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잘 만든' 연극, <프라이드>가 다시 돌아왔다.

'잘 만든 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프라이드>는 자주 거론되는 극이다. <프라이드>는 명실상부하게 잘 만든 극 아닌가. 인물들은 보편적 인권을 넘어서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대사들은 아름답다. 자연스럽게도 이는 넓고 두꺼운 팬층으로 이어졌다. 아마 배우들도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는 다들 아는 것 같다. 이번 <프라이드> 삼연에는 이전에 공연했던 이명행, 배수빈, 정상윤, 오종혁, 정동화, 박성훈, 임강희, 김지현, 이진희, 이원, 양승리 배우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박은석 배우까지 '깜짝' 투입되며 기대감을 높였다.

<프라이드>가 한국에서 처음 공연됐던 것은 2014년이었다. 원작 <프라이드>가 처음 공연됐던 것은 2008년이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프라이드>는 여전히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그 시간 때문일까, <프라이드>에는 분명 아쉬움도 느껴진다. 그 아쉬움에 대해서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시기가 된 것 같다.

여전히 가려진 젠더들

 연극 <프라이드>의 리허설 당시 촬영 이미지.

ⓒ 연극열전


<프라이드>는 전형적으로 성 이분법을 따르고 있다. '게이'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외엔 '이성애자' 실비아가 등장하여 자신의 이성애 연애 이야기를 한다. 인물들은 대부분 '시스 젠더'(사회가 지정한 성별과 스스로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이다. 필립은 남성 배우가 연기한다는 점에서 이미 남성성을 수행하고 있고, 올리버 또한 마찬가지다. 실비아 역시 그렇다.

1막 2장, 멀티 역의 배우가 연기하는 '남자' 캐릭터가, 이전의 서사들이 시스젠더 남성 인물을 그려내던 방법과는 다르게 표현된 캐릭터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 인물이 시스젠더였더라도 문제고 시스젠더가 아니었더라도 문제다. 시스젠더였다면 이 극은 모든 인물의 성을 시스젠더로 전제했기에 문제고, 만약 시스젠더가 아니었더라면, 이 인물이 다뤄지던 방법은 전형적으로 우스꽝스럽고 희화화된 맥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편의 연극이 모든 소수자성을 대변할 수는 없다. 이 연극은 고작 180분의 러닝 타임을 가졌을 뿐이다. 그래도 이 극은 <프라이드>다. 성 소수자 축제인 '프라이드'에서 이름을 따온 그 '프라이드'.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나서는 소수자는 게이만이 아니다. 조금 더 넓은 소수자성을 대변해야 했을 필요는 분명 존재한다.

실비아에 대하여

 연극 <프라이드>의 리허설 당시 촬영 이미지.

ⓒ 연극열전


극작을 공부하던 한 지인은, 실비아는 등장할 수 있는 '가장 잘 만든' 여성 캐릭터일 거라 얘기했다. 이해가 된다. 실비아는 분명 처음 등장했을 즈음의 시점에서 보면 획기적인 캐릭터였다. 1958년 이후 변화되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페미니즘적' 맥락을 지닐 수 있다. 남편인 필립과 친구 올리버의 행복만을 바라던 사람에서, 내가 제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변하는 실비아. 또한, 현재 시대의 실비아는 기존의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하던 방식, 남성 주인공과의 이성애 관계로 엮이지도 않는다. 이는 1958년도의 실비아와도 비교되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실비아를 보다 보면 여전히 찝찝한 기분이 남는다. 왜 그럴까, 스스로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었을 때 가장 거스른 대사는 바로 이 부분이었다.

"어, 근데 더 짜증나는 건 기지배들이 무슨 게이를 친구로 두면 지가 센스 있고 괜찮아 보이니까 자꾸 허영을 부려. 그! 그 XX할 놈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랑 <섹스 앤 더 시티>가 기지배들 다 망쳤어!"

어떤 맥락에서 실비아가 이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의도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 대사 자체가 깔끔해지는 것은 아니다. 저 대사 속 '기지배들'은 결코 좋은 맥락으로 이야기되지 않았다. 이는 실비아가 그 후의 대사에서 '걔네들 나쁜 애들 아니야'라고 변호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다. 한 개인의 값어치로 측정될 수 없는 가치, '프라이드'를 이야기하는 연극 <프라이드>에서 이런 대사가 사용됐다. 올리버를 '도맷값에 팔고', '물건에 대한 취향 그거로만 정의를 내리고 가치를 매기는' '기지배들'은 상당히 비하적인 맥락이다. 특히 올리버와 같은 게이들을 벽지도 잘 골라주고, 쇼핑도 같이 다녀준다는 이유로 친구로 사귄다고 이야기하는 그 기지배들은 더더욱.

나는 이 실비아의 대사를 통해서 왠지 익숙한 화법을 기억해냈다. 오늘날 소위 '명예 남성' 같은 단어로 불리는 사람들의 화법과도 비슷하다. 물론 온전히 실비아를 그 '명예 남성' 부류의 여성 인물이라 정의할 수는 없다. 올리버가 게이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퀴어 프렌들리'한 이성애자 여성 인물이라고 옹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 대사 속에서 실비아는 퀴어 프렌들리할지는 몰라도 여성 혐오에 대한 인지는 부족한 것 같다. 저런 식으로 '기지배들'을 '후려치는' 것은, 일종의 '김치녀 신화'를 연상케 한다.

만들어진 서사 속의 캐릭터는 실제의 한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캐릭터는 의도적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그러기에 어떤 서사를 봄에 있어서 기존의 여성성을 정확히 수행해내는 캐릭터는, 그 맥락을 따져보고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게 소위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으로 넘어가더라도 말이다. 서사를 볼 때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그 창작자가 기존의 여성성을 재생산해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비아는 여전히 여성성에 갇혀있다. 1958년도의 실비아는 철저히 여성성을 수행하고 있다. 그녀는 아이를 갈망한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 필립의 곁을 지키고 올리버를 미워하지도 않는다.

현재의 실비아는 뭐가 그렇게 다른가. 그녀는 열심히 그리고 철저히 헤테로 여성으로서 남자 친구를 사랑한다. 그녀가 올리버에게 하는 대부분의 대사는 마리오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게 아니라면 올리버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도와주는 대사뿐이다. 그뿐인가. 실비아는 여전히 아이를 갖길 원한다.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아이기에, 그게 신이 자신에게 주는 축복이라면 감사히 기쁘게 받겠다고 한다. 물론 실비아가 실제의 삶에 존재하는 여성 1이라면 그녀는 그냥 아이를 정말로 좋아하여 엄마가 되기를 바라는 여성 1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비아는 서사 속에서 만들어진 인물이다. 아무리 현실적인 인물이라 해도, 그녀는 허구성을 통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과 인권도 바뀌는 현재의 시점에서, 실비아가 꼭 그렇게 말하고 행동해야 했을까. 여성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아이'라고, 또 한 번의 어머니 성을 재생산해낸 건 아닐까.

1958년도의 실비아는 '성녀'였다. 그렇다면 2017년도, 현재 실비아의 모습은 달라졌는가. 나는 실비아의 모습을 '확장된 성녀상'에 포함된다고 정의하고 싶다. 그녀는 여전히 올리버와 필립을 돕는다. 혼자 여성 인물이고 그 속에서 타인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1958년도의 실비아가 마지막으로 하는 독백에서도 이어진다. 그녀는 지독한 우울감에 시달리지만, 필립과 올리버에게는 '괜찮아요'라고 위로한다. 왜 홀로 존재하는 여성 인물을 그런 식으로 설정했을까. 그야말로, '괜찮다' 같은 말은 부드러움 등을 오랜 시간 상징해왔던 '여성성'을 수행해온 '여성' 인물이 해야 한다는 발상이 아니던가.

현대 실비아와 필립, 올리버의 일종 연대로 비칠 수도 있겠다. 젠더 권력을 지니지 못한 여성과 성 소수자인 두 인물의 연대 말이다. 그런데 왜 그 연대는 여성 인물이 '괜찮다'라고 위로를 하며, 두 사람의 연애를 자신의 연애까지 뒷전으로 하며 도와야 이뤄지는가. 왜 유일한 여성 인물로 설정된 실비아에게 그런 역할을 부여했고 설정했는가. 왜 여전히 2017년 실비아의 중심 서사는 올리버를 돕는 것일까.

<프라이드>의 가치, 그리고 더 나은 <프라이드>를 위해

 연극 <프라이드>의 리허설 당시 촬영 이미지.

ⓒ 연극열전


물론 그렇다. 현재의 관점에서 봤을 때 조금 올드할 뿐, <프라이드>는 여전히 가치는 있는 극이다. 솔직히 2017년 지금도, 성 평등이 이뤄진 시대는 아니지 않은가. 여전히 현시대는 강력한 이성애 가부장제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여전히 젠더 권력은 명확히 차이를 보인다.

다른 극의 서사만 봐도 그렇다. 전형적인 창녀/성녀 이분법에 빠져 있거나, 여성의 목소리 자체를 아예 지워버리고 남성 중심으로만 이야기를 진행하는 극이 허다하지 않은가. 분명 <프라이드>는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현재'의 이야기를 매 공연이 진행되는 실제의 연도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프라이드>는 스스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 공연은 영속성 따위를 지니지 못한다. 차라리 연출적으로 '현재'의 이야기를 그저 시간이 흐른 어떤 시점으로 설정했더라면, 예컨대 그 시간을 한국에 초연됐던 2014년으로 멈췄더라면 어땠을까.

다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라이드>는 분명 잘 만든 연극이다. 지나치게 신비로운 분위기가 극 중 인물들을 어느 정도 타자화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존재하기는 한다.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소수자에 관해 이야기하며 소수자의 존재를 드러내는 건 분명 의미가 있다. 객석을 나오는 관객들에게 "괜찮아요"라는 말을 직접 해줌으로써, 관객들을 위로하는 것 또한 그렇다.

하지만 만약 <프라이드>가 10년 후나 20년 후, 2027년의 필립, 올리버, 실비아나 2037년의 필립, 올리버, 실비아가 되려면, 조금 슬프지 않을까? 이미 지금도 조금은 '올드'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이 서사가, 10년·20년 후에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이면 말이다.

프라이드 페미니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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