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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성과 후회는 언니의 몫일까?

언니는 배운 대로 한 것 뿐인데, 어렸을 때 나를 때렸던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
 언니는 배운 대로 한 것 뿐인데, 어렸을 때 나를 때렸던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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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갓길을 언니와 함께 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어쩌다 보니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언니는 어렸을 때 나를 때렸던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왜? 아빠가 그런 걸 배운 것 뿐이잖아? 중학교 이후로 때린 적도 없고, 난 괜찮은데?"
"그래도 그때 널 때리는 게 아니었어. 내 잘못이야."

왜 반성과 후회는 언니의 몫일까? 언니는 배운 대로 한 것뿐인데. 어렸을 때 우리를 때린 아빠를 언니가 보고 배운 것 뿐인데 언니는 지난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때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문제라는 자각이 없었다. 우리는 감정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배운 것을 그대로 행했다. 언니는 휘두르는 입장에서, 나는 맞는 입장에서 폭력을 실현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후회는 왜 언니의 몫일까? 나는 언니가 마음의 짐을 덜었으면 좋겠다.

"전에 회사 과장님한테 들어 보니까 우리 집은 아무것도 아니던데? 남자 형제들 있는 집은 베란다 창도 깨지고, TV랑 컴퓨터도 박살 나고, 정말 장난 아니래. 뼈 부러지는 것도 다반사라던데? 그런 거에 비하면 주먹질 한두 번은 애교 아니야?" 
"...그래도 때리는 게 아니었어."
"난 괜찮다니까."

언니는 말이 없고 과묵한 편이다. 대화를 나눠보면 재미있는 사람이고, 장난기도 다분하다. 무거움과 밝음의 밸런스가 안정적이라서 기분이 들쭉날쭉하는 나는 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참 유행했던 멘토와 멘티의 관계, 우리가 농담 삼아 언니를 챙길 때의 나를 부르는 작은 엄마와 딸의 관계, 연년생으로서 맞먹는 동생과 언니의 친구 같은 관계, 내가 언니를 의지할 때 느끼는 부모와 자식 같은 관계.

우리는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다양한 관계와 의미를 서로에게 부여하고 있다. 이 친밀감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함께 자라오면서 지금까지의 시간을 공유했다.

아빠는 매일같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빠가 경찰관을 관두셨다. 그전부터 집안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뚝섬역에 이사 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아파트는 청소를 위해 한 번 방문한 후, 영원히 안녕하게 되었다. 방 세 칸짜리 집과 결별한 후, 새로 이사 간 집은 방 두 칸짜리 작은 지하 셋방이었다.

화장실도 공용으로 바깥에 있었고, 이사 온 첫날 우리 가족을 반긴 것은 땅강아지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바퀴벌레와 모기가 아닌 벌레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시골에서도 본 적 없는 크고 징그러운 벌레를 보고 엄마는 반가워하셨지만, 가늘고 긴 팔다리에 갈색빛 몸체를 가진 그 벌레는 이쁜 구석이 하나 없었다.

이사간 집에서 아빠는 매일같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거나, 나가서 며칠씩 외박하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나와 언니, 그리고 사건사고만 일으키는 아빠를 위해 밤낮없이 일에 내몰리셨다. 그렇게 돌아온 집에는 잠들어 있는 우리와 돈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아빠뿐이었다.

가끔씩 그런 아빠도 정신 차리고 일을 해보려고 할 때가 있었다. 엄마에게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해서 그걸로 배달 일을 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깽 값-. 멀쩡히 걸어가던 아가씨를 오토바이로 건드려서 입원시키고, 그 문제의 오토바이도 어느 날 조용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빠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겉멋만 든 양반이었다. 성격까지 지랄 맞은 양반.

아빠는 경찰 일을 관둔 후 사회에 영 적응을 못했다. 도박중독으로 가산 탕진한 것도 한 가지 이유였겠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거나, 그 노력을 지속하는 끈기를 가지지 못했다. 아빠 안에 풀리지 않을 화는 쌓여만 갔고, 애먼 손길은 작고 약한 우리에게 향했다.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가장 힘없고 만만했던 언니와 난 아빠의 훈육을 가장한 매를 맞았다. 아빠 친구분에게서 전화 왔을 때 설거지한다고 말했다고 맞고, 새벽 두 시에 방 안치웠다고 강제 기상해서 방을 쓸고 닦고도 맞았다. 술 마셔서 기분 좋다가도 뭔가 트집을 잡아 발이 날라왔다.

집에 얇은 강목을 테이프로 두른 것이 있었는데 이게 상당히 아팠다. 언니랑 나는 언제나 그 몽둥이를 집 안 곳곳에 숨겨 놓았다. 그러나 가져오라는 아빠의 한 마디 말에 바로 가져와야 했다. 몽둥이가 없으면 도끼빗으로, 그것도 없으면 발이나 파리채로. 우리 집 파리채는 파리보다 우리를 더 많이 잡았다.

아빠가 있는 날은 아빠가 있어서 좋았지만, 아빠가 있어서 무섭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빠가 집을 나가 원양어선을 탔다. 일 년 만에 집에 돌아온 아빠는 여전히 적응을 못했고, 다시 집을 나간 이후로 우리 집에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왕따를 당했던 시기, 나를 보고 언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언니가 나를 때린 것을 잊어버렸다. 언니가 사과한 이후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언니가 나를 때린 것을 잊어버렸다. 언니가 사과한 이후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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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남겨준 폭력의 잔재는 그것이 나쁜 것임을 모르고 자란 우리들에게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다. 한 번은 언니 짜파게티를 하나 훔쳐 먹어 화가 난 언니에게 맞았다. 짜파게티 하나의 값은 주먹 하나였다.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시기였다. 그래도 한 살, 두 살 나이가 들면서 언니에게 맞는 날은 점점 줄어들었다. 언니는 내가 잘못하지 않으면 화내거나 때리지 않았다.

중학생 때 심하게 왕따를 당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언니에게 알렸다. 언니는 내가 속한 반의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항의했다. 담임은 조회에서 진짜냐고, 그러지 말라는 말 한 마디를 던졌을 뿐이었고, 오히려 뒷날부터 언니가 '네 동생이 왕따라며?'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약한 것을 비집고 들어가는 가해와 폭력은 죄책감 하나 없이 당연해 보였다.

육체적인 폭력보다 정신적인 폭력이 더 싫다. 나 때문에 왜 언니가 왕따를 당해야 하는지 억울하다. 남학생들이 차라리 때리라며 선생에게 대드는 것이 이해 간다. 육체적인 폭력은 한 순간인데 언어로 인한 정신적인 폭력은 흔적이 남지 않지만 오랫동안 지속된다.

이 야비한 속성을 이용해 죄의식 없이 언어폭력을 휘두른다. 죄를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지은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말로 받았던 폭력과 그들의 얼굴은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들 중에서 나라를 구한 사람이 나와도 그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일 뿐이다.

왕따를 당했던 시기에 매일같이 집에 돌아와 우는 나를 보고 언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네가 불쌍해 죽겠다며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미안하다며 울었다. 가끔 싸우다 화가 나면 언니가 나를 한 대쯤 때리기는 했는데... 왜 저렇게 펑펑 우나.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그때부터 서로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게 되었다. 말이든, 주먹이든 폭력은 나쁜 것이다. 이것을 자각하는데 한참이 걸렸다.

시간이 흘러 지금이 되었다. 나는 언니가 나를 때렸던 것,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언니가 사과한 이후로 그것들을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아빠의 폭력과 중학생 때 당했던 정신적인 폭력은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잊지 않고 있다. 이건 내가 용서해야 지워질 폭력에 대한 기억이다. 그래서...

"언니가 왜 미안해?"

이해할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저에게는 지나갔지만 누군가가 현재 겪고 있다면 힘 내시라고 이야기하고 싶어 쓴 글입니다.



태그:#가족, #가정폭력,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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