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눈 쌓인 산악을 배경으로 한 파사르가데 키루스 영묘
 눈 쌓인 산악을 배경으로 한 파사르가데 키루스 영묘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파사르가데는 어떤 곳인가?

파사르가데 가는 길은 황량하다. 높은 산에는 눈이 하얗고, 길가 밭에는 봄기운을 받은 밀이 자라고 유채가 노란꽃을 피우고 있다. 파사르가데는 해발이 1847m나 되는 고원지대에 있다. 그렇지만 산골짜기 곳곳에 너른 들판이 있고, 길가로 곡식이 자라고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을 흐르는 폴바르(Polvar)강 때문이다.

파사르가데는 자그로스 산맥의 동남쪽 산중에 있는 고도(古都)다. 파사르가데는 페르세폴리스에 비해 관광객이 적은 편이다. 그것은 파르스주의 주도(州都) 쉬라즈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 유적 대부분이 폐허로 남아있어 페르세폴리스나 낙쉐 로스탐만큼 감동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역사와 문화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파사르가데를 찾아간다. 그곳에 페르시아 초기 역사가 서려 있기 때문이다.

 왕궁터
 왕궁터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파사르가데에서 그나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키루스 영묘, 왕궁터, 성곽에 해당하는 탈레 탁트(Tall-e Takht)다. 키루스 영묘는 거의 완형으로 남아 있다. 넓은 들판 한 가운데 우뚝 솟은 적석총(積石塚)으로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키루스시대 궁전들은 상당히 훼손돼 주초와 기둥만 남았지만 과거의 영화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궁전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세워진 성곽 역시 과거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이들 문화유산은 걸어서 두세 시간 정도면 둘러볼 수 있다. 이 유적을 좀 더 짧은 시간에 보려면 전기차를 이용하면 된다. 주차장에서 차를 내리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키루스 영묘다. 키루스 영묘는 파사르가데의 하이라이트다. 넓은 평원에 우뚝한 모습이 신비스럽기 짝이 없다.

 성곽
 성곽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영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카라반사라이가 있다. 이것은 후대에 세워져선지 건물의 뼈대는 온전한다. 파사르가데 왕궁터는 키루스 영묘에서 1㎞쯤 떨어진 곳에 있다. 왕궁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왕의 거처로 사용된 궁전, 왕실 정원, 공식적인 업무를 보는 궁전, 출입 및 대기용 궁전. 이 왕궁에서 500m쯤 북쪽에 조로아스터교 신전 건물이 있다. 그리고 왕궁에서 신전을 지나 1㎞쯤 떨어진 곳에 성곽이 있다.

단순하면도 고귀한 키루스 영묘

 키루스 영묘
 키루스 영묘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키루스는 아케메네스를 제국의 반열에 오르게 한 위대한 황제다. 그래서 키루스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키루스가 페르시아의 왕이 된 것은 기원전 559년이다. 550년에는 메디아 왕국를 통합해 아케메네스 제국을 이룩했다. 547년에는 리디아 왕국을 정복했고, 546년경부터는 파사르가데에 왕궁을 짓기 시작한다. 539년 키루스는 마침내 바빌로니아 왕국을 정복해 4대국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다.

이를 통해 키루스는 중동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왕중의 왕으로 칭송받게 됐다. 더욱이 그는 정치적인 관용과 종교적인 포용정책으로 주변국으로부터도 큰 호응을 얻었다. 그 내용이 구약성서 <에즈라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그는 기원전 530년 박트리아 지역을 원정하다 죽고 만다. 키루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의 무덤을 이곳 파사르가데 궁전 옆에 만들었다. 

 키루스 영묘
 키루스 영묘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키루스 영묘는 기원전 540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530년 완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상 이 무덤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알렉산더 대제를 수행했던 그리스 사학자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다. 그는 이곳을 두 번 방문했으며, 무덤의 보존 상태와 묘비명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리스와 로마시대를 산 플루타르코스(Ploútarkhos)도 <알렉산더의 삶>에서 키루스 영묘에 적힌 묘비명을 언급하고 있다.

"당신이 누구든, 어디 출신이든, 이곳에 오리라는 사실을 난 안다. 나는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만든 키루스다. 그러므로 내 유해 위에 흙 한 줌 덮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라." 

 키루스 묘당
 키루스 묘당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키루스 영묘는 그 형태의 원형을 엘람시대 지구라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지만 리디아의 왕 알리야테스(Alyattes, 기원전 619~560)의 무덤 양식을 따랐다고도 한다. 영묘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계단 형태로 이뤄진 아랫부분이 7층의 기단으로 이뤄져 있다. 집 형태로 이뤄진 윗부분이 묘당을 이루고 있다. 묘당에는 벽과 문이 있고, 그 위에 지붕이 얹혀 있는 형태다.

묘당의 문 안쪽 한 가운데 석관이 안치됐고, 양 옆으로 테이블과 침상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테이블과 침상에는 태피스트리가 덮여 있었다고 한다. 묘당 안에서는 메디아산 예복, 바빌로니아산 외투가 발견됐고, 그 옆에 목걸이와 귀걸이 그리고 칼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카라반 사라이
 카라반 사라이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현실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위한 구조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성직자는 무덤을 지키는 근위병 겸 사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아리스토불루스의 기록에 나온다. 키루스 영묘는 지진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최초의 건조물이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2500년이 지난 지금도 단순하면서도 고귀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키루스 영묘에서 왕궁 쪽으로 가다보면 왼쪽으로 카라반 사라이를 만날 수 있다. 카라반 사라이는 원래 공적인 명령과 소식을 전하는 파발을 위한 사무소와 숙소로 건설됐다. 이것이 차츰 대상들에게 개방되면서 카라반 사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카라반 사라이는 키루스 시대가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모자파리드(Mozaffar)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키루스 실린더 이야기

 키루스 실린더
 키루스 실린더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키루스 실린더는 기원전 539년 키루스 대제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하고 내린 포고령을 담은 원통형 도기(陶器)다. 점토를 구워 만들었으며, 실린더 모양을 하고 있어 키루스 실린더로 불린다. 1879년 고고학자 호르무즈드 라쌈이 바빌론을 발굴하는 중 에사길라 사원에서 발견했다. 지름 11㎝ 길이 23㎝로 가운데가 약간 불룩한 원통 형태며, 그곳에 40행의 설형문자가 적혀 있다.

키루스 실린더는 현재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나는 키루스 실린더 복제품을 테헤란의 이란 국립박물관에서 봤고, 파사르가데의 기념품점에서도 볼 수 있었다. 또 이란을 소개하는 책자와 자료집에서 사진을 통해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몸통 부분 중 일부에 금이 가 있고, 문자도 마모된 부분이 5행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왕궁에 있는 키루스 대제 부조
 왕궁에 있는 키루스 대제 부조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키루스 실린더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빌로니아를 평화적으로 점령하고 난 키루스는 자신이 페르시아, 메디아, 리디아, 바빌로니아 4개국의 왕, 즉 왕 중의 왕임을 선언한다. 그리고 바빌론을 재건하는 정책을 펼 것을 다짐한다. 그는 또한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할 것을 천명한다. 더 나가 마르둑과 같은 신을 존중할 것임을 밝힌다.

그 때문에 키루스 실린더는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 평화선언, 종교의 자유선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모든 노예들은 석방되고, 외국으로 끌려간 포로들은 본국으로 송환돼야 한다. 둘째 종족, 언어,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백성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셋째 파괴된 사원은 복구되어 원래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이 내용을 100% 믿는다면 키루스 대제는 페르시아의 영웅이고, 평화의 사도며, 약하고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푼 고귀한 인간이 된다. 이러한 개방성과 관용성이 200년이 넘는 아케메네스제국의 역사를 가능케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키루스 실린더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이용된 측면이 있다.

 페르시아제국 2500주년 기념 공식 엠블렘
 페르시아제국 2500주년 기념 공식 엠블렘
ⓒ 이상기

관련사진보기


1960년대 말 팔레비왕이 키루스 실린더가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임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1971년 페르시아제국 250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기 때문이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가 키루스 선언과 함께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인권, 정의, 자유의 옹호라는 측면에서 그것이 인류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