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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야, 상철아. 내 새끼들. 어디 있니? 보고 싶다."

미국 오하이오 주의 한 작은 마을. 올해 77세가 된 박빈자 할머니의 아침은 눈물로 시작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그럴수록 단단해지는 그리움의 깊이. 박 할머니는 습관처럼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든다.

기억 저편에서 여전히 천진난만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 김상우, 김상철. 유일하게 간직한 자식들의 사진이다. 다시 한 번 눈가를 훔쳐내는 박빈자씨. 긴 회한을 토해내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녀의 기억에서 주름처럼 접혀있던 시간이 펴진다.

생때같던 아이들을 놓고 쫓겨나던 그날의 아픔

 소식이 끊긴 두 아들. 김상우, 김상철씨로 현재 59세, 57세다. 당시 홍릉초등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소식이 끊긴 두 아들. 김상우, 김상철씨로 현재 59세, 57세다. 당시 홍릉초등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 박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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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꽃보다 아름답고 생기 있던 시절. 박빈자씨는 한 남자를 만났다. 사랑이 뭔지도 알기 전에 아이가 생겼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두 살 터울의 아들 둘을 내리 낳았다. 1961년 둘째 아들을 낳고서야 간신히 혼인신고를 했다.

하지만 불화가 이어졌다. 시가에서는 박빈자씨를 며느리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절대 아이들을 내줄 수 없다며, 일방적으로 쫓겨났다.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다시 찾아가 사정하기를 여러 번.

남편은 "한 번만 더 찾아오면 죽을 줄 알라"면서 으름장을 놨다. 이발사인 남편의 서슬 퍼런 협박에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다.

마지막으로 1972년 몰래 집근처로 가 구슬치기를 하고 있던 아이들을 불러냈다. 옷을 사주고, 용돈을 주고, 사진을 찍었다. 현재 박빈자씨가 유일하게 간직한 사진이다. 눈물로 떠나는 발걸음, 영문도 모르고 해맑게 웃던 아이들의 얼굴이 아직도 어제 같다.

모든 걸 체념하고 떠난 미국, 하지만 잊히지 않는 기억들

 작년 9월 한국에 왔을 때 모습. 자식을 찾고 싶은 것이 생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박빈자 씨.
 작년 9월 한국에 왔을 때 모습. 자식을 찾고 싶은 것이 생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박빈자 씨.
ⓒ 박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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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떠나면 잊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흘렀다.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독일계 미국인이었다. 월남전에서 입은 상처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상처를 보듬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새 가정이 있었지만,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졌다. 다만 내보일 수 없을 뿐이었다. 마음의 병이 깊어서인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눈과 다리는 물론 심장 등 12번의 수술을 해야 했다. 지금도 그녀의 삶을 연장시켜주는 건 심장에 심어진 배터리 덕이다.

이런 박빈자씨를 두고 남편은 작년에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이제 그녀를 지탱시키는 건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뿐이었다. 한국에 있는 조카와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지난해 9월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고국을 찾았다.

쉽게 찾을 줄 알았던 자식들, 도대체 어디에...

 박빈자 씨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을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박빈자 씨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을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 박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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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만 오면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은 녹록지 않았다. 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 가족관계 증명서를 뗐다. 구청민원실과 관련부처에서 조회했으나, 자료가 나오지 않았다. 주민등록번호가 생긴 것은 1976년, 생년월일과 이름만으로는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두 아들 중 장남의 주민등록번호가 적혀 있었다. 조카 박광운(54)씨는 한걸음에 경기도 여주까지 달려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이중으로 전산 입력이 잘못된 경우였다. 혹시나 싶어 박빈자씨와의 만남을 주선했지만, 핏줄이 아닌 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정이 딱하다고 여긴 동사무소에서 외국 입양 및 고아원 등 자료를 찾는 데 도움을 줬지만 허사였다. 동대문 관할 동사무소, 구청, 경찰서 등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 경찰서에서는 당시 두 아들이 다니던 홍릉초등학교 자료를 찾아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어떤 기록도 나오지 않았다. 주변 초등학교까지 뒤졌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서울경찰청에서도 도움을 줬지만, 좋은 결과가 없다며 미안해하고 있다. 현재는 혹시나 싶어 과거 살던 동네는 물론 그 사이 사망한 전남편이 마지막으로 주거하던 동네에 플래카드를 걸어 둔 상태다.

죄 많은 어미의 심정, 죽기 전에 생사만 알 수 있어도...

 오른 쪽부터 박빈자 씨, 조카 박광운 씨, 박광운 씨의 아버지. 작년 한국을 찾았을 때 모습이다.
 오른 쪽부터 박빈자 씨, 조카 박광운 씨, 박광운 씨의 아버지. 작년 한국을 찾았을 때 모습이다.
ⓒ 박광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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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과 SNS가 발달한 첨단의 시대지만, 사람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그 사이 장성한 아들들은 장남이 59세, 차남이 57세가 됐다. 하지만 어머니 기억 속에는 아직 아이일 뿐이다.

사정이 어찌됐건 자라는 동안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는 박빈자 씨. 혹시 부담이 된다면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들을 수 있다면, 거기에 조금의 바람을 더한다면 먼발치서 바라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한다.

"단 하루도 눈물로 시작하지 않은 날이 없어요. 죄 많은 어미를 받아달라는 게 아니에요. 묻힐 곳도 정해놨고, 제 남은 삶은 이곳에서 마무리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다만 눈 감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어요."

덧붙이는 글 | 어머니 박빈자씨는 현재 59세인 김상우씨와, 57세인 김상철씨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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