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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울고 나니 조금 낫네요."

김혜진씨의 목소리엔 아직 눈물과 한숨이 섞여있었다. 5월 5일, 그날은 함께 단식농성하던 콜텍 이인근 지회장이 건강 악화로 병원에 실려 가던 날이었다. 그와는 2008년에도 함께 양화대교 근처 송전탑에서 고공농성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골다공증이 있던 이인근 지회장의 농성 참가를 만류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서울 광화문 광고탑 위에 농성하는 다섯 명의 노동자들의 마음도 비슷할 것이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서러운 노동자의 삶을 되돌아봤으리라. 공장에 있을 때는 저임금에 쉬는 것도 제대로 못 쉬더니, 쫓겨나서는 먹지도 못하며 거리에서 나뒹굴어야 하는 게 노동자의 삶….

그들을 고공단식 농성이라는 극한투쟁으로 내몬 건 이 나라의 반(反)노동정책과 철저하게 기업주와 재벌의 편에만 서는 정치 때문임을 잘 안다. 그럼에도 자책을 떨쳐내기 어려운 건 그만큼 동료가 덜 아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정부의 정리해고제 도입으로 시작된 잔혹사

 광화문 인근 광고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혜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공투위원장
 광화문 인근 광고탑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혜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공투위원장
ⓒ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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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5월 8일)로 단식 25일째다. 단식으로 더 낮아진 목소리를 들으니 그녀를 처음 만났던 20여 년 전 태광하이텍 구로공장의 마당이 생각났다. 입사한 지 몇 년 되지 않았던 그녀가 태광하이텍 노조위원장이었다. 투쟁 선포식에 모인 200여 명의 구로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공장마당에 있던 살구나무의 살구를 나눠먹곤 했다. 무척이나 달았던 살구, 살구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웃던 노동자들…. 이제 그 공장은 사라졌다.

1973년 6월 설립된 태광하이텍, 지금의 하이텍알씨디코리아는 모형비행기나 모형헬기의 무선 원격조종기를 만들고 판매하는 순수 국내자본 기업이다. 노조파괴를 시도한 10년 동안 적자가 없었으며 기업규모는 5배나 성장했다. 하이텍은 현재 세계 80개 나라에 제품을 수출하고, 일본·중국 등에 해외 판매법인을 신설했고 독일에는 멀티플랙스라는 동종업체를 인수할 정도로 컸다.

그런 회사가 정리해고의 칼날을 휘두른 건 1998년 정부가 정리해고제를 도입하면서부터다. 회사가 필리핀 공장 가동을 시작한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인데 수출기업인 하이텍은 환차 수익이 컸지만 '경영상의 이유'로 대규모 정리해고를 시도했다. '경영상의 위기'가 있으면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정리해고제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회사는 국내에는 연구소와 본사만 남기고 생산공장을 임금이 싼 필리핀으로 옮기려 했다. 너무 흔한 이야기다.

노조는 이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1998년은 순진한 많은 노동자들이, 언론보도와 정부의 여론몰이와 법에 휘둘려 명예퇴직을 받아들이던 때였다. 하이텍에서도 30% 감축하겠다고 하니 노동자들은 알아서 권고사직서를 썼다. 단기순이익 200%, 박천서 회장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받은 주식현금배당 250억 원에 이를 정도였지만, 경제위기 운운하며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나가라고 했다. 싸움 끝에 정리해고는 막았다.

지주회사도 만드는 등 기업규모는 커졌지만 노조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노동자들에 따르면 박천서 회장은 "10억 원이 들든, 20억 원이 들든 노조를 없애겠다"고 공언했다고 한다. 2006년에는 노조원만 구분해 별도 배치하고 CCTV로 집중 감시해 국가인권위로부터 시정 권고를 받았다. 이러한 차별 행위로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이 발병한 노조원 12명은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집단 산업재해' 판결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강제력이 없는 인권위 권고는 회사에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형사처벌이 있지만 사측이 받은 벌금은 100만 원이 전부다. 사장 구속 등 강력한 제재가 없는 현행 노동법은 고양이 목의 방울만한 역할도 기대하기 어렵다

2007년 또다시 구조조정 바람이 불었다. 그해 9월 해고자들이 고등법원의 판결로 복직되자, 회사는 두 달 뒤 5천만 원짜리 (주)에이치엔드엠 프로덕션이라는 법인을 설립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고용을 보장할 테니 신설법인으로 적을 옮기라고 제안했다.

업체가 바뀌는 거라 노조는 사라지고, 작은 규모의 업체라 적자구조를 만들기 쉬어 정리해고도 가능하다. 노조는 '속이 뻔히 보이는 생산공장 폐쇄와 노조파괴 시나리오'라고 받아들였다. 임금을 올려주겠다는 제안에도 조합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회사는 전적(轉籍)을 거부한 조합원들에게만 1년 동안 휴업을 명령하고 비조합원들에게만 일을 시켰다. 아니러니하게도 1년 뒤인 2008년 12월 사측은 비조합원들만 정리해고 했다. 이후 회사는 분사법인을 없애고 13명의 조합원들을 다시 하이텍알씨디코리아로 복직시켰다. 2009년 1월 대법원의 부당해고 판결로 해고노동자들도 복귀했다. 2011년 5월11일 임금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나무가 뽑히고 공장이 무너지고 꿈이 부서지다

그렇게 노조탄압이나 생산공장 폐쇄 시나리오가 일단락되는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구로공단은 공식명칭인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에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고 아파트형 디지털업체들이 들어섰다. 최근 공단이 '공단구조화'라는 이름으로 부동산투기바람을 부채질했고 그 바람은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동자들에겐 공장매각으로 나타났다. 2014년 회사는 공장이전을 통보하더니 2015년 9월 구로공장을 매각했다. 공장부지를 팔면 돈이 남는다고 생각한 기업주는 독산동에 새로운 공장을 만들고 그곳으로 옮기라고 했다.

회사는 정리해고와 공장 폐쇄 의도가 없다고 밝혔지만 조합원들은 생산라인 폐쇄의 마지막 수순으로 봤다.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서울지부 남부지역 구자현 지회장과 신애자 분회장이 철탑 고공농성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4월 18일 용역 직원과의 충돌 이후 한계에 부딪쳤고 본사 타격투쟁으로 전환했다.

그러자 싸움의 방향을 놓고 조합원들 사이 이견이 생겼다. 할 만큼 했다는 조합원들과 그렇지 않다는 조합원들. 오랜 시간 함께해온 사람들 간에 마음이 갈라졌다. 김혜진씨는 몇 달 동안 사측이 제안한 독산동으로 가는 건 사측의 시나리오에 넘어가는 거라고 지회와 조합원을 설득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장이전을 반대하는 그녀와 조합원 한 명은 계속 싸우기로 했다. 투쟁사업장 공동투쟁단이 2016년말 정부종합청사에서 박근혜 퇴진 시국농성을 하면서 하이텍 노동자 두 명은 '하이텍알씨디콜리아 공동투쟁위원회 추진위'를 구성했다.

"20년을 일했던 공장이 부서질 때 마음이 무너지는 거 같았어요. 공장에 있던 벚꽃나무며 살구나무며 뽑히는 걸 보니 제 꿈과 영혼이 부서지는 거 같았어요. 더 가슴 아픈 건 그 일로 함께 몇 십 년을 같이한 사람들끼리 상처를 입은 거지요." 

이선희가 부른 노랫말처럼 "한바탕 웃음으로 모른 체 하기엔" 너무나 큰 상처였다. 40년 된 꽃나무들이 뽑히고 공장이 무너진 날, 노동자들은 20년~30년 일하던 자신들의 청춘이 사라지는 것처럼 아팠을 것이다. 그녀들의 노동이, 웃음이, 눈물이, 고통이 아롱아롱 배였던 공장건물, 벚꽃나무, 살구나무... 그리고 동료들의 꿈.

단식을 밥 먹듯 하다

 김혜진 지회장이 머무르고 있는 고공농성장.
 김혜진 지회장이 머무르고 있는 고공농성장.
ⓒ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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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조가 여기저기 만들어졌을 무렵인 1988년 태광하이텍노조도 만들어졌다. 구로공단에 형성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운동)의 흐름에도 함께 했었다. 그 힘이 현재의 민주노총으로 온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비타협적 극한투쟁을 많이 했다.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공동투쟁위원회'에 있는 조합원 이용신씨는 말한다.

"김혜진 동지가 단식한 게 벌써 7번째예요. 워낙 곧은 사람이니 앞장서는 일이 많아요."

그야말로 굶기를 밥 먹듯 했다. 그렇다고 몸이 단식에 익숙해질 리는 없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2009년엔 단식후유증으로 많이 아팠다. 장염, 위염. 기관지염 등 온갖 염증을 달고 다녔을 뿐 아니라 실어증처럼 기억력이 심각하게 감퇴해 말하기 힘들었다.

김혜진씨의 말마따나 "어차피 단식이란 게 몸을 갉아먹는" 거다. 몸뚱이를 갉아먹던 공장이나 몸뚱이를 갉아먹는 싸움이나 다를 게 있나 싶어 씁쓸하다. 알러지와 천식이 있는 그녀의 몸 상태는 고공에서 제대로 씻지 못하고 기력이 떨어지면서 더 악화되고 있다. 의사선생님들이 올라오지만 단식이고 고공이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가족들 모두가 그녀의 고공단식농성을 알고 있지는 않다. 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알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공장에서 단식할 때, 어머니는 그녀가 죽을까봐 박천서 회장과 담판 짓겠다며 찾아오던 든든한 지원군이다. 언니와 조카들도 지난해 말 박근혜 퇴진 촛불에도 오고 광화문정부종합청사 앞 농성장에도 왔었다. 어머니는 박근혜도 물러났는데 이제 그만 싸워도 되지 않냐고 했다. 그럴 수 없다고 했다. 회사는 날로 커가는데 노동자들은 쫓겨나는 현실이 억울했다. 무엇보다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노동자들의 삶이 바뀌는 게 아니라고 말했더니 어머니도 수긍했다. 

게다가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문제는 투쟁사업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한때 영화미술팀에서 일했던 20대의 조카는 얼마 전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PD였던 고(故)이한빛씨의 죽음 소식이 남일 같지 않았다. 이모인 그녀에게 속상하다고 했다. 방송계의 노동강도가 얼마나 센지, 외주화는 얼마나 심한지 등등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의 싸움은 조카의 삶과 관련이 있다. 아니 노동소득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회사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자를 수 있고, 그 자리에 비정규직으로 채울 수 있도록 만든 정리해고제나 비정규직 제도를 폐지하지 않는 한, 일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세대를 넘어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밑에 있는 동료들에게 당부한다. "한바탕 울고 다시 굳건하게 싸우자"고.

우리가 그/녀들의 고공단식농성에 연대하는 이유는 그/녀들의 싸움이 처절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나무가 뽑히듯 기업주 마음대로 일하는 사람들의 꿈을 빼앗지 못하는 세상을 만들고픈 우리 모두의 열망 때문이다. 그 열망이 우리를 매일 저녁 7시 농성장으로 불러들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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