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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 한 조각, 용기를 담은 손길>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부터 44년까지 3년간이나 계속되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그 배경이다.

당시 레닌그라드는 900일간 지속된 독일군의 포위 기간 동안 70만 명에 가까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이 배고픔과 전염병, 폭격으로 목숨을 거두었다. 5000개의 고성능 폭탄과 10만 개의 화염 폭탄이 투하되었다. 도시 전체가 15만 회 정도 폭격을 받아 500만 제곱미터의 주거지역이 초토화되거나 파괴되었다.

그 어떤 집도 안전하지 않았던 그곳에서 살아난 것은 기적이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 '전쟁을 이겨낸' 주인공, 열두 살 소년이었던 보리스는 가끔 평화와 자유 속에 사는 게 어렵다고 고백한다. 네덜란드 소설가 얍 터르 하르는 '전쟁을 잘 견딘' 보리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며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과 비참한 현실을 인류애로 승화시켰다.

<초콜릿 한 조각-용기를 담은 손길> 얍 터르 하르 지음, 유동익 옮김. 다림 출판
 <초콜릿 한 조각-용기를 담은 손길> 얍 터르 하르 지음, 유동익 옮김. 다림 출판
ⓒ 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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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 읽는 작품 중 하나라고 한다. 이 소설이 반세기 넘게 사랑받는 이유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함께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보리스의 아버지는 포위된 레닌그라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얼어붙은 호수 위로 물자를 수송하다가 목숨을 잃는다. 아빠의 죽음과 전쟁이라는 현실은 보리스를 애어른으로 만들어 버린다.

엄마의 충혈된 눈에서 공포와 근심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어른처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전쟁이라는 괴물이 열두 살 아이에게 준 고통스런 선물이었다.

마치 한국전쟁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엄동설한에 목숨 걸고 피난을 떠나야 했던 피난민들 속에 있던 아이들이 나이답지 않게 행동해야 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을 것이다.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여겼기에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열두 살이나 되고, 2년간 독일군의 포위 속에서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른이 된다." -13쪽

지독한 굶주림과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사람들은 거리에서 용변을 봐야 했다. 인간이 지닌 수치심은 이미 전쟁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은 지 오래였다. 보리스는 그 거리에서 물같이 싱거운 무 수프와 작은 빵 한 조각을 위해 줄을 서야 했다.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상황은 일상이 되고, 살아남아야 했기에 마침내는 적응하게 되는 전쟁이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배급받은 멀건 무 수프 냄비를 폭격 때문에 엎어버린 보리스는 친구 나디아와 함께 도시 밖으로 감자를 구하러 간다. 하지만 추위와 배고픔 때문에 나디아는 탈진하고 보리스는 어쩔 줄 모른다. 그때 둘 앞에 독일군들이 나타난다.

그 중 한 독일 병사가 배낭에서 소시지, 빵 그리고 초콜릿 한 조각을 떼어 나디아 입에 넣어 준다. 전투에서 자비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던 애어른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보리스로서는 일종의 가치관의 혼란을 겪게 되는 경험이었다.

"보리스는 전방 진지까지 데려다준 세 명의 독일 군인들을 생각했다. 군인이 된다면 그 독일 군인들에게도 총을 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구한 정찰대의 지휘관들에게 총을 겨눌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혼란스러웠다. 군인이 되는 일이 더 이상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 88쪽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적진까지 아이들을 데려다 준 독일군 지휘관은 "전쟁 중에는 모두가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우기 때문에 짐승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고 했다. 이어 그는 "그러나 아이들이 그 전쟁을 만든 건 아니라고, 아이들을 눈 위에 버려 둘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러시아 중위는 감사하다고 전하며, "이 야수 같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인간성마저 잃게 된다면 너무 비참할 것이다"며 경례한다. 독일군이 보여준 용기와 도움 그리고 인간적인 면에 경의를 표한 것이다.

탈진한 나디아와 보리스 앞에 나타난 독일군들과 그들과 대치하게 된 러시아군들 사이에 오간 대화는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긴장과 함께 가슴 속을 뜨겁게 하는 감동을 준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전쟁 상황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독일군은 보여주었다. 또한,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데려다 준 독일군들에게 무사히 돌아가도록 배려하는 러시아군의 모습 역시, 전쟁이라는 상황도 인류애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이라도 인류애를 무시했다면 서로 비참해지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평화란 어느 한 쪽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대한민국과 북한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를 믿고 평화와 동포애를 실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소설 속 군인들의 모습이 한없이 부럽고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독일군에게 초콜릿을 받은 보리스는 진짜 어른스러움이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줄 수 있는 아이가 된다. 지금까지 보리스가 전쟁을 이겨내도록 한 것은 독일군에 대한 증오였다. 그러나 증오를 갖고 파괴된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이제 보리스에게 독일군 지휘관은 친구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나디아를 구해 준 은인이었다.

보리스는 독일군의 도움을 받은 뒤 미움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배운다. 삶의 소중함과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레닌그라드 봉쇄가 풀리고 독일군이 패하여 포로로 끌려가고 있을 때, 보리스는 용기 있는 행동을 한다. 반역자라는 시선이 있을 것임을 감내하면서 말이다.

"보리스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어 그 병사의 슬픈 눈앞에 내놓았다. 그 순간 그 독일 병사의 눈이 빛났다. 포획된 동물처럼 부상당하고 겁에 질린 그 병사는 갑자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 어린 병사는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로 고마움을 표했다. 병사는 지나갔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감사의 마음으로 보리스는 독일 병사들을 쳐다보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었다." -194쪽

독일군에게 초콜릿을 받았던 보리스는 포획된 동물 같던 독일군을 사람으로 대했다. 이어지는 장면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적의 가득한 눈길을 줬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아주머니의 말 때문에 보리스의 행동을 수긍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보며 응원하는 한 아주머니의 말은 <초콜릿 한 조각-용기를 담은 손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응축해서 보여준다.

"증오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자유가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195쪽

<초콜릿 한 조각-용기를 담은 손길>은 늘 긴장관계에 있는 남북에게 상기시키는 바가 큰 소설이다. 동포끼리 서로 죽이지 못해서, 이기지 못해서 안달이니 말이다. 한국전쟁 이후 눈물이 마르지 않는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전쟁에서 이긴 자만 행복하고, 증오를 갖고 살아간다면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승자독식 세계에선 진정한 자유가 있을 수 없다. 이젠 서로 보듬고 살아야 할 때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뜬금없게도 <초콜릿 한 조각-용기를 담은 손길>을 읽고 난 후,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가 떠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 남북 당국은 서로를 발로 차 버릴 연탄재 취급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고, 이 소설을 읽고 정신 차렸으면 한다.


초콜릿 한 조각 - 용기를 담은 손길

얍 터르 하르 지음, 유동익 옮김, 다림(2017)


태그:#레닌그라드, #독일군, #러시아군, #증오,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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