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KBS 아나운서 30기로 입사했으며 입사 직후부터 간판 아나운서로 활약했다'는 소개글을 읽으면서도 고민정 아나운서를 방송에서 봤던 기억이 전혀 없었다. '열한 살 연상의 대학선배인 조기영 시인과의 결혼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는 소개글을 읽으면서도 그런 뉴스를 보았던 기억이 없었다.

저자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방송, 정확히는 KBS를 안 본 지 오래 돼서 그랬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설령 보았다 해도 여자 아나운서나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아무리 봐도 그 얼굴이 그 얼굴 같다고 느끼는 안면 인식 장애 수준인 내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을 테지만.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 고민정.조기영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 고민정.조기영
ⓒ 북하우스

관련사진보기

책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는 '고민정 아나운서와 조기영 시인의 시처럼 아름다운 삶의 순간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시인과 아나운서의 더 깊고 넓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삶의 따뜻한 기적들을 털어놓는 이 책은 호들갑스럽지 않고 잔잔하다.

나름 유명 인사들일 텐데, 사진으로 본 두 저자의 얼굴은 낯설었다. 하지만 둘이 결혼하기까지 겪었던 이야기와 일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낀 부부의 따뜻한 인간미는 낯설지 않았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인 문재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은 <그래요 문재인>에 두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며 깊이 공감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더불어 그 이야기가 우리네 일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특별히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불꽃같은 사랑도 식을 때가 있고,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도 어긋날 때가 있다. 그러나 서로에게 사랑을 독점할 독재를 허용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저자 고민정·조기영 부부는 세상에 소문날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들답게, '사랑이란 감정은 독재, 단 한 사람에게만 허용되며 민주주의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다만, 사랑이 독재라 할지라도 독재자의 지위를 부여받기까지 모두 동등한 위치에서 민주주의 방식을 거쳐야 한다고 본다.

"상호 독재의 지위가 부여된 관계에서는 독재와 거리가 먼 소통과 배려, 관용이 넘쳐야 삶이 윤택해지고 풍부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한다." -338쪽

지금은 청와대 부대변인으로 갔지만, 고민정 아나운서의 직업관은 엔터테이너가 넘쳐나는 요즘 언론계에서 보기 드물어서 신선하다.

"가진 거라곤 세상밖에 없는 이들의 마이크가 되고 싶었다. 서로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며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에게 엄격하려 했다. '춘충추상春風秋霜', 다른 이에겐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나에겐 가을서리처럼 냉정해지고자 했다. 위를 보기보다는 아래를 바라보려 했고,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자 했다." -7쪽

조기영 시인은 '주부. 시인. 한 여자의 남편. 어쩌다 보니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빠'다. 시인은 아내 고민정을 두고 '시를 쓰는 자신이 세상에서 훔친 유일한 시'라고 말한다. 어째 연애박사도 울고 갈 작업멘트가 쏟아질 것 같은 선수의 기운이 전해지지 않는가? 둘이 나누는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내가 일찍 마음을 주는 게 아니었어. 애를 좀 팍팍 태웠어야 위대한 작품이 나오는 건데!" 그러면 나는 답한다.
"내 가장 위대한 작품은 당신이잖아. 안 그래?"
그녀, 피식 웃고 만다." - 332쪽


이쯤 되면 시인이 아내의 마음을 훔쳤던 것은 시였을까? 작업 멘트였을까? 그것이 궁금해진다. 그런데 시인의 고백은 달라도 뭐가 다르다. 바람둥이 특유의 느끼함은 전혀 없고 거부할 수 없는 웃음과 행복을 안겨준다. 콧대 높은 클레오파트라도 넘어가지 않을 재간이 없는 시인의 능청이 여기 있다.

""시인은 세상 모든 여자들을 사랑할 수 있지만 나는 그대만을 사랑하게 설계되어 있소. 세상 여인들에겐 비극이지."
그녀, 다시 웃고 만다." - 244쪽


시인이 운을 떼도 받아주는 사람이 없다면 무슨 감흥이 있을까. 운을 뗄 때마다 감동하는 여인을 앞에 둔 시인은 행운아 아니면 천재 시인일 것이다.

"시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면 꽃향기가 났고, 그의 시를 가슴에 품었을 땐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 158쪽

참, 닭살 돋는 부부다.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데, 11살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둘은 참 많이 닮았다. 그야말로 부창부수다. 이 정도 되면 천생연분이다. "사랑은 세상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다(26쪽)"는 말이 그저 하는 말이 아님이 분명하다.

두 사람이 쓴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부분 공감했다. 또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그래, 그렇지'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자신을 들여다보고, 아이와 함께 배우고 자란다. 자식 낳아 봐야 부모 마음 안다고 하는데, 고민정 아나운서는 그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백 번 공감할 수밖에 없고, 가슴 울컥하게 하는 고백이다.

"한 어머니의 자식으로 태어난 나는 죽을 때까지 그 분을 앞서가지 못할 것이다.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명예가 내게 있다 한들 피와 살과 눈물로 그러진 그 분의 세월은 당해낼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75쪽

그러면서도 육아로 인한 엄마의 희생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은 그녀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희생과 죄인', 그 악순환의 굴레를 끊기 위한 어떤 노력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고민정 아나운서 부부는 이 시대 여성들이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모두 자유롭게 한 세상 멋지게 살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기에.

"아이는 엄마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이를 위해 희생을 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엄마 자신의 삶을 망가지게 하지만 아이를 '죄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123쪽

고민정·조기영 부부는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날보다 함께 살아갈 날이 더 많을 것이다. 이 부부는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를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와 누구를 사랑할 것인가를 보게 하고 있다.

바람,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
저 파란 하늘에서는 당신의 미소를 베고 누워 벗어놓은 시가 있다 - 조기영 시



당신이라는 바람이 내게로 불어왔다 - 고민정 아나운서와 조기영 시인의 시처럼 아름다운 삶의 순간들

고민정.조기영 지음, 북하우스(2017)


태그:#고민정, #조기영, #부부, #아나운서, #시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