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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7일 새벽, 강남 한 상가 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30대 남성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평소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는 게 살인의 이유였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이 애석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 찼고, 추모의 글과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문구들이 적힌 포스트잇이 나붙었습니다. 그 후 1년, 2017년의 대한민국은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1주기를 맞아 이 사건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봅니다. [편집자말]
스티브 맥퀸 감독의 영화 <셰임>과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수작 <님포매니악>은 섹스 중독자, 이른바 '색정광'인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제의식을 공유한다. 이 작품들 속 주인공은, 섹스, 그것도 다양한 방식의 파트너 섹스, 마스터베이션, 포르노그라피 등을 통해 성욕을 해소하려 몸부림친다. 그들의 욕구 해소 과정이 그저 쓸쓸하게 그려지는 이유는, 그들의 성행위가 사랑의 감정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일 테고, 그로 인한 외로움의 정서가 두 주인공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섹스를 통해 얻고자하는 '쾌락'이라는 담백한 목표가 닮은, 이 두 주인공의 유일한 차이점은 성별이다. 문득 두 작품을 한 번 병치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영화 속 어떠한 장면에 있다. <님포매니악>의 주인공 '조'는 여성이고, 매일 더 큰 성적 쾌락을 찾아가며 하루를 보낸다. 조는 어떤 흑인 남성 두 명과 동시에 섹스를 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조가 익명의 섹스 상대에 두려움과 위협을 느끼는 모습이 처음으로 그려진다. 불어를 쓰는 그 남자 둘이 어떠한 이유로 싸우기 시작한 것이고, 싸움이 격해지자 나체 상태로 있던 조는 옷을 갖춰 입을 겨를도 없이 맨 몸에 코트만 걸치고 방을 후다닥 도망쳐 나온다.

물론 영화의 초점 자체가 이 부분에 맞춰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나랑 섹스하는 여자'인 조가 처할 수 있는 위험을 극화해서 연출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그저 슬쩍 지나가는 이 장면에 눈길이 간 이유는, <셰임>의 섹스 중독 남자 주인공 '브랜든'의 경우와 분명한 대비를 보였기 때문이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뻔한 서사일 테지만, 건장한 백인 남성인 브랜든은 익명의 누군가들과 섹스를 즐기면서도 한 번도 위험에 처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두 영화 모두의 대단한 지지자인 나는, 이 차이를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다.

'Guilty Pleasure(길티 플레져)'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죄의식을 동반하지만, 했을 때 즐거운 일'이라는 말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남한테 이야기하기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막상 하고나면 즐거운 일을 뜻하는 단어다. 직독직해 하자면 '죄책감을 느끼는 기쁨' 정도랄까? 언뜻 보면 아이러닉한 단어이지만, 이 단어는 사실 여성의 삶 전체를 관류하는 열쇠라 할 수 있다.

여자 섹스 중독자인 조에게 성행위는 길티 플레져다. 남자 섹스 중독자인 브랜든에게 성행위는 길티 플레져가 아니다. 그저 온전한 기쁨이다. 모르는 사람이랑 섹스를 하다가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조'의 경우를 앞서 언급하기는 했지만, 여성 안전의 논의는 사실 여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여성들에게는, 섹스도 아니고, 그저 밤길을 홀로 걷는 것조차 길티 플레져가 된다.

'야밤에 여자가 겁도 없이...' 이건 잘못된 말이다

여자가 혼자 밤길을 걷는 것조차 두려워 해야 한다면 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여자가 혼자 밤길을 걷는 것조차 두려워 해야 한다면 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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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혼자 걷는 여자". 이 풍경에서 떠오르는 진부한 수사학 몇 가지가 있을 터. '위험할 텐데', '누가 안 데려다주나?'. '야밤에 여자가 겁도 없이...'. 개인이 여성을 혐오해서 저러한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저러한 걱정을 하게 만든다. 여성인 나 역시도, 밤에 홀로 걷는 다른 여성을 보면 저런 걱정을 하게 마련이고, 밤에 홀로 걷는 나 자신에게도 깊은 걱정을 건네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밤길은 여성들에게 걸어서는 안 될 길이 되었고, 밤은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한 시간이 되어버렸다. 여성들의 일상은 밤으로 확장되지 못했고, 밤이라는 시공간에 여성인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유죄의' 행위가 되었다. 그 시공간에 들어서고자 한 여성들 중 몇은, 일면식이 있거나 일면식이 없는 남성으로부터 폭력의 경험을 선사받았다.

지난해 5월 17일, 우리는 한 명의 여성을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잃고 나서야 일상의 두려움을 수면 위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이 지점에서,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불어온 페미니즘의 열풍을 마냥 긍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날에 한 명의 여성, 그 이전에 수많은 여성들을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살해)'에 의해 떠나보내야했고, 그래서 나는 그들 앞에 고개를 꼿꼿이 들 수 없다. 왜 우리 사회는 항상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해야만 변화하는 것인가.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들의 변화는 '여성으로서의 자기 범주화'라는 단어로 응축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 스스로를 여성으로 온전히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생물학적 여성이고, 스스로를 여성이라 정체화한 '시스젠더 여성'이다. 그렇지만 나는 처음 만나는 누군가에게 내 자신을 소개할 때, "아, 저는 여자이고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자리는 "00학교에서 뭐를 공부하고 있는 0살 누구입니다"가 대신한다. 여성이라는 나의 성별 정체성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학교, 나이, 전공보다 미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면서 여성의 정체성을 느끼는 몇 안 되는 순간은, 그저 이성애자인 이성이 로맨스 향기 물씬 나는 추파를 던지는 순간들 뿐이었으리라.

하지만 5월 17일 이후,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소개하는 일이 많아졌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여성인 내가 느끼는 두려움에 공감해 달라는 절규에 가까운 호소였다. 한번은, 친애하는 한 남성 지인이 '강간범의 눈에 뜨이기 쉬운 차림새' 따위의 것을 알려준 적이 있다. '포니테일 헤어를 하지 말아라. 머리채를 잡아끌고 가기 쉽다'라는 식의 기가 차는 내용이었다. 한심한 텍스트였지만, 나는 이것을 전달해준 그 남성이 한심하다거나 '여혐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잘못, 그러니까 성범죄 피해의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그 텍스트를 내게 건넨 잘못을, 혼내기 보다는 감정적 연대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친구야, 나는 여자야. 내가 여자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너도 알지만, 여자인 내가 겪는 밤길의 두려움은 나만 알 수 있을 거야. 너는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 '강간범 눈에 띄지 않는 꿀팁' 따위를 건넸겠지만, 내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야. 공감. 네 친구인 나는 여자고, 여자인 네 친구는 밤마다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을 경험한다는 것. 그 두려움이 실체화되어 목숨을 잃은 여성들이 많다는 것. 우리는 서로의 손가락을 느슨하게 잡고 분노의 반경을 넓혀가야 한다는 것. 동의하고 공감해줄 수 있니?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말했다. "그날 이후,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어요". 처절하게 슬픈 자기범주화. 이 말이 이제는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 편히 밤공기 마시며 맥주 한 캔 마시고 싶다

지난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 지난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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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길티 플레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여성들의 늦은 귀가와 밤마실에만 사회적 죄의식이 가미되는 것은 아니다. 원하는 옷을 입는 것(짧은 치마), 공중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몰카), 게임을 즐기는 것(게임 내 여혐), 데이트를 하는 것(데이트 폭력),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하는 것(디지털 성범죄)과 같이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들 모두가 길티 플레져가 된다.

여성을 혐오하는 것은 사회인데, 죄의식에 빠지는 건 여성 스스로다. 강남역 사건에 대해 경찰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조현병 환자의 광기"라고 판단했듯, 누군가는 여혐 사회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명백히 존재하는 문제를 두고 단어만 없애는 건, 사회가 무능하다는 증거다. 무능한 사회는 끝끝내 여성 혐오의 흔적은 지워가면서, 여성 스스로가 '네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고 돌려 돌려 말한다. 내 자신을 사랑하기가 힘든 시대다. 언제 죽어버릴지 모르는 사회에서, 내 자신을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우리 여성들은, 길티 플레져가 아닌 '무죄의 기쁨'을 누리길 원한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자취방 앞 벤치에서 맥주 한 캔 따먹고 싶고, 사랑하는 친구와 헤어질 때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을 이제는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다. 가로등은 더 밝아지고 울타리는 더 높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 혐오를 온몸으로 체화한 남성들이, 더 이상 여성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난 17일은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1주기다. 그저 투명해보였던 민주시민 중 일곱 남자는 살아남고, 한 여자는 죽고, 또 다른 한 남자는 살인범이 되는 그 장면을 목도했던 우리의 절규엔, 여전히 물기가 가득하다. 고인의 명복을 간절하게 비는 매 순간은, 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무겁고도 서늘하다.


태그:#강남역10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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