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정도 타지에서 머물다 돌아온 첫 주말, <로스트 인 파리>를 보게 됐다. '길을 잃은' 누군가의 이야기가 괜스레 궁금해진 건, 아마도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나 역시 낯선 공간에서 이방인이 되어 매일 길 잃어보는 삶으로 지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온통 새로움 투성이며, 버스가 정차하는 곳마다 최초의 방문지가 되었던 그 시간은, 길을 잃는 중이면서도 길을 잃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낯선 여행지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여주인공 피오나가 이모 마르타의 부름에 대뜸 캐나다에서 프랑스 파리로 날아간 건,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던 파리라는 장소에 대한 로망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마르타 이모를 따르던 피오나는 파리로 가겠다는 이모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 역시 '꼭 그러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후, 피오나의 위치는 거센 눈발이 휘몰아치는 캐나다의 일상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는 찾아가고 싶은 꿈의 도시지만, 현실로 이뤄내기에는 너무나도 막연했던 장소, 파리. 하지만 피오나에게 그 불투명했던 파리행이 선명한 목표로 등장한다. 바로 우체통과 쓰레기통을 착각한 마르타 이모의 실수로 한참 뒤에야 피오나에게 도착한 편지 한 통 덕분. 거기에는 양로원으로 들어가기 싫은, 여전히 자유로운 파리지엥이 되고픈 마르타 이모의 간절한 SOS가 담겨 있었다.

바라는 것이 현실이 되느냐, 꿈으로만 머무르느냐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용기'라면, 일상을 평범하게만 영위하며 용기내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던 피오나에게 마르타의 편지는 도전의식을 생성시키고, 삶의 경험치를 끌어올리는 중요한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 피오나에게 도착한 이 뜻밖의 짜릿한 자극으로부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파리 여행기는 시작된다.

영화 <로스트 인 파리>의 한 장면 마르타와 노르망이 만나 오래전 함께 추었던 신발 댄스를 선보이는 장면. 배경음악과 어우러지는 환상의 호흡은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다.

▲ 영화 <로스트 인 파리>의 한 장면 마르타와 노르망이 만나 오래전 함께 추었던 신발 댄스를 선보이는 장면. 배경음악과 어우러지는 환상의 호흡은 영화에서 놓칠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다. ⓒ 제민주


너와 내가 함께일 때의 힘, 그 위력의 위안

녹색 계열의 상, 하의와 그에 대비되는 새빨간 배낭, 그리고 배낭에 꽂아둔 높이 치솟은 캐나다의 단풍잎기는 파리에 입성한 피오나의 어리버리한 당돌함만큼이나 당당하게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파리의 풍경에 유독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피오나의 모습은 앞으로 이곳에서 길을 잃어갈 피오나의 모습을 놓치지 말고 확인하라는 두 감독의 메시지였을까. 스크린 가득 파리의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진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 잃은 여성의 동선에서 시선을 거두지 말아달라는 암묵적인 강조였을까.

뚜렷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영화적 색감과 연출력만큼은 너무나도 뚜렷한 개성을 보이는 <로스트 인 파리>는 피오나라는 한 인물의 길 잃음에 그저 즐겁게 동행하도록 만들고 있다.

피오나에게 주어진 파리에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단연 마르타 이모를 만나는 일. 하지만 피오나가 그 단순한 목적을 이루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에펠탑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 센느 강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던 피오나는 배낭의 무게에 균형을 잃고 그만 강으로 빠지고, 이 사건으로 배낭과 휴대전화를 모두 잃어버린다. 심지어 이모와는 연락조차 닿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는 파리의 노숙자 신세가 되고, 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의 피오나로부터 영화 제목이 말하려던 '파리에서의 길 잃은 여행'이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다.

영화는 피오나와 동행하는 남자주인공 돔을 등장시켜 로맨스 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돔은 센느 강 부근에서 노숙하는 걸인이지만 라이프 스타일만큼은 파리지엥인 낭만적인 남자. 우연히 주운 피오나의 배낭으로 호사를 누리던 그가 또 다시 우연한 계기로 피오나를 만나며 옥신각신하기도 잠시, 그녀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는 피오나의 이모 찾기에 동참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가장 평범한 파리의 민낯 속으로 들어가 관객 또한 그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마르타를 찾아야 하는 숙제가 어느새 피오나의 것만이 아닌, 돔과 관객 그리고 우리 모두의 숙제로 확장되는 순간인 것이다.

이모를 찾으려는 피오나의 절실함과, 곁에서 그녀를 돕고 싶은 돔의 진심, 그리고 두 사람의 케미가 만들어내는 다음 장면이 궁금한 관객의 호기심은 이 영화만의 독특한 슬랩스틱 장면들과 어우러지며 인물과 관객이 모두 유쾌해지는 러닝타임을 채워간다.

당신의 선택이 당신만의 길을 만든다

영화 <로스트 인 파리>의 포스터 영화 속에서 인물의 만남을 주선하는데 절대 빠질 수 없는 개연적 소재들이 포스터에 등장한다. 피망, 엽서, 그리고 에펠탑.

▲ 영화 <로스트 인 파리>의 포스터 영화 속에서 인물의 만남을 주선하는데 절대 빠질 수 없는 개연적 소재들이 포스터에 등장한다. 피망, 엽서, 그리고 에펠탑. ⓒ 제민주


하지만 피오나와 돔만 언급하기엔 마르타 이모의 존재가 사실 영화 속에서 꽤나 결정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피오나와 돔의 만남부터, 이후 이어지는 모든 장면의 개연성이 바로 마르타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락가락하는 정신을 붙잡으며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에펠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닌, '꼭대기'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더해 그녀 삶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특별한 곳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철저하게 규격화된 일상과 그 일상을 채우는 일반화된 계획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실현하고 싶었던 마르타. 그녀는 돈을 반드시 벌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거나, 운동을 해야만 건강할 수 있다는 식의 보편적인 생각이 아닌, 삶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떳떳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꿈을 꾸고, 그 꿈이 있어 행복한 그녀는 결국 획일화된 시선들로부터 벗어날 공간을 찾아 헤매고, 마침내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못하는 에펠탑 꼭대기에 올라선다. 그녀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던 사랑스러운 조카 피오나와, 그런 피오나를 따라 나선 돔과 함께.

피오나 역을 맡은 피오나 고든 감독은 영화 제작 후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고. 인생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삶을, 오히려 어색해하고 불편해했던 태도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인생을 풀어내기 위해, 그렇게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피곤한 시간으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 또한 있다. 어쩌면 '길을 잃었다'는 말이 누군가가 조금 빨리 정의내린 다른 길 하나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일 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긍정하자. 낯선 환경과 그 속에서 만나는 모든 뜻밖의 순간을. 피오나는 파리에서 만난 이모와 돔으로 인해 길 잃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돔 앞에 선 피오나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마지막 대사 뒤에 이어질 한 마디를 혼자 상상한다. '이런 선택을 한 이유요? 음, 아직도 잃어봐야 할 길이 많은 것 같아서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민주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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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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