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돈키호테.

장흥에 사는 마동욱씨. 별명이 돈키호테다. 먹고살 만한 직장을 두 번이나 내려놓고 사진기 하나를 들고 고향 마을을 기록하는 데 반평생을 바친 사람. 통일을 바라며 목포에서 문산까지 철로 길을 걷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런던까지 가려고 했던 사람이다. 마동욱의 육십 년 인생을 돌아본다.

여동생과 함께 찍었다.
▲ 마동욱 젊은 시절 여동생과 함께 찍었다.
ⓒ 마동욱

관련사진보기


마동욱은 전남 장흥군 안양면 학송리에서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때 가장 기억나는 일은 손가락을 다친 사고였다.

"당시 학송리에는 학교 건물이 없어 6년 내내 아이들은 학교를 짓고 운동장을 만드는 데 많은 일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운동장을 만드는 작업을 하다 큰 돌 틈에 마동욱 새끼 손가락이 끼어 짓이겨지는 사고가 났다. 뼈가 부서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손가락에서 피가 철철 쏟아졌다. 교사는 마동욱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고 마동욱을 동네 약국으로 데려갔다. 그 약국 약사는 면허도 없었다. 약사는 짓이겨진 손가락을 잘라내야 한다며 가위를 들고 나왔다.

교사와 약사가 마동욱 손가락을 자르려는 순간에 아버지가 도착했다. 아버지는 기함을 했다. 자르지 말고 그냥 바늘로 꿰매만 주라고 했다. 마동욱 아버지는 뼈를 맞춰 주는 접골 일을 잘했다. 아버지는 날마다 마동욱의 새끼손가락을 만지며 뼈가 온전하게 살아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잘릴 뻔한 손가락이 살아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다고 했다.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약사는 내 살아난 손가락을 만지며 아버지의 현명한 판단에 감탄을 했다. 그 새끼손가락은 지금 잘 살아 있다."

사업을 한다고 나선 큰 형님, 재산을 탕진하다

집안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런 집안에 우환이 닥쳤다. 큰형님이 사업을 한다고 나섰다가 재산을 탕진했고, 그 뒤부터 집안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마친 마동욱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마동욱은 15살 때 광주에 있는 작은형이 자취를 하고 있는 집으로 갔다. 당시 작은형은 조선대 야간부고를 다니고 있었다. 마동욱은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열여섯 살 때 작은형은 마동욱을 광주 충장로1가에 있는 대광약국에 취직을 시켰다. 그는 약국 점원으로 6개월을 일했다. 그리고 광주 학동에 있는 제일상업전수학교 중학교 1학년 2학기에 편입을 시켜 주었다. 마동욱은 새벽에 일어나 신문 배달을 하며 학교를 다녔다.

신문사 총무의 장난으로 월급을 제때 받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납부금을 가져오라고 독촉했다. 돈이 없는 마동욱은 2학년을 진학하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형은 학교를 그만둔 마동욱에게 자신이 하고 있던 우유배달을 맡겼다.

형은 대학을 진학하지 못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며 고향 장흥으로 내려갔다. 장흥으로 내려가면서 서울에 있는 고향 후배에게 마동욱을 부탁했다. 그리고 마동욱에게 말했다.

"동욱아, 너 서울에 가서 취직하면 안 될까?"

며칠 뒤 마동욱은 고향 선배가 근무하고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고향 선배는 자이안트라는 양말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처음으로 해 보는 공장 일이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광주에서는 밥을 해 먹었는데 이곳에서는 기숙사에서 해 주는 밥을 먹으니 오히려 편했다. 기숙사가 두 곳이었는데 한쪽은 남자, 한쪽은 여자가 머무는 곳이었다.

"누나 뻘 여성노동자들이 나를 예뻐했다. 몰래 불러 밥도 해주는 누나들도 있었다."

마동욱은 낮에 일을 하며 야간엔 공부를 할 수 있는 직장을 찾고 싶었다. 누나는 당시 구로동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마동욱은 쉬는 날이면 구로공단으로 놀러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쓸 만한 일자리는 모두 중학교 졸업 학력이 필요했다. 쌍안경과 카메라를 생산하는 대한광학에서도 입사 기준이 중졸이었다. 월급이 일반 회사보다는 조금은 좋은 곳이었다. 마동욱은 중졸로 속여 겨우 입사했다. 양말 공장을 다닌 지 6개월만이었다.

공장을 다니면서 못다 한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24시간 2교대로 일하는 회사에선 야간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게다가 마동욱은 회사에 들어올 때 중졸이라고 썼는데 중학교를 다니겠다고 회사에 말할 수는 없었다.

공장을 다녔지만 늘 공부가 목말랐다

야간 근무할 때가 더 힘들었다. 낮에 잠을 자야 되는데 젊은 호기로 낮에 잠을 안 자고 놀다가 밤에 일을 하려니 너무 졸렸다. 하루는 너무 졸려 쌍안경을 집어넣는 박스에 들어가서 잠을 자다가 박스가 무너지는 바람에 들통이 났다. 공장장한테 불려갔다.

"야, 너는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대체 왜 그래?"

마동욱은 시말서를 쓰고 겨우 일할 수 있었다.

마동욱은 공장을 다니면서 늘 공부에 목말라했다. 초등학교 출신이라는 게 한이 맺혔다. 고향에서 공무원이 된 작은형이 편지를 보내 마동욱을 고향으로 불러 내렸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고생했다며 늦었지만 공부를 하라며 마동욱에게 회천고등공민학교 3학년 편입을 시켜 주었다.

고등공민학교는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기에 검정고시를 합격해야 중학교 졸업을 인정해 주는 학교다. 마동욱은 그 학교를 졸업하면서 검정고시 시험을 봤지만 영어와 수학 과목을 합격하지 못하여 중학교 졸업 자격을 얻지 못했다.

마동욱은 광주로 올라와 우유를 배달하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 학원을 다녔다. 영어와 수학이 어려웠다. 관세 공무원과 행정직 공무원 시험을 봤지만 실패를 했다.

다행히 영어와 수학 과목이 없는 9급 교정직 시험에 합격을 했다. 기뻤다. 처음으로 직장다운 직장을 얻게 됐다. 부모님은 얼마나 기쁜지 동네방네 소문을 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축하를 해 줬다.

1979년 1월 서울구치소로 발령받다

교도관 시절에 방송을 하고 있는 마동욱
▲ 교도관 시절 마동욱 교도관 시절에 방송을 하고 있는 마동욱
ⓒ 마동욱

관련사진보기


마동욱은 1979년 1월에 서울구치소로 발령받았다. 임명 동기가 모두 22명이었는데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군대도 다녀온 선배들이었다. 마동욱은 일주일이라는 짧은 교육을 받고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M1소총을 지급받고 근무를 섰다. 구치소 망루 위에 야간 근무를 서고 있을 때 부소장이 순찰을 나왔다. 마동욱은 "받들어총!"을 하면서 인사를 했다. 망루 아래에서 그 모습을 본 부소장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망루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뭐지? 왜 저러지?'

잠시 후 인터폰이 울렸다.

"야! 인마, 너는 받들어총도 못해?"

"아니 받들어총을 했는데요."

"야, 인마 총을 거꾸로 들고 받들어총을 하냐? 너 빨리 내려와."

마동욱은 망루에서 내려왔다. 사무실 직원들이 웃고 있었다.

"너 학교에서 교련도 안 받았니?"

"예! 저는 고등학교를 안 나왔는데요."

금방이라도 난리가 날 것 같은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다. 간부들과 직원들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더니 "알았다, 알았어. 들어가 자라" 하면서 웃었다. 마동욱은 돌아서면서 비애를 느꼈다. 부끄러웠다. 배우지 못했다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배우지 못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공무원 인사 기록 카드에 적힌 내 학력은 중졸이다. 회천고등공민학교 졸업이지만, 검정고시를 합격하지 못했으니 중졸이 아니었다."

유신 막바지 살벌한 시기였다. 구치소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학생들의 구호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옥 안에서 울려퍼졌다. 폭행이 난무했다. 마동욱도 어린 나이에 선배들을 따라 폭행을 배웠다.

마동욱은 구치소에서 교도관으로 발령을 받기 전 입대 신체검사를 받았다. 면사무소 병사계 직원이 말했다.

"중졸 이상은 이 줄로, 중졸 이하는 이 줄에 서라!"

마동욱은 보란 듯이 중졸 줄에 섰다. 그런데 잠시 후 면사무소 병사계 직원이 다가왔다.

"넌 인마, 중졸 이하야. 이쪽 줄에 서."

결국 육군 방위병으로 결정이 났다.

"나는 현역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난 현역을 갈 수 없었다. 배우지 못함은 늘 나를 이렇게 옹졸하고 맥 빠지게 괴롭혔다."

마동욱은 3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1년 2개월 동안 방위병으로 근무를 했다.

1980년 11월 서울구치소로 복귀를 했다. 전두환이 수많은 광주시민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을 무렵이었다. 전두환은 "김대중이 대중을 선동해 민중 봉기와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고 조작한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대중 등 37명을 구속했다.

"구치소 앞에 탱크, 군대가 있었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김대중, 김옥두, 이철 등이 구치소에 있었다. 그 당시엔 인권이 없었다. 재소자들을 무차별로 패고 심하게 다뤘다."

재소자들에게 차입되는 책을 검열하다

마동욱은 보안과 서무보조로 일하다가 다시 교무계로 발령받았다. 교무계에서는 재소자들의 신입자 교육과 새마을 교육을 했다. 방송원고도 작성하여 교무계장의 결재를 맡고 원고도  방송했다.

그리고 재소자들에게 차입되는 책을 검열하는 일을 담당했다. 마동욱은 그때 운동권 학생들이 많이 읽는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게 됐다. 출근해서 퇴근 때까지 책을 읽었다.

퇴근해서 교보문고까지 찾아가 시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책을 조사하고 책의 내용들을 파악해 다음날 책 검열에 활용하기도 했다. 법무부 교정국까지 찾아다니며 새로 나온 사회과학 서적에 대한 검열제도의 보완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때 독서검열이 심했다. 불온서적 목록을 판단하는데 너무 허술했다. 마르크스, 레닌이라는 글자만 나오면 무조건 반입 금지였다. 그 당시 세계운동사 책, 러시아, 프랑스혁명 서적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책은 당시 불온 목록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 책들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건 교도소 교무계였다. 나는 웬만하면 불온서적을 지정하고 싶지 않아 책을 어느 정도라도 훑어보려고 애를 썼다. 교보문고에도 가고. 그때 책을 많이 봤다. 불온서적을 지정하려면 책 내용을 간략하게라도 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잘못해서 그런 책을 반입해 주다가 안기부(현 국정원)에 불려 들어가면 혼쭐이 났다. 하지만 하루에 몇 백 권씩 쏟아져 들어오는 책을 다 읽어 볼 수는 없었다. 재소자들이 반입을 요구하는 책을 읽어 봤지만 불온도서로 지정할지 애매한 책이 많았다.

무슨 일이든 워낙 성실했던 마동욱은 그런 책 목록을 가지고 법무부 교정국에 가서 문의한 적도 있다. 법무부 교정국 직원은 뭐 이런 놈이 있나 하는 눈치였다.

"아니, 우리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당신들이 판단해야지" 하는 지청구만 듣고 돌아왔다. 마동욱은 그 뒤 그 책을 재소자들에게 반입했다. 어느 날 불온도서를 학생들에게 반입해 줬다며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마동욱을 소환했다.

남산의 중정은 한 번 들어가면 반은 죽어서 나온다는 살벌한 곳이었다. 중정 직원들은 책을 넣어 준 동기를 물었다. 그때 마동욱은 당당하게 말했다.

"법무부 교정국에 가서 문의를 했더니 나보고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책을 다 읽어 봤더니 내용이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정 직원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자들도 책을 읽지 않고 제목만 보고 넘겨짚는 게 태반이었다. 중정에서는 마동욱에게 이력서를 써 오라고 했다. 그는 이력서를 쓰면서 학력 칸에 뭐라고 쓸까 고민했다.

"그동안 책을 담당하며 당당하게 불온서적이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학벌이 겨우 국민학교라면 그자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걱정했다. 결국 이력서에 고등학교 졸업이라고 기재했다. '학력 위조'였다. 다행히 그 뒤로 별 다른 조치는 없었다."

독방에 감금된 고은 시인과 대화를 나누다

얼굴이 곱상한 마동욱은 강하게 보여야 했다. 특히 돈 많고 백 있는 자들이 들어와 유세 떠는 건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들어온 학생들과 시민들에게는 잘해 주려고 노력했다.

다른 교도관들은 빨간 이름표를 단 재소자(국가보안법 위반)나 요시찰 인물들과는 말조차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 괜히 윗사람한테 찍히면 좋을 일이 없었다. 마동욱은 순진했다. 그런 재소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했다. 특히 당시 내란 음모죄로 구속돼 독방에 감금돼 있었던 고은 시인과도 대화를 나눴다.

고은 시인이 감금된 사방은 청소년들이 수용된 6사동이었다. 하루 종일 홀로 있어야 하는 독방이었다. 어쩌다 청소를 하게 된 교도관도 심부름을 하는 재소자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마동욱은 그가 수용되어 있는 6사동 담당을 6개월쯤 하면서 그의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는 늘 말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나, 이 사회의 잘못된 부분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했다. 고은 시인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였다.

마동욱은 교도관 일이 싫지는 않았다. 늘 한 시간 전에 출근해 청소를 했다. 당시 교도관이 청소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손가락 하나로 재소자들 시키면 그만이었다. 그이는 재소자들 교육도 담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고 아찔하다. 국졸 주제에, 겨우 스물두 살 나이에 내가 뭘 안다고 그이들을 교육했을까."

학력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고,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던 마동욱은 어느 날 교도소 일을 그만둬야겠다고 마음먹고 사표를 냈다. 계장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록 학력은 짧지만 성실하게 일하던 사람을 보내기 아깝다는 이유로 사표를 반려했다.

할 수 없이 1년을 더 버티고 일을 했다. 하지만 한 번 마음이 떠난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결국 1982년 7월에 다시 사표를 내고 사라졌다.

얼마 뒤 사표 수리가 된 마동욱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고향을 들렀다. 형들과 누나는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놈이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면 어떻게 하냐고 혼을 냈다. 한번 마음먹으면 곧바로 실천하는 마동욱이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학력고사 벽은 높았다

마동욱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부천 심곡동 산 속에 집을 하나 빌리고는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목표가 정확치 않았기에 공무원 시험은 실패를 했다. 그다음 해 마치지 못한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를 생각하고 '중학교 완전정복' 책을 사서 독서실을 들어갔다. 그리고 중학교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했다.

"그렇게 공부한 지 한 달쯤 되니까 너무 재미있었다. 기초부터 하니까 되더라."

마동욱은 그해 8월에 중학교 학력 인정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다시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려고 종로에 있는 고려학원에 수강신청을 했다. 마동욱은 6개월 동안 공부해 고등학교 학력 인정 검정고시도 통과했다.

1984년, 마동욱은 대학 입학 학력고사를 처음 봤다. 그동안 해마다 학력고사 날만 되면 자신만 그 시험을 못 본다는 데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젠 자신도 그런 대열에 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학력고사 벽은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정고시 과목 외에 화학, 물리 같은 과목은 깜깜했다. 결국 점수가 너무 낮아 일반 4년제 대학엔 진학할 수 없었다. 마동욱은 방송통신대 법학과를 들어갔다.

"교도관 하다 보니까 종이 한 장 때문에 차이가 나는 걸 보고 법의 중요성을 알았다."

하지만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책 외판원도 해 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결국 1학년 2학기를 마치고 포기했다. 그럴 즈음 어느 날 형수가 아들을 낳는다고 서울 수유리로 왔다. 형은 서울대 행정직 공무원을 하고 있었다.

병원 간호사 중에 해남이 고향인 간호사가 있었다. 같은 고향이라고 그 간호사는 형수에게 잘해 줬다. 형수는 시동생 마동욱이 면회 올 때마다 그 간호사를 소개해 주고 싶었다. 형수는 떡 같은 게 들어오면 일부러 시동생 보고 그 간호사에게 갖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마동욱은 그 간호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 간호사가 이쁘게 보였다. 키도 안 작게 보이고. 하하하."


태그:#마동욱, #장흥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이 정도면 마약, 한국은 잠잠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