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대립군>은 등장인물이 많은 전쟁영화이고, 전투장면도 볼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인물들 간의 갈등과 대립, 화해과정 같은 상호작용과 인물 내면의 감정 변화, 내적 성장 등이 더 돋보이는 섬세한 영화다. 원래 등장인물이 많은 영화는 각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기 쉽지 않지만 <대립군>은 주인공 외에도 여러 인물의 뚜렷한 성격과 감정선이 잘 드러나 있다. 좋은 시나리오를 만난 배우들도 그만큼 좋은 연기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영화, 시대의 부조리를 담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는 돈을 받고 남의 군역을 대신 섰던 '대립군'과 최근 들어 재평가가 활발한 비운의 왕 광해군을 결합해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 사이에서 균형이 잘 잡힌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면서 아직 어린 17세의 왕자를 세자에 급히 봉하고, 그에게 분조를 이끌라 명한다. 평안도 강계로 가서 신철 장군을 만나 그와 함께 의병을 모으라고 주문한다.

아버지의 애정과 인정에 목말랐지만, 미약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광해(여진구)는 주저하며 고을 수령 행차만도 못한 초라한 분조를 이끌고 여정을 시작한다. 이 길에 정규군도 아닌 대립군이 동행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영화의 전반부를 차지한다.

스토리는 완연한 허구이지만 전쟁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극한의 분위기는 영화 속에서 잘 살려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임란을 기록한 당시의 여러 문헌엔 세자가 비를 맞으며 풍찬노숙을 하기도 하고, 초라한 민가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고 쓰여 있다. 도성을 등지고 피란을 떠나는 왕의 행렬에 불과 100여 명이 따라갔다고 하니, 왕세자의 행렬은 그보다 초라했을 것이다.

영화는 이들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관객의 기대와 예측을 조금씩 배반하는 몇몇 장면들을 배치해 극에의 몰입도를 높인다. 소년은 아버지의 진심을 알고 슬퍼하기도 하고 '면천'을 바라고 세자를 호위했던 곡수(김무열)가 뜻밖의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신분제 사회와 권력자를 바라보는 하층민의 시각을 잘 드러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성난 백성들이 형조 장예원에 들이닥쳐 노비 문서부터 불태웠고 경복궁과 창덕궁 등이 왜군이 아니라 백성에 의해 소실됐다는 점, 임해군과 순화군을 백성이 직접 잡아 왜장에게 넘긴 점 등은 그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실이다. 영화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통찰력 있게 극 속에 반영시켰다.

변주된 역사 그리고 메시지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일행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에서 의문의 습격을 받고, 왜군의 추격을 따돌리기도 하고, 내부 갈등도 겪는다. 이렇게 영화는 나약하고 겁 많은 소년이 진정한 리더가 돼 가는 '성장'의 서사를 그린다. 생계를 위해 평생 국경지대에서 남을 대신해 싸웠던 토우(이정재) 일행도 생전 처음 자신을 위해서 싸우게 된다. 가장 비천한 밑바닥 인생과 고귀한 세자의 신분을 이어주는 것은 뜻밖에도 '동질감'이다. 토우 일행은 가족을 떠나 남 대신 군대에 와 있다는 점 때문에, 세자는 아버지 대신 분조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동병상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성장의 테마는 정윤철 감독의 전작인 <말아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동일한 주제의식이다.

특히 작품 곳곳에서 광해군이 아버지와는 달리 '백성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모습이 자주 나오는데, 이것은 현시대와도 맞닿아 있는 의미 있는 맥락을 드러낸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편리한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그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배신하지 않는다. 광해는 윤리적이고 유능하며 용기 있는 군주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작품은 지도자의 자질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고, 현시대가 바라는 지도자 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역설한다.

<선조실록>은 전쟁이 발발하자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약 16개월간 전국을 다니며 백성을 위로하고 관리들을 격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이 격문을 붙이자 산속으로 도망갔던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북쪽 끝 의주에 숨은 왕 대신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과 군량미를 모았고 다시 조정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 전쟁에 임할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인정하긴커녕 경계했다.

광해군은 구중궁궐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다 궁궐에서 죽는 여느 왕과는 퍽 다른 삶을 살았다. 전쟁을 겪으며 조선의 어느 왕보다 전국을 많이 다녔고, 왜군과 명군 양측에 시달리는 백성의 고달픈 삶을 직접 목격했다. 사람이 인육을 먹고, 명나라 군인이 게워놓은 토사물을 먹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고, 코가 베인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는 광경을 봤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훗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명과 후금(청)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중립외교를 펼쳤던 것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했다.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보고 겪은 그에게 성리학적 질서의 우월성이나 명분, 의리는 중요치 않았다.

영화는 또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게 대사량이 많은데, 대사마다 인물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적재적소에 잘 배치됐다는 인상을 준다. 대사가 또렷하게 잘 들릴 만큼 대사믹싱도 잘 됐다. 그동안 TV 드라마와 극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진 임진왜란에는 스펙타클하고 드라마틱한 장면이 여럿 있겠지만 <대립군>은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광해군의 임란 당시 모습을 선택해 그려냈다. 상대적으로 큰 예산과 물량을 들이지 않고도 전쟁의 한 장면을 비교적 잘 재현해냈다는 인상을 준다. 오는 3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영화 광해군 대립군 여진구 이정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