풀프레임), 24mm의 초점거리를 가진 렌즈로 찍은 풍경. ⓒ 안사을
꽃지의 석양 (SW612/Ektar100)중형 파노라마 포맷의 필름카메라. 같은 필름이여도 렌즈가 달라지면 이렇게 색깔 또한 달라진다. ⓒ 안사을
꽃지의 석양 (67ii/Ektar100)해가 진 직후의 하늘이야말로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는 역광을 강하게 받지 않으니 색색의 구름을 세세하게 잡을 수 있다. ⓒ 안사을
2주 연속 주말을 이용해 출사를 나가 밤새 새벽이슬을 맞아가며 기다렸건만, 기상이 따라주지 않아 은하수 및 일출 촬영에 실패하고 돌아온 것이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럴 때마다 적당한 아쉬움이 있어야 어느 순간 원하는 풍경을 잡을 수 있었을 때 기쁨이 배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 뒤에 만난 풍경이었기에 더욱 벅찬 마음이 들었고 하늘과 구름, 청정했던 공기에 소리 없이 고마워했다.

새벽의 서쪽 하늘을 본 적이 있나요?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든 것을 보려면 저녁 시간을 이용해야 할 것이고 역시 붉은 동쪽 하늘은 해 뜰 무렵의 새벽 시간에 보이는 것이 당연지사일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반대편을 보면 또 다른 느낌의 색감을 만날 수 있다. 저녁놀이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들 무렵 동쪽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다면 부드러운 분홍빛 하늘을 만날 수 있다. 새벽녘의 서쪽 하늘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히 해변이라면 그 분홍빛이 다시 수면에 반사되어 색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이 날은 보름달이 아침 6시 반경에 서쪽 바다 뒤로 넘어가는 날이었기 때문에 더욱 신비로운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두 팔을 다 펼쳐서 누울 수 없는 아담한 텐트에 몸을 누이면서 미리 맞춘 알람 소리를 듣고 잠을 깨어 해변으로 나갔다. 등대와 달, 분홍빛 구름과 잔잔한 바다가 나를 맞아주었다. 환호성을 지르기에는 너무도 경건한 풍경이었다.
새벽녘 서쪽 하늘 (67ii/Ektar100)파스텔톤으로 물든 새벽 하늘과 바다, 그리고 등대. 아직은 가장 밝은 존재로 하늘에 머물러 있는 고요한 달. ⓒ 안사을
눈에 보이는 만큼 달이 크게 담길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다중노출이 아닌 한번의 셔터로 담을 수 있는 달의 모습은 저렇게 작다. 또한, 아직 어스름이 가지시 않은 지상의 빛보다 보름달의 빛이 5배 이상 강하기 때문에 아쉽게도 달 표면의 세부적인 모습은 담기지 않는다.

그러니, 상상해보기 바란다. 달빛은 다소 엷어져 레몬의 속살같은 빛깔이었고 여전히 전래동화에 나오는 토끼는 그 안에 살고 있었으며 고운 모래에 스며드는 파도는 그 흔한 '쏴아~' 하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작은 배 한척의 엔진소리만이 고즈넉이 들려올 뿐이었다.
아침햇살 (67ii/Ektar100)솔숲 사이로 눈부신 아침햇살이 스며들고 있다. ⓒ 안사을
이 시각의 하늘빛은 금세 바뀐다. 20분여가 흘렀을까. 바다의 반대편인 동쪽에서 강렬한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아침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듯 서편 하늘의 분홍빛은 차츰 파란 빛으로 변해갔다.
기지포해변의 아침 (SW612/Ektar100)아직 달이 채 지지 않았지만 금세 하늘과 바다가 파란빛으로 변해갔다. 멀리 보이는 등대에 떠오르는 태양빛이 반사되어 강렬한 빨간 빛을 보이고 있다. ⓒ 안사을
기지포해변의 아침 (SW612/Ektar100)동이 튼지 40분 가량 흐르자 하늘과 바다가 완전한 오전의 빛깔을 띤다. 왼편의 소나무 그림자, 그리고 숲과 바다 사이에 쌓인 모래 언덕 때문에 착시현상처럼 바다가 땅보다 높아보인다. ⓒ 안사을
* 기지포해변-삼봉해변을 잊는 해변길 풍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신두리 해안사구에 대한 여행기사가 이어집니다.
태그:#태안반도, #안면도, #꽃지해변, #기지포해변, #필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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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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