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카레라이스를 만들기 전엔 위를 최대한 비워 놓는다. 일단 밥에 비벼서 한 그릇, 카레만 가득 담아 또 한 그릇, 이렇게 두 번 먹어야 성에 차기 때문이다. 건더기가 잔뜩 들어가 포만감도 끝내준다. 서너 시간 정도는 소화를 시키느라 낑낑대면서도 두 그릇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어렸을 때 카레는 특식 중의 특식이었다. 콩나물 100원어치 사오라는, 귀찮기 그지없는 심부름을 이틀 걸러 한 번은 했으니, 우리집 밥상은 늘 그렇고 그랬다. 고기는 언감생심이고 어쩌다 '오뎅(어묵은 느낌이 안 산다)' 사오라는 말이 떨어지면 그야말로 가게까지 줄달음쳐 숨을 헐떡이며 "아줌마, 오뎅 주세요!"를 외쳤다.

카레라이스
 카레라이스
ⓒ 심혜진

관련사진보기


카레를 하는 날엔 이런 심부름 따윈 하지 않았다. 엄마가 양손 가득 장을 보는 특별한 날(아마도 아빠 월급날), 장바구니에 돼지고기가 담긴 드문 날 엄마는 카레를 끓였다. 이런 날엔 밖에서 놀다가 엄마가 부르기도 전에 미리 집에 들어와 손발을 씻었다. 카레 냄새를 맡으며 저녁상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설렘을 느끼기 위해서다.

엄마는 큰 냄비에 채소와 고기를 한꺼번에 넣고 그야말로 한 솥 가득 물을 부었다. 재료가 익으면 카레 두 봉지를 물에 개어 넣었다. 재료를 볶지 않은 대신 식용유를 한 번 휘둘러 섞었다. 이걸로 다섯 식구의 두 끼 정도는 뚝딱 해결했다.

엄마에겐 고민이 있었다. 나와 위아래로 두 살 터울인 언니와 남동생은 이 맛난 카레에 불만이 많았다. 언니는 돼지고기가 씹히는 게 싫었고, 남동생은 양파가 거슬렸다. 언니는 고기를, 남동생은 양파를 빼주길 바랐다. 둘 다 빼면 감자와 당근만 남는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카레는 당시의 엄마에겐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느 날 엄마가 큰 결단을 내렸다. 카레에서 돼지고기를 뺀 것이다. 하지만 정작 고기를 빼달라던 언니는 "맛이 이상하다"며 카레를 먹지 않았다. 고기는 사라지고 싫어하는 양파는 여전했으니 동생도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먹성 좋은 나만 그럭저럭 군소리 없이 먹는 통에 엄마에게 칭찬까지 들었다. 물론 나도 고기를 넣은 게 훨씬 좋았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다음번엔 동생의 바람대로 양파를 넣지 않았다. 물컹한 양파가 빠진다니, 나도 반가웠다. 그런데 웬걸. 어떻게 된 것이 고기를 안 넣었을 때보다도 맛이 형편없었다. 양파가 단맛을 낸다는 건 한참 후에 알았다. 양파, 감자, 당근, 고기는 간단한  재료로 카레 맛을 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다음부터 엄마는 돼지고기에서 비계를 없애는 데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들였다. 양파조각도 더 작게 잘랐다. "입맛들이 달라 음식하기 힘들다"는 엄마의 하소연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후 고기나 양파를 빼달라는 말은 사라졌다.

카레 한 그릇에도 이렇게 서로 다른 욕망이 얽혀 있다. 내겐 맛있기만 한 카레인데 자꾸 불만을 말하는 언니와 동생을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렴풋하게 느낀 것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넣는다고 해서 맛있어지는 것도 아니고, 싫어한다고 빼버리면 전체의 조화를 망칠 수 있다는 걸.

다양한 욕구가 모두 이뤄지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의견을 나누고, 가능성을 따져보고, 상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 마냥 거슬리기만 했던 고기와 양파도 존재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을 이해하고 난 후의 카레는, 같은 재료로 만들었음에도 분명 이전과 다른 것이었다.

삼십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카레를 즐긴다. 새우나 오징어를 넣기도 하고, 때론 채소만으로 냄비를 채운다. 파프리카, 양배추, 애호박, 버섯, 시금치, 토마토, 가지, 브로콜리 등 그날 냉장고 채소 칸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내용물이 달라진다.

두부를 구워 깍둑 모양으로 썰어 넣으면 씹는 맛이 좋은 채식카레가 된다. 어릴 때보다 식성이 더욱 좋아져 무엇을 넣어도 맛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맛있는 건 돼지고기와 양파, 감자, 당근만 들어간 카레이다. 작은 민주주의를 체험한, 어린 날의 그 카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카레라이스, #카레, #단짠단짠그림요리, #요리에세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 쓰고, 글쓰기 강의를 합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