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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사생활과 관련해서 우리 한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프랑스인들은 대통령의 사생활에 상대적으로 관대하고, 미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엄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언론이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의 사생활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은 그만큼 지도자의 도덕성을 엄격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론이 지도자의 개인 생활을 물고 늘어지다 보면, 지도자들이 도덕성에 조금은 더 신경을 쓰게 된다. 하지만 미국 언론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다른 배경이 있다. 지도자의 도덕성을 중시해서 그런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초창기 미국 역사에서 기인하는 면이 더 크다. 상호 비방전 위주로 전개된 초창기 미국 대통령선거의 전통이 그런 식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우리는 정책선거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가 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 대선에서는 그런 게 드물었다. 미국 역사 초창기인 19세기 전반에 이 나라 대선에서 크게 이슈가 된 쟁점이라면 '연방 중심으로 갈 것이냐, 주 중심으로 갈 것이냐', '노예제 확대를 찬성할 것이냐, 반대할 것이냐' 정도였다. 몇몇 사례를 빼면, 미국 대선에서는 이슈 대결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슈 대결 찾아보기 힘들었던 미국 대선

그런데 '노예제 확대를 찬성할 것이냐 반대할 것이냐'가 아니라 '노예제를 유지할 것이냐 폐지할 것이냐'가 쟁점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최대 이슈가 된 186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의 입장은 '노예제를 더 이상 확대하지 말자'는 것이고, 민주당 후보인 스티븐 더글러스의 입장은 '노예제 확대를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860년 2월 27일, 링컨은 뉴욕 맨해튼의 쿠퍼 인스티튜트라는 사립대학에서 가진 강연회에서 "우리는 노예제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지금 상태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습니다"라며 "이 나라에 노예제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한 부득이함 때문에 그 정도의 양보는 불가피합니다"라고 말했다. 노예제를 필요악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와 공화당이 '노예제 확대 반대'에서 '노예제 폐지'로 선회한 것은, 이 문제를 두고 남북전쟁(1861~1865년)이 벌어진 뒤였다. 

5달러 지폐 속의 링컨.
 5달러 지폐 속의 링컨.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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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 대선은 그나마 정책선거의 양상을 띠었지만, 이 선거에서도 상호 비방전이 빠지지 않았다. 이때는 링컨의 큰 키와 더글러스의 작은 키를 놓고도 양측 비방전이 대단했다. 링컨은 193cm였다. 더글러스의 경우에는, 본인이 주장하는 키와 남들이 말하는 키가 달랐다. 본인은 162는 된다고 말했지만, "어림도 없다. 152도 안 될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경우든 간에, 더글러스의 키는 남자 평균보다 현저히 작았다.

민주당은 멕시코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텍사스주 휴스턴시에서 발행되는 <텔레그래프>지를 통해 "링컨은 하나의 골격에 매달릴 수 있는 것으로서는 가장 길쭉하고 마르고 보기 흉한 팔다리와 네모나고 야윈 얼굴을 달고 있다"고 비방했다. 이에 맞서 공화당은 더글러스를 두고 "키라고 할 것도 없는 5피트(152.4cm)에다가 옆으로 벌어진 지름도 그 키만큼 된다"며 "붉은 얼굴, 짧은 다리, 불록 나온 배를 갖고 있다"고 욕했다.

이런 유형의 공격은 그나마 귀여운 편에 속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색깔론 공격이 초창기 미국 대선에도 있었다.

1800년 미국 대선에서의 색깔론

1800년 대선이었다. 미국 역사상 네 번째로 대통령을 뽑는 선거였다. 현직 대통령이자 연방당 후보인 존 애덤스와 현직 부통령이자 민주공화당(민주당의 전신) 후보인 토머스 제퍼슨이 맞붙었다. 연방당은 상대적으로 연방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민주공화당은 상대적으로 '주'의 이익을 중시했다.

미국은 식민지 본국인 영국과의 전쟁을 거쳐 독립을 획득했다. 그래서 초창기 미국에서는 영국에 대한 경계심이 상당했다. 민주공화당은 이 점을 활용해서 연방당 애덤스 후보를 공격했다. 애덤스가 자기 아들을 영국 왕 조지 3세의 딸과 결혼시키려는 계획을 품고 있다고 선전했다. 

그렇게 결혼시킨 뒤 미국에서 왕조를 세우고 영국과 합병하는 게 애덤스의 속셈이라고 민주공화당은 주장했다. 애덤스를 친영주의자로 몰아세웠다. 요즘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종영주의자로 몰았던 것이다.

존 애덤스.
 존 애덤스.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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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론이 민주공화당의 의도대로 달아오르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었던 민주공화당은 좀 더 화끈한 색깔론을 준비했다. 색깔론에다가 섹스 스캔들을 결합시키는 방법이었다. 대한민국 수구 정당들도 아직 시도해보지 못한 '야릇한 색깔론'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민주공화당이 내놓은 색깔론 2탄은 이랬다. 애덤스가 러닝메이트인 찰스 핑크니를 영국에 보내 미모의 영국인 첩을 네 명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중 두 명은 애덤스의 첩이 되고 나머지 둘은 핑크니의 첩이 됐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식으로 표현하면, 상대 당 후보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사돈을 맺고 나라를 북한에 바치려 하는 것도 모자라, 북한에 사람을 보내 미모의 북한 여성들을 첩으로 데려왔다는 식으로 선전한 것이다.

색깔론에 성 추문까지...

물론 이 역시 흑색선전이었다.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애덤스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역사작가 조셉 커민스가 쓴 <한 표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라는 책에 의하면 애덤스는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핑크니가 내 몫을 숨기고 네 명 다 차지한 모양이군"이라고 반응했다. 자신은 그런 여성들을 본 적이 없다는 뜻을 우스갯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커민스의 책은 한국에서는 <미국 대통령선거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민주공화당만 색깔론을 만든 게 아니다. 연방당도 마찬가지였다. 연방당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서양인들에게 주는 경외심과 공포심 중에서 후자를 이용해 민주공화당 제퍼슨 후보를 공략했다.

커민스의 책에 따르면, 연방당은 뉴욕 위쪽인 코네티컷주의 신문을 이용해서, 제퍼슨이 프랑스 혁명을 숭배한다는 기사를 내놓았다. 기사에서는 "여러분의 집이 화염에 휩싸이고 여성들의 정절이 더럽혀지고 아이들이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지켜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프랑스 혁명을 좋아하는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면 그 혁명 때의 파괴적 상황이 미국에서도 연출될 것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제퍼슨.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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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론을 포함해 흑색선전과 상호비방이 난무한 1800년 대선의 승자는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섹스 스캔들이 가미된 야릇한 색깔론 공격을 애덤스한테 가한 제퍼슨 측의 승리로 끝났다.

색깔론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였는지는 측정할 수 없지만, '프랑스 혁명을 숭배하는 제퍼슨이 되면 미국도 프랑스처럼 혼란스러워질 것'이라는 공격보다는 '애덤스는 영국 왕과 사돈을 맺고 나라를 영국에 바치려 하고 있으며, 미모의 영국인 첩들까지 데리고 있다'는 공격이 유권자들의 관심을 좀 더 끌었을 수도 있다. '야릇한 색깔론'을 거리낌 없이 제기한 쪽이 승리를 거뒀던 것이다.

미국 정치 악습까지 답습한 한국 대선

초창기 미국 대선이 이렇게 유치했던 것은 19세기 전반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 당시에는 여성은 물론이고, 재산과 납세액이 없는 사람에게도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유권자 대부분은 중산층 백인 남성이었다.

이로 인해 정당들이 중산층 백인 남성의 표심에 집중하다 보니, 정책선거를 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은 정당 간에 차별성이 생기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주요 정당이 두 개밖에 안 됐기 때문에 정당 간의 차별성이 심화될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들이 유권자들의 관심을 끄는 확실한 방법은 색깔론이나 흑색선전 등을 통해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허무맹랑하고 황당한 비방전이 많이 나왔던 것이다. 이 같은 미국 정치의 악습이 미국 정치를 답습하는 한국에도 1945년 미군 주둔 이후로 전파됐다. 이런 것이 아직도 한국 대선의 질적 수준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태그:#색깔론, #대통령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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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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