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는 토너먼트(16강·8강·4강) 전 경기 120분 혈투를 벌이며 결승전까지 올라왔다. 절망에 빠진 자국민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똘똘 뭉쳐 인간의 예측을 수차례 뒤엎었다. 체력적인 열세를 이겨내기 힘들다는 결승전 전망 역시 빗나갔다. 그들은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줬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그런데 이김과 짐을 나누는 승부란 녀석은 잔인하다. 투혼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30,346여 명의 마음을 사로잡은 어린 청년들의 꿈을 막아섰다. 추가 시간 4분이 모두 지나고, 심판의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그들의 여정은 아쉽게 막을 내렸다. 주저앉았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화려한 플래시 세례도 그들을 외면했다.

    승리를 다짐하는 베네수엘라 팬들

승리를 다짐하는 베네수엘라 팬들 ⓒ 이근승


슈팅 숫자 '19-20'

수원월드컵경기장이 개장한 2001년 5월 13일 이후 최고의 경기가 아니었나 싶다. 성인 월드컵 결승전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던 명승부였다.

    베네수엘라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열광적인 응원을 보여줬다.

베네수엘라 팬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열광적인 응원을 보여줬다. ⓒ 이근승


우선, 열기가 뜨거웠다. 3-4위전이 끝날 무렵부터 베네수엘라 관중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흥이 넘쳤다. 춤은 기본이었고, 목청껏 응원가를 불렀다. 반면, 잉글랜드 팬들은 묵직했다. 경기장을 돌며 흥겨움을 전하던 베네수엘라 팬들과는 달랐다. 한국 팬들은 각양각색이었다. 베네수엘라 팬들과 어울려 응원가를 따라 부르는 이도 있었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이하 EPL) 팀의 유니폼을 입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침내 결승전이 시작됐고,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눈을 뗄 수 없었다. 공격과 공격이 맞붙으면서, 속도가 엄청났다. TV를 통해서나 볼 수 있었던 EPL 경기가 눈앞에서 치러지는 듯했다. 잉글랜드가 도미닉 솔란케와 아데몰라 루크먼을 앞세워 상대 진영을 공략하면, 베네수엘라는 세르지오 코르도바와 아달베르토 페냐란다로 맞대응했다.

전반 23분에는 로날도 루체나의 기습적인 프리킥이 골대를 때렸다. 베네수엘라의 전반전 공격 중 가장 아까웠던 장면이었다. 잉글랜드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루크먼이 드리블 능력을 뽐내며 수비진을 흔들었고, 양 측면 풀백 존조 케니와 카일 워커-피터스의 공격 가담이 이루이지기 시작하며 분위기를 가져왔다.

0의 균형까지 깼다. 전반 35분 후방에서 길게 넘어온 볼을 도미닉 칼버트-르윈이 잡아 슈팅으로 연결했고, 윌커 파리네스 골키퍼가 쳐낸 것을 재차 슈팅으로 연결하며 골망을 갈랐다. 전반 40분에도 루크먼의 침투 패스를 잡아낸 칼버트-르윈이 파리네스 골키퍼와 일대일 기회를 맞이했지만, 추가 득점으로 연결하지는 못했다.

후반전은 베네수엘라의 분위기였다. 로날도 차콘의 슈팅이 잉글랜드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코르도바의 침투는 프레디 우드먼 골키퍼와 일대일 기회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결정력이 아쉬웠다. 잉글랜드는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집중하면서, 역습을 노렸다. 특히, 후반 9분 조쉬 오노마의 기습적인 중거리 슈팅이 크로스바를 때리며, 3만여 관중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후에는 베네수엘라의 공격이 계속됐다. 앙헬 에레라의 헤딩슛이 잉글랜드 골문을 위협했고, 페냐란다의 개인기가 수비를 흔들었다. 마침내 최고의 기회가 찾아왔다. 후반 27분 페냐란다가 드리블 돌파를 통해 피카요 토모리의 반칙과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페냐란다의 킥이 우드먼 골키퍼의 선방에 막혔다. 재차 슈팅을 시도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연이은 연장 승부로 인해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지만, 투혼을 불살랐다. 페널티킥을 실축한 페냐란다는 물론이고, 교체 투입된 예페르손 소텔도와 사무엘 소사도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경기 막판 코너킥 상황에서는 파리네스 골키퍼까지 공격에 가담했고, 드리블에 이은 슈팅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후반 추가 시간 극적인 동점골을 넣었던 준결승전과 달리 또 한 번의 기적은 없었다. 

'준우승'에 머물기엔 너무나도 대단했던 베네수엘라

잉글랜드가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 수비진의 몇 차례 실수가 있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우드먼 골키퍼가 메웠다. 그들은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상대의 기회는 무산시키며, 사상 처음으로 U-20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도 정말 잘 싸웠다. 베네수엘라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말라가에서 활약하는 페냐란다를 제외하면,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자국 리그에서 활약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선수들의 몸값(약 102억 원)을 모두 합쳐도 솔란케(약 106억 원)보다 적었다. 그런데도 기죽지 않았다. 개인 기량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았고, 조직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앞서는 모습도 보여줬다.

베네수엘라는 고개를 숙일 필요가 전혀 없다. 그들은 독일과 바누아투, 멕시코와 한 조에 속하며, 16강 진출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다 이겼다. 10골을 넣었고, 실점은 없었다. 16강전에서는 아시아 챔피언 일본을 잡았고, 8강전에서는 북중미의 최강자 미국을 꺾었다. 준결승전에서는 남미 지역 우승팀 우루과이까지 이겼다. 선제 실점을 내주며 패색이 짙었지만, 후반 추가 시간 극적인 동점골과 함께 기적을 써냈다.

3경기 연속 연장전을 치르며 체력이 바닥 난 상태였지만, 결승전에서도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줬다. 득점 기회를 살리지 못한 점이 아쉬웠고, 골대가 야속했지만, 베네수엘라가 어떤 팀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우승팀을 상대로 19개의 슈팅을 퍼부었고, 점유율에서도 대등했다.(48%-52%) 다만, 운이 조금 따르지 않았을 뿐이다.

아쉬움의 눈물을 감출 수는 없었지만, 베네수엘라의 여정은 신화나 다름없다. U-20 월드컵 도전 두 번 만에 준우승이란 값진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제는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진짜 월드컵 본선 무대를 향해 나아가면 된다.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진출은 이미 좌절된 상태지만, 신화의 주역들이 꾸준히 성장한다면,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은 충분히 가능하다. 지금의 열정과 투혼을 잃지 않는다면, 언젠가 화려한 플래시 세례는 그들의 몫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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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20 월드컵 결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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