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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32조 제1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

제2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의무를 진다. 국가는 근로의 의무의 내용과 조건을 민주주의원칙에 따라 법률로 정한다.

근로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돈)을 받는 행위다. 근로와 동의어로 노동이라는 단어가 있다. 하지만 두 단어의 한자를 살펴보면 서로 상이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근로(勤勞)는 부지런히(勤) 일한다(勞)는 뜻인 반면 노동(勞動)은 움직여(動) 일한다(勞)는 뜻이다. 노동에 비해 근로는 '부지런히 일 한다'는 의무의 성격이 강하다.

헌법은 사람이 돈을 벌기위해 일하는 행위를 노동이 아닌 근로라는 용어로 수식한다. 이는 헌법이 근로를 권리로 규정(제32조 제1항)함과 동시 의무로 규정(동조 제2항)하고 있는 태도와도 일치한다. 그런데 돈을 벌기위해 일하는 것이 의무라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의무보다는 덜하지만 권리라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이는 근로가 가지는 권리와 의무라는 이중적 지위가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

영국의 정치가이자 인문주의 사상가였던 토마스 모어가 1516년 발표한 '유토피아'에서 영국을 가리켜 한 말이다.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 영국은 삼포제(三圃制) 농법이 일반적이었다. 삼포제는 마을의 공동 경지를 동일한 크기의 세 개의 경포(耕圃)로 나누어 한 곳에는 보리·귀리와 같은 여름 곡물을 다른 한 곳에는 밀·호밀 등 겨울 곡물을 심고 나머지 한 곳은 휴작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세 경포를 1년 단위로 돌아가며 경작 하면 3년에 한 번씩 휴작을 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잃어버린 지력을 되살려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삼포제는 이와 같이 춘경(春耕), 추경(秋耕), 휴작용 세 개의 경포와 마을 공동목장인 방목지와 연료 체취용 산림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16세기에 들어 영국에서 모직물 공업이 발달하면서 원료인 양모의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자 지주들은 마을의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양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는 것 보다 양을 기르는 것이 훨씬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야 했고 그 자리는 양들이 차지했다. 양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농민들은 도시로 떠나 노동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토마스 모어의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공유농지가 목장으로 변해 농민들이 쫓겨나는 현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를 울타리를 친다는 뜻에서 엔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이라 하는데 산업혁명기에 다시 나타난 엔클로저 운동과 구분하여 1차 엔클로저 운동이라 한다.

도시노동자가 된 이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 도시노동자가 된 이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도시노동자가 된 이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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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을 떠나 도시노동자가 된 이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농지는 언제나 농민을 필요로 했다. 지주에게 농지와 농민은 다르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공장과 노동자는 달랐다. 노동자는 공장의 한 부속품 정도로 여겨졌다. 더욱이 농촌에서 쫓겨나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이 넘쳐 흘렸다. 당시는 산업혁명 이전, 소규모 수공업이 주를 이루었던 시기로 일자리를 찾는 사람에 비해 공장은 턱없이 적었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유입된 농민들 중 일자리를 찾지 못해 도시 빈민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도시의 골목은 부랑인들로 가득했다. 그러자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1601년 빈민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빈민법은 세계 최초로 빈민에 대한 관리를 정부의 책임으로 규정하여 사회복지의 시초로 평가되는 법이다. 그런데 빈민법의 내용은 오늘 날 사회복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빈민법은 부랑인들을 세 종류로 분류했다. 우선 노동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분하여 노동력이 없는 자는 구빈원으로 보내졌다. 반면 노동력이 있음에도 부랑인으로 사는 자는 교정원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교정원에서는 이들에게 강제로 노역을 시켰다. 그리고 부랑인이 아동인 경우 도제로 삼아 노동자로 길러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빈민법은 인간에게 근로의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에 부랑인으로, 일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국가로부터 진정한 부랑인이라는 확인을 받아야 했다. 일종의 부랑인 면허인 것이다. 그리고 부랑인으로 확인이 된 자도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고 구빈원에 들어가 살아야 했다. 구빈원에 수용되지 않고 도시에서 걸인으로 살아가고자 해도 강제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일하지 않고 구걸하여 살아가는 것 자체가 죄였기 때문이다.

200여 년 후 엔클로저 운동이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이 아닌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산업혁명 때문이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도시에서는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폭발적인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더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이동해 노동자가 되면서 식량난도 심각해졌다. 영국 정부는 값싼 대량의 도시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해 농업생산성의 향상이 절실했다. 이에 맞추어 지주들은 농지를 근대적 대규모 농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수많은 농민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쫓겨나야 했다. 양을 키우지 않았기에 울타리는 없었지만 농민들이 농지에서 쫓겨나 도시로 가야했던 상황이 1차 엔클로저 운동과 같아 이를 2차 엔클로저 운동이라 한다.

산업혁명기 도시노동자의 삶은 매우 비참했다. 고강도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고 아동노동도 만연했다. 인구밀도가 엄청났던 도시의 위생 상태는 엉망이었다.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의 건강이 쉽게 악화되고는 했다. 건강이 악화되거나 공장 노동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정부는 부랑인의 증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산업의 발달에 따라 많은 수의 노동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하지 않고 구걸하여 살아가는 부랑인들이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영국정부는 1834년 다시 빈민법을 제정한다. 이를 엘리자베스 여왕의 빈민법과 구분하여 신빈민법이라 한다. 그러나 신빈민법 역시 엘리자베스 여왕의 빈민법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이 있는 부랑인에 대한 강제노동이 주요 내용이었다. 영국정부는 부랑인들을 분류하여 노동력이 있음에도 부랑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빈민, 국민이 밥을 굶는 문제는 국가의 문제다. 하지만 모든 빈민을 국가가 책임지기에 재정의 부담이 상당했다. 이에 더해 부랑인은 공장을 돌려 국가산업을 발전시킬 노동자를 확보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렇기에 영국 정부는 부랑인을 강제로 수용했고 이들 중 노동력이 있는 자들은 강제로 노동을 시켰다. 근로가 의무가 된 지점이다.

근로가 권리가 된 것 역시 빈민의 발생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농촌에서 농지와 하나가 되어 살아가던 농민들은 국가의 산업발전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쫓겨나야 했다. 농촌은 농민에게 부(富)를 주지는 않았지만 안정적 삶은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공장에 일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삶 자체의 위협이었다. 일을 해야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자에게 일자리는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 그렇기에 노동자가 살아갈 권리는 곧 일자리가 되었다. 근로가 권리가 된 지점이다.

한국 역시 영국의 산업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과거 박정희 정권은 급격한 산업발전을 위해 값싼 다수의 노동자가 필요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채워주었다. 정부는 농지를 정리하고 농기계를 도입하여 적은 수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어 농촌인구의 유출을 메꾸었다. 그리고 정부는 쌀을 수매해 낮은 쌀값을 유지해 도시 노동자들의 임금상승을 억제했다. 한국식 엔클로저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빈민에 대한 통제 역시 한국은 영국과 유사했다. 정부는 도시의 부랑인들을 강제로 수용하여 노동력이 있는 자들은 노역을 시키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집단 수용했다. 12년 동안 5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형제복지원은 한국정부의 부랑인 수용의 대표적 사건이다.

국민의 생존권 보장은 국가의 의무다. 따라서 산업화된 국가에서 노동자의 생존조건인 일자리, 근로가 그들의 권리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의 산업화에 따라 요구되는 노동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근로에 지워진 의무라는 개념은 현대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민으로서 의무를 위반하였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임금을 위해 노동력을 제공하는 행위는 근로 보다는 노동이라 명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광민 변호사는 부천시 청소년법률지원센터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근로의 권리, #근로의 의무, #빈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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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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