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예능, 유혹의 기술> 저자 이승한 TV 칼럼니스트

책 <예능, 유혹의 기술> 저자 이승한 TV 칼럼니스트 ⓒ 이승한


우연한 계기로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승한 TV 칼럼니스트의 글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기회를 얻게 됐다. 그는 당시 만날 때마다 내게 지겹도록 어떤 프로그램이 어떤 이유에서 재밌는지를 (심지어 내가 보지도 않은 프로그램을) 설명하곤 했다. 그때도 그는 지금처럼 변함없이 TV를 끼고 사는 사람이었다.

TV를 켜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해도 뜨지 않은 새벽녘 일어나 다른 프로그램을 보려고 채널을 돌린다. 어찌 보면 조금은 팍팍한 일상. TV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도 TV를 보는 일 자체가 직업이 되면 어떨까? 이를 테면 세월호 참사 같은 스스로 추스르기 어려운 뉴스를 접한 날 집에 돌아와 칼럼을 쓰기 위해 '웃긴'(실은 하나도 웃기지 않은)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일 같은. 그는 매순간 TV를 봐야 하는 직업에 대해 난처함을 토로하곤 했다. TV를 보고 글을 쓰는 일은 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는 걸 그를 통해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이승한 TV 칼럼니스트는 <한겨레> 토요판에 등장하는 이 '터번' 사진으로 더 알려져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승한 TV 칼럼니스트는 <한겨레> 토요판에 등장하는 이 '터번' 사진으로 더 알려져 있을 것이다. ⓒ 한겨레


<한겨레>를 통해 이승한의 글을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그는 여성·인종·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담은 글을 여러 편 연달아 내기도 했다. 이를 테면 불편한 상황을 '좋게 좋게'만 풀어가려는 '유느님'에 대해 비판한 날이면, 댓글란은 난리가 나곤 했다. 그는 그럼에도 크게 개의하지 않고 성심성의껏 비판하는 편을 택했다.

몇 년 전부터 책을 낸다고만 하고 미루고 미루다 해를 넘기기 일쑤였던 그가 낸 첫 번째 책은 <예능, 유혹의 기술>이다. <예능, 유혹의 기술>은 '먹방'부터 '쿡방' 혹은 '눕방', 또 최근 범람하는 나영석 류의 '여행 방송'까지, 소위 '잘 나가는' 예능 프로그램들은 어떻게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사실 '유재석에서 나영석까지, 예능 최강자의 행보에서 배우는 기획의 기술'이라는 책 뒤표지부터 다소 의아했음을 미리 밝힌다. 유재석을 가열차게 비판하던 사람이 이제 와서 유재석의 성공을 분석하겠다니? 이런 의문점을 갖고 그를 만났다. 그는 "(모순으로 보일 수 있는) 부분도 의도를 하고 책을 냈다"고 밝혔다.

"유재석은 늘 '더 낫게' 실패해왔다"

 책 <예능, 유혹의 기술>

책 <예능, 유혹의 기술> ⓒ 페이퍼로드


- 책 <예능, 유혹의 기술>은 예능의 '기획'에 관한 책이다. 어떻게 제대로 '기획'을 해야 시청자들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을 수 있는지를 분석했는데. 이 책의 기획은 어떻게 이뤄졌는지 궁금하다.
"사실 다른 기획이 있었다. 출판사가 원했던 건 예능을 이끌어가는 나영석 같은 피디를 인터뷰하는 대담집이었고, 나는 한국 예능에서 의미 있는 실험이나 성취를 거둔 작가들을 만나 인터뷰를 내고 싶었다. 물론 세부적인 부분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해보자 싶어 덤벼들었다. 그런데 단순하게 좋은 작가들을 인터뷰한다는 기획 말고 디테일한 콘셉트나 섭외, 인터뷰 횟수 등에 대한 기획을 거의 못했다. 막연하게 이런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거지. 서로 서툰 부분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 기획은 엎어지게 됐다.

일단 책을 만들어보자고 했으니 어떤 책을 쓸까 고민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하려던 인터뷰 기획이) 왜 안 됐던 거지? 왜 망한 거지? 그런 반성을 하게 됐다. 기업 경영을 하는 사람들은 경영 사례를 통해 기획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정책 기획을, 창업가들은 프랜차이즈 성공과 실패 사례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나는 주로 예능을 보고 글을 쓰니 외부에서 바라본 성공과 실패 사례를 분석해서 성공하는 기획은 무엇이고 어떤 기획은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를 다뤄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은 기획에 대한 실용서인 동시에 비평서이고, 또 반성문이다. '내 기획은 왜 망했는가'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책이니까."

- 평소에 자주 쓰는 글과는 달리 이 책에서는 "성공한 사람들도 다 이유가 있어서 성공했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일견 자기개발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의도를 하고 기획됐다. 지금껏 예능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인물론을 중심으로 쓰기도 했고(<한겨레>에 연재 중인 '술탄 오브 더 티브이'에서) 어떤 콘텐츠가 사회에 파장을 불러오고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 다루었는데 그렇다면 (비판의 대상이 됐던) 이런 콘텐츠를 제작자들은 '어떤 고민을 통해 만드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좋은 작품 하나를 남기고 커리어가 꺾이는 피디들도 있지만 끊임없이 유의미한 진전을 이끌어내는 피디나 작가들도 분명 있다. 유재석이나 나영석 같은 좋은 성과를 만드는 사람들들도 있고.

우리는 결과물만 보고 얼마나 뛰어난지에 대해 칭찬한다. '역시 유느님' '과연 나피디' 이런 식으로. 그들이 어떤 국면에서 어떤 행보를 취했는가에 대해 분석한 글은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자신의 기획을 성공시키는지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보고 싶었다."

 KBS <해피투게더>의 유재석

그는 '1인자 유재석'에 대해 지면으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 KBS


- 유재석 이야기가 나왔으니, 유재석에 대해 비판을 하면서도 이 책에서는 유재석의 성공에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는데.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
"오늘날 신성불가침적 영역에 도달한 유재석이 보여준 퍼포먼스에 대해 비판하는 것과 과거에 그가 어떤 실패를 반복하면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는지를 분석하는 건 전혀 다른 것이다. 유재석이 여성 출연자라든지 나이를 많이 먹었는데 아직 미혼인 연예인을 놀리는 태도라든지, 물론 유재석이기 때문에 악의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심리적 문턱을 덜커덕 하고 넘는 순간이 있다. <예능, 유혹의 기술>은 그럼에도 평소에 하던 비판보다 이 사람들의 성공 비결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유재석만이 아니라 이 책에서 칭찬한 사람들을 다른 칼럼에서 매섭게 비판한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거다.

우리 세대는 올려다 볼만한 멘토가 없는 세대다. 멘토라고 해서 우르르 몰려가 보면 '너희들이 노력을 안 해서 그래'라고 말하든지 사실은 학력을 위조했다든지 그런 사람들이 즐비하다. 보고 배울 롤모델이 많지 않다. 여기서 예능을 롤모델로 삼으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장 가까운 TV에서 어떤 건 성공하고 실패하는지, 이들이 실패를 어떻게 딛고 일어나는지 힌트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유재석이 거듭 실패를 하면서 올라온 과정을 소개했는데 그가 그만큼 남들보다 많은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2000년대 초반, 유재석이 프로그램을 말아 먹어도 계속 기회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특A급 엠시는 아니었다. 유재석은 그보다 기회를 얻기 위해 <진실게임>이랄지 다른 프로그램의 성과를 지렛대 삼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들이 밀었던 사람이다. 유재석은 '더 낫게' 실패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기반을 만들어야 했던 사람이다. 유재석은 프로그램을 하다가 망했는데 한 번 더 해보자고 마냥 들이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프로그램에서 '나는 이만큼 시청률을 견인할 수 있고 그러니까 이거 한 번 더 해보자'고 끊임없이 말했던 사람이다."

나영석의 성공 전략, 결국은 '콘텐츠'

 tvN <윤식당>

tvN <윤식당> ⓒ tvN


- 나영석의 경우 해외 영화의 이미지를 예능으로 가져와 비슷하게 차용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의 성공 전략을 어떻게 보았나?
"나는 표절 문제는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더 지니어스> 같이 유사점이 크지 않다고 본다. 나영석 피디나 이우정 작가가 자신이 보고 접했던 대중문화 콘텐츠의 기호를 따서 자신의 작품 안에 갖다 놓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건 나도 동의하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그렇게 가져온 요소 대비 이들이 만드는 예능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얼마나 되는지를 봐야 하는 것이다. 왜 비슷한 프로그램이지만 <마마도>는 흥하지 못하고 <꽃보다> 시리즈는 흥했을까? 단순히 네임밸류가 있기 때문에 잘 된다는 이야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영석이 tvN으로 이적하고 <꽃보다>를 발표하기까지 6개월이 걸렸는데 그 당시 나영석 피디에 대해 비관론이 많았다. '본인이 <1박2일>이라는 브랜드 안에 있었기 때문에 잘 된 거지 혼자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같은 회의론. 또 <꽃보다> 시리즈를 성공시키고 <삼시세끼>를 만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리왕 서진이라고 농담 따먹기나 했던 걸 진짜 프로그램으로 만들었네?'라면서. 결과적으로 둘 다 성공을 거뒀지. 어느 정도 과대평가 된 부분도 없진 않지만 그럼에도 나영석이 콘텐츠 없이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은 아니다. 이 사람이 과대평가 됐다는 이유로 이 사람이 만든 콘텐츠 전체에 대한 유효성을 탄핵할 필요는 없다."

'한끼줍쇼' 이경규-강호동, 23년만에 동행하는 규동형제 방송인 강호동과 개그맨 이경규가 19일 오전 서울 상암동 JTBC사옥에서 열린 JTBC 새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 제작발표회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식(食)큐멘터리' <한끼줍쇼>는 숟가락 하나만 들고 길을 나선 이경규와 강호동이 시청자와 저녁식사를 함께 나누면서 식구(食口)가 되어가는 모습을 통해 평범한 가정의 저녁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예능 프로그램이다. 19일 오후 10시 50분 첫 방송.

▲ '한끼줍쇼' 이경규-강호동, 23년만에 동행하는 규동형제 ⓒ 이정민


- 책 속에서 강호동과 이경규가 출연하는 JTBC 예능 <한끼줍쇼>를 토크쇼로 분류한 것은 다소 의아한 측면이 있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밥을 얻어먹기 위해 탐색하고 문전박대 당하는 걸 예능적으로 사용했다가 맨 마지막에 어느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면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대화를 나누는 것. <한끼줍쇼>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앞의 모든 장면들은 그 뒤의 '고갱이'를 위해 무리수를 던진 것이다. '식탁에 밥 차려 놨으니 먹고 가라'는 게 아니라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을 찾는 것이다. 갑자기 불쑥 찾아온 사람에게 밥을 주겠다면, 물론 이경규랑 강호동이지만 (웃음) 이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오늘 보낸 하루는 어땠는지를 묻게 된다. 나는 JTBC 토크쇼에 분명한 흐름이 있다고 보았다. <톡투유>나 <말하는 대로> 같은 스튜디오 안에 들어오지 못했던 사람을 들어오게 하고 말수가 적고 리액션만 하던 사람들에게 마이크를 주고. '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해주세요'라고 청하는."

- 한국의 예능사를 책을 통해 쭉 훑어봤는데 앞으로 어떤 예능 포맷이 잘 될 것 같나?
"그것에 대해 장담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사기꾼이다. (웃음) 10년 동안 여기서 일을 하면서 배우고 확신하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앞으로 어떤 종류의 예능이 뜨고 어느 구석에서 어떤 것이 성공을 거둘지는 1년 뒤가 아니라 당장 내일도 확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경규처럼 방송 경력이 35년이 넘는 사람은 척척 예언도 한다. 그 안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이니까.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한 번 이야기해보자면, 이미 지금도 각광받는 종류의 예능이지만 '한국 사회에 산적한 갈등을 직시하고 해결방안을 이야기하는 종류의 쇼들'의 인기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미 <마녀사냥>이랄지 <비정상회담>이랄지 JTBC가 이런 포맷으로 재미를 본 바 있고 지상파로 이런 흐름이 옮겨와 교양으로 다뤄야 할 분야를 예능의 문법으로 다루는 EBS <까칠남녀> 같은 프로그램들. 정치·경제적이나 젠더이슈까지 보자면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분화된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공포 정치로 눌렀고 공포 정치가 끝난 다음 사람들의 불만이 수면 아래 있었고, 어떤 민중이 자기가 가진 정치적 힘이랄지 개개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눈을 떴는데 그 권리를 개인 차원에서 현실로 옮길 수 있는 경제 사정이 되지 못할 때 사회적 갈등이 일어난다.

예능은 결과적으로 당대 욕망의 반영이다. 그래서 각자 억눌린 욕망 같은 걸 반영하는 쇼들이 인기가 있었다. 독신 가구의 외로움을 달래는 '먹방'이나 '노령 예능'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예능의 화법으로 넌지시 반영한 건데 이제는 그런 식의 욕망 반영으로 만족하지 않고 각기 다른 의견이 어떤 식으로 충돌을 하고 어떤 식으로 접점을 찾아가는가를 지켜보는 것이 '시대의 엔터테인먼트'가 될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간에 다음 5년은 갈등을 봉합하고 봉합하는 과정에서 청산할 것이 있다면 어떻게 청산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홍준표가 되면 그런 거 안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가 거기에 쏠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다."

 책 <예능, 유혹의 기술>의 저자 이승한 TV 칼럼니스트

책 <예능, 유혹의 기술>의 저자 이승한 TV 칼럼니스트 ⓒ 이승한



예능 유재석 나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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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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