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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바라 본 홍성호철물점 전경. 물건들이 정신없이 쌓이고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름대로 다 제자리가 있다.
 밖에서 바라 본 홍성호철물점 전경. 물건들이 정신없이 쌓이고 섞여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름대로 다 제자리가 있다.
ⓒ <무한정보>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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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장터에서 오래된 가게라면 홍성호철물점을 빼놓을 수가 없지요. 내가 어릴 적에도 있었으니 60년도 넘었을 거야. 거기 사장이 장호승씨라고, 중국 산둥성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피난 온 화교였어요. 덩치가 컸지. 호인이었고 대국인다운 기질이 있었어요. 옛날엔 가게가 지금보다 컸는데…. 종로약국 자리에 솥 창고도 있었고요. 철물점 바로 옆이 중국요리 재료 파는 가게였고, 그 앞에는 아치형 나무다리가 있고, 풀빵집도 죽 늘어서 장사를 했었는데…."

달나라이용원 이승순(68) 사장이 밖을 내다보며 예산읍내장터 옛풍경을 회상했다.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257번지를 60년 넘게 지켜 온 홍성호철물점.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홍성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문을 연 가게로 단정하겠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간판이다.

처음 가게를 연 장호승씨가 지은 상호인데 홍은 번성한다는 의미의 '원기홍(鴻)'이고 '승호'는 자신의 이름자 앞뒤를 바꿔 쓴 것이다. 그래서 '홍승호철물점'이었다가, 가업을 이어받은 아들 장원풍(57)씨가 '홍성호철물점'으로 바꿨다. "(ㅡ 보다 ㅓ 발음이 편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란다.

"가게를 이어 받은 지 3년째 되던 해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63세였나 그랬으니 너무 일찍 가셨지요. 그리워 했던 고향에도 못 가보시고….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모평현 장가촌이 고향인데, 장개석하고 모택동과의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건너와 외삼촌이 자리를 잡고 있던 예산에 정착하게 됐다고 들었어요. 그때가 정확히 몇 년도인지는 몰라요."

산둥성이면 서산에서 '닭울음 소리도 들렸다'는 말이 나올 만큼 가까운 곳이다.

장개석(장제스)이 중국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주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게 1949년이니, 장호승씨가 예산으로 와 홍승호철물점을 연 시기는 1950년 이쪽저쪽이 아닌가 싶다.

35년째 가업 이어가고 있는 아들

가게 안, 물건을 찾기 좋은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요즘 잘 나가는 공구들이 진열돼 있다. 팔다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못팔고 재고로 남는 경우도 많단다.
 가게 안, 물건을 찾기 좋은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요즘 잘 나가는 공구들이 진열돼 있다. 팔다보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못팔고 재고로 남는 경우도 많단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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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물점 안쪽 풍경. 옛날부터 변함없이 철물점 천장을 차지하는 물건은 철사. 잘 찾지 않는 물건들은 안쪽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철물점 안쪽 풍경. 옛날부터 변함없이 철물점 천장을 차지하는 물건은 철사. 잘 찾지 않는 물건들은 안쪽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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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몇 년 있다가 본국이 안정되면 들어가려고 하셨는데 결국 못 가시고 여기 눌러 앉았어요. 삼천포가 고향인 어머니(김막달씨)를 만나 우리 5남매를 낳았지요."

장원풍씨는 맏이로 태어나 한국에서 중국인학교를 다닌 뒤, 대만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졸업 뒤 귀국해 22살(1983년) 때부터 부친의 일을 도와 가업을 이었다. 25살에 소미화씨와 결혼해 부부가 함께 35년째 가게 문을 열고 있다.

"아버지 때는 가게도 번창했고 사업영역도 넓었어요. 새벽이면 말마차에 솥단지며 농기구를 가득 싣고 홍성, 유구, 당진 등 외장을 돌았고, 한때는 예산중학교 옆에서 솥공장도 운영했어요."

장 사장이 어릴적 기억을 더듬으며 아버지를 추억해 낸다.

"주변에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죠. 자식들에게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말씀 외에 특별히 '공부 잘해야 한다' 뭐 이런 말씀은 안 하셨어요. 내가 가게를 이어받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지요. 아마도 그렇게 해주길 바랐는지도 몰라요."

시대가 달라지자 철물점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고 대장간에서 만들어 낸 호미, 낫, 괭이, 쟁기, 보습 등 농기구들과 솥, 철사, 호야, 펌프 등 농가에서 필요한 생필품을 주로 팔았다.

1970년대까지 시골에서 필수품이었던 호야. 유리는 신문지에 싸서 따로 팔았다.
 1970년대까지 시골에서 필수품이었던 호야. 유리는 신문지에 싸서 따로 팔았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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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풍 사장이 40여년 전에 팔던 논에 풀 매는 농기구를 보여주고 있다.
 장원풍 사장이 40여년 전에 팔던 논에 풀 매는 농기구를 보여주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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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일부 농기구들을 갖추고 있지만 주품목은 공구와 공사에 사용하는 부속품들이다. 가짓수만 해도 500여 종류가 넘는단다.

"제가 장사를 한 이래 90년대가 가장 호황기였어요. 그 땐 농가주택을 한참 지을 때여서 난방자재와 배관 부속품들이 많이 팔렸지요. 그 후로는 정말 별로였죠. 예산군 인구도 줄었거니와 시장통에 나오는 사람들도 예전만큼 많지 않으니까."

장사가 예전만 하려면 어림없다고 하지만, 취재하는 중에도 손님들의 발길이 꾸준이 이어졌다.

가게 일을 돕던 부인 소미화씨가 덧붙인다.

"우리 가게가 워낙 오래도 됐고, 아버님 어머님이 덕을 많이 베풀어서 그런지 오래된 단골들이 꾸준히 오셔요. 옛날에 어머님이 나무 팔러 온 사람들이 밥 못 먹었다고 하면 빵을 쪄서 나눠줬다고 해요. 지금도 물건 사러와서 그 얘기를 하시는 손님들이 있어요."

'덕은 베푼 만큼 언젠가는 돌려 받는다'는 옛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장 사장이 아내의 말에 이어 "언젠가는 한 어르신이 성묫길에 낫을 사러 와서 하는 말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손잡고 여기와서 낫을 샀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내가 자식을 데리고 낫을 사러 왔다'고 해 같이 웃었던 일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 손 잡고 찾던 곳, 자식 데리고 온다

장원풍 사장이 옛날에 팔았던 농기구들을 찾아가지고 나오자 부인 소미화씨가 반가운 듯 환하게 웃고 있다.
 장원풍 사장이 옛날에 팔았던 농기구들을 찾아가지고 나오자 부인 소미화씨가 반가운 듯 환하게 웃고 있다.
ⓒ <무한정보>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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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가게의 가치는 이럴 때 새로워지는 게 아닐까. 반세기가 넘게 한자리에서 간판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추억을 간직한 문화적인 장소로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타 시군에 견줘 예산군에는 화교들이 유난히 많이 살았다고 한다. 내포에서 지역경제가 상대적으로 활성화됐던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나라이용원 이 사장은 "지금 정호빌라 자리가 화교학교 기숙사 자리인데, 한창 때는 학생수가 200명도 넘었어요. 아산, 홍성, 당진 등 인근에 사는 화교들이 예산으로 애들을 보냈으니까"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예산에 정착한 화교들은 산둥성 출신과 대만 출신들로 나뉘었는데, 서로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화교들이 운영했던 대표적인 예산지역 가게는 칠성전업사 옆 동생춘(중화요리 재료), 청우체육사 앞 천중반점, 파리바게트 자리 동화루, 삼선약국 자리 영태호 상점(중화요리 재료), 창성문구 위 영취성(철물점)과 동해장, 스와니커텐 바로 위 중국호떡집, 오리동 아리랑아이스케키 그리고 현재까지 성업중인 동흥대반점, 동원장 등 다양하다.

이렇게 많았던 화교들은 1970년대에 본국으로 들어가거나 미국, 캐나다 쪽으로 거의 다 떠났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철물점, #솥공장, #옛풍경, #화교,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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