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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당시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 생후 3일 만에 아버지 잃은 김소형씨, 위로하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당시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를 위로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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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던 이가 빠지면 이런 느낌일까. 마치 고래심줄 같던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이 드디어 경질되었다. 그는 이명박 정권 때부터 박근혜 정권까지 자그마치 6년 3개월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입지전적 인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추념식 때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에 맞선 '투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박근혜 탄핵과 구속에 버금가는 기뻤던 순간이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를 빗대 큰 사건만 나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한다며 국민들을 탓하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을 '종북'으로 낙인찍는 등 온갖 망언을 일삼았다. 나아가 전국 초중고교에 호국안보교육 전담 교사를 배치해 '나라사랑' 교육을 시키겠다며 호언하기도 했다. 사드 배치를 결정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벌어진 것에 대해 미국 측에 송구하다고 말해 여론의 뭇매를 자초하기도 했다.

박근혜가 물러나니 거짓말처럼 세월호가 떠올랐듯이, 박승춘이 경질되니 5.18 공식 지정 추모곡인 '임을 위한 행진곡'이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9년이라는 참람한 세월을 견뎌내고 이제 언제 어디서든 눈치 보지 않고 목 놓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이 가져온 '선물'이기에 앞서, 지난 겨우내 이어진 '촛불 혁명'의 빛나는 성과이다.

보수정권이 집권한 지난 9년 동안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비롯한 5.18이 겪어야했던 온갖 수모는 역사의 퇴행을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됐다. 이미 대법원의 준엄한 심판과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사건임에도 폭동 운운하며 기어이 흠집을 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정권은 사실상 이를 묵인하고 방치했으며, 박승춘의 국가보훈처는 그러한 정권의 충직한 나팔수였다.

전교생 강당에 모아놓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후임 국가보훈처장으로 임명된 피우진 예비역 중령은 '애국가도, 임을 위한 행진곡도 씩씩하게 부르겠다'고 약속했다. 정권의 심기 경호에 목매달았던 구태에서 벗어나 보훈이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일각에서는 민주, 인권, 평화라는 5.18 정신을 3.1 운동처럼 아예 헌법 전문에 삽입해야 한다는 요구까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37주기를 맞은 올해 5.18은 학교도 예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학교마다 전교조 등 뜻 있는 일부 교사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던 계기교육이 올해는 대규모 행사처럼 치러지고 있다. 이곳 광주광역시의 경우, 초중고교 교문마다 일찌감치 추모 현수막이 내걸렸고, 다채로운 5.18 주간 행사를 마련했다며 가정통신문을 배포한 학교도 여럿이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도덕이나 역사 수업시간에 짧은 동영상을 시청하고 서로 소감을 나누거나, 각 학교 학생회 임원이 학생 대표 자격으로 5.18 국립민주묘지를 찾아 헌화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수업과 학사일정에 지장을 줄까봐 눈치 보며 조심스러워하곤 했다. 몇 개월 만에 애먼 볼을 꼬집고 싶을 정도로 격세지감이 든다.

5월 18일 당일을 통째로 할애해 주먹밥을 만들어 나누어 먹는가 하면, <화려한 휴가> 등 관련 영화를 함께 보거나 백일장과 음악회를 여는 곳도 있다. 이달 27일까지 이어지는 5.18 주간에 추념식에 참석한 문 대통령의 13분짜리 기념사를 활용해 학급별 계기수업을 할 계획이라는 학교도 있다. 나아가 전교생을 강당에 모아놓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한다는 곳도 있다.

대통령 직함 꼭 붙이는 아이들, 이건 최고의 찬사

정권 교체를 이끌어낸 촛불은 또 다시 마중물이 되어 진실을 밝히기 위해 37년 전의 기억을 끌어올리고 있는 셈이다. 아예 세월호 희생자 추모 주간과 연결지어 4월 16일부터 5월 18일까지를 'REMEMBER 세월과 오월' 기간으로 지정 운영하고 있는 학교도 있다. 국가의 무능과 폭력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을 미래세대 아이들이 영원히 기억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지난 17일 저녁, 광주 금남로에서 열린 5.18 전야제에 다녀왔다는 한 아이를 만났다. 그는 그 자리에 함께한 세월호 유가족을 보며 세월호와 5.18이 서로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진실 규명 노력에 힘을 보태겠다고 의연하게 말했다. 5.18과 5.16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세대라지만, 그 역시 올해 5.18은 주변의 공기부터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우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새 대통령에 신뢰를 보냈다. 말끝마다 문재인이라는 이름 뒤에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꼬박꼬박 덧붙였다. 반말과 욕설이 일상이 된 아이들의 입에서 대통령이라는 말이 덧붙여진다는 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들이 건네는 최고의 찬사다. 지금껏 또래 친구들과 대화 중 어느 누구도 문재인, 세 글자만 부르는 경우는 없었단다.

하긴 과거 이명박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부를라치면 아이들은 친인척이라도 되느냐며 직함을 떼라고 아우성이었다. 대통령이라는 직함은커녕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어색하다며 부러 동물에 빗대기도 했다. 공중파 방송은 물론 보수 언론과 종편이 앞 다퉈 호위무사를 자처했지만, 부도덕하고 무능했던 두 전임 대통령은 아이들에게조차 조롱거리로 전락해버렸다.

아이들의 입에서 떠난 '일베식' 용어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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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에 비친 가장 놀라운 변화는 바로 '일베'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을 꼽았다.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면서, 흔히 '관심종자'로 불리던 '일베충'은 물론, '일베' 사이트 자체가 아이들의 관심에서 시나브로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베'가 친구들 간 대화 꺼리의 주요 공급원이었지만, 이젠 그런 분위기를 느끼기 어렵다는 거다.

예년 같으면 이맘때쯤 5.18을 왜곡하고 유가족들을 폄훼하는 글과 조작된 사진들로 '일베' 사이트가 떠들썩했을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도 그런 '배설물'들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긴 해도, 열어본 아이들의 수도 적고, 반응 또한 예년과는 사뭇 다르다고 한다. 종류도, 분량도 많이 줄었지만, 아이들의 '리액션'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 많던 '일베충'들은 다 어디 갔을까.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베' 사이트를 들락거렸던 친구들 중 여럿이 발길을 끊었다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일베'는 더 이상 '일베'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일베충'의 주력이 고등학생들로 알려져 있는데, 지난 겨우내 광장을 밝힌 촛불을 보며 그들 역시 서서히 공감 능력을 회복해가는 신호라고 그는 애써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한때 그도 '종북 좌빨'과 '빨갱이', '홍어' 등 '일베'식 은어에 혹해 5.18의 의미를 폄훼하고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재미에 잠시 빠져들기도 했단다. 그것이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이며, 유가족을 향한 패악질인 줄 뻔히 알면서도 친구들끼리 모이면 으레 그렇게 놀았단다. 하지만 요즘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리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보수'란 이름이 '종북'보다 더 싫다는 아이

아이들의 입을 떠난 그런 말들을 되레 어르신들이 애용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도 광장에서 태극기를 손에 쥔 채 탄핵 반대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어르신들이 부르대는 구호마다 등장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조차 '일베'가 과거 정권과 한 몸처럼 움직였으리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보수'라는 이름이 '종북'보다 더 싫다는 아이도 있다.

이것들이 새 세상의 징후라면 '촛불 혁명'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당선 이후 연일 파격 인사와 소통 행보로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과연 '촛불 혁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37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이 지나도록 숨죽여야 했던 5.18의 진실이 끝내 밝혀지리라는 희망이 부풀고 있다. 그 여정에 세월호가 동반될 것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사족 하나. '대통령 한 명이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이 180도 달라져 보인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이러다 학교에도 '문재인 팬클럽'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의미다. 대통령은 이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태그:#5.18, #문재인 대통령,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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