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봄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미 앞서 가버린 봄도 있다.
▲ 벚꽃 봄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미 앞서 가버린 봄도 있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아직 봄을 제대로 맞이하지도 못했는데 봄이 서둘러 간다.
은은한 봄빛을 그토록 그리워했는데, 정작 봄이 오니 삶의 분주함 속에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못하고 보낸다. 봄은 봐야 맛인데 말이다.

올해는 나라안팎으로 큰 사건들이 줄지어 이어지면서 봄을 향한 시선을 빼앗았다. 게다가 뿌연 미세먼지는 봄나들이를 가로막았다. 창문을 열면, 상쾌한 공기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미세먼지가 들어와 공기청정기를 붉게 충혈시켰다.

연록의 새순이 봄햇살에 빛나고 있다.
▲ 연록의 새순 연록의 새순이 봄햇살에 빛나고 있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차일피일 미루다가는 봄을 다 놓쳐버릴 것 같았다.
세상사 내가 마음먹을 대로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도 세상사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가는지 나도 모르겠다. 오지랖 넓게도 나랏일에 왜 그리도 관심이 가는지, 관심을 갖는만큼 마음은 답답하다.

불법을 저지른 자들이 잘못을 모르고, 저마다 자기가 이 나라를 위기로부터 건져낼 적임자라 하고, 여전히 무지몽매한 민중들을 선동하는 이들은 넘쳐나고, 이에 편승하는 이들도 넘쳐나니 봄이 왔어도 봄이 온 것 같지 않았다.

은행나무의 새순이 몽글거라며 올라온다.
▲ 은행나무 은행나무의 새순이 몽글거라며 올라온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그래도 봄이니까, '조금씩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모두가 함께 애써 피운 봄인데 저마다 피어난 꽃을 자기의 몫으로 삼으려 하고, 묵묵히 봄을 피워낸 이들은 또다시 침묵의 계절을 맞이해야만 하는 것인지 싶어 마음 한 켠으로는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그래도 자기 안에 품은 것들을 하나 둘 피워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극명하게 하는 자연처럼, 자신만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적임자라는 이들의 속내도 하나 둘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니 이것도 봄일까 싶다.

사철 푸른 대나무도 봄에는 더욱 싱그럽게 빛난다.
▲ 대나무 사철 푸른 대나무도 봄에는 더욱 싱그럽게 빛난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실망도 하고 희망도 품는다.
어차피 봄이 오는 길이 평탄한 것만도 아니고, 봄이 온들 다 좋은 것만도 아닌데 무슨 기대를 그토록 많이 한단 말인가?

어차피 봄이 와서 피어나도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꽃들이며, 애써 피어나 며칠도 되지 않아 시들어버리고 떨어져 버리는 꽃들도 있는데 무슨 기대를 그리도 많이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의미없는 일도 아니고, 행여라도 애써 봄을 준비했다가 짓밟혀버린 꽃들도 의미없는 것은 아닐진데 애써 피워낸 꽃들이 떨어진다고 슬퍼할 일이 있겠는가?

하얀 눈이 내린듯 조팝나무의 물결이 눈부시다.
▲ 조팝나무 하얀 눈이 내린듯 조팝나무의 물결이 눈부시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그래도 보고 싶었다.
며칠 피었다 지는 꽃이라도, 가장 예쁜 순간을 보고 싶었다. 그래야 '봄'을 '본 것'이니까.

약한 호흡기때문에 밖에만 나가면 기침이 났다.
'미세먼지가 없는 청명한 날'이라고 기상개스터가 맑은 하늘처럼 환하게 웃었지만, 어릴 적 만났던 그런 하늘은 볼 수 없었다. 하늘이 회색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원예종이지만, 봄을 느끼게 하기에는 적격이다.
▲ 튤립 원예종이지만, 봄을 느끼게 하기에는 적격이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봄은 언제부터인지 뒤죽박죽이었다.
몇 해전만 해도 '우려가 된다'였지만, 이젠 노골적으로 뒤섞인 봄은 꽃을 순서대로 내놓지 않는다.

아직 몇몇 꽃은 그래도 순서대로 피어나지만, 동백과 벚꽃과 목련과 조팝나무와 개나리가 함께 피어있는 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피어나지도 않았는데 지는 꽃이며, 피어나야 하는데 피지도 않은 꽃이라니 당황스럽다.

풍성하게 피어난 벚꽃에서 완연한 봄을 느낀다.
▲ 벚꽃 풍성하게 피어난 벚꽃에서 완연한 봄을 느낀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꽃빛은 하늘과 햇살이 어우러져 제 빛을 낸다.
그 빛을 보고 싶었지만, 그 빛은 퇴색되었고, 그나마 카메라도 남아있는 빛을 제대로 담질 못한다. 컬러를 다 빼버리고 흑백의 봄을 담는다. 그제야, 조금 봄빛이 느껴진다.

왜 그런 것일까?
흑백의 빛은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한 컬러의 빛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새 목련은 저만치 봄을 뒤로 하고 떠나고 있다.
▲ 목련 어느새 목련은 저만치 봄을 뒤로 하고 떠나고 있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더 많은 빛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다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관음증 비슷한 것이 있어서 '다 보이지 않는 것'에 호기심을 갖고, 다 보이면 이내 심드렁해지는 측면들이 있다.

'신비한 것'은 다 보이지 않는 것,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을 넘어선 그 무엇, 그것을 우리는 절대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언제나 그것은 인간의 이성 너머에 있기에 영원한 '신비'요, 우리 인간은 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갓 피어난 벚꽃이 예쁘다.
▲ 벚꽃 갓 피어난 벚꽃이 예쁘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꽃들이 너무 무성하니 그 꽃이 그 꽃이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한 송이 한 송이 모두다 예쁜 꽃인데, 그냥 통째로 '꽃'이니, 한 송이 마다의 아픔이나 아름다움은 간과된다. 한 송이 한 송이의 아름다움과 슬픔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때 우리는 사실 제대로 꽃을 볼 수 있다.

꽃은 그렇게 보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꽃이 아니라 사람이므로. 그러나 사람에 대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 보아야 한다. 우리는 꽃이 아니라 사람이므로. 그래야, 조금이라도 사람답게 살아가게 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낙화한 꽃잎과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민들레
▲ 낙화 낙화한 꽃잎과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나는 민들레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낙화한 꽃들, 그리고 그 떨어진 꽃들의 키높이에서 자라고 있는 민들레 한 송이. 어떤 꽃은 가고 어떤 꽃은 오고, 이것이 자연의 섭리다.

이번 봄, 유난히도 우리 사회에는 가는 것과 오는 것이 교차하는 시기를 살았다. 이제 이 봄날이 다 가기 전에 가할 것과 와야할 것들이 교차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또다시 우리는 혼란스러운 시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혼란스러움이라는 것이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면 대환영이겠지만, 피어나는 꽃을 뭉개버리는 포클레인의 역습 같은 것이라면 환영할 수 없는 일이다.

가는 봄과 오는 봄이 교차하는 날, 그냥 봄빛에 취해있을 수만은 없는 날, 흑백의 빛으로 봄을 담아보았다. 보이지 않는 빛 속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봄빛이 피어나길 바라는 심정으로.



태그:#봄, #벚꽃, #목련, #민들레, #낙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