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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를 통해서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힐 계획이다. [편집자말]
⇒전편 (엄동설한에 발가벗겨서,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에서 이어진 기사.

삼청교육대  신군부가 군부대내에 설치한 삼청교육대에선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인권유린을 당했다.
▲ 삼청교육대 신군부가 군부대내에 설치한 삼청교육대에선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인권유린을 당했다.
ⓒ 공개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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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을 벗어난 뒤에는 또 다른 국가 폭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감학원에서 장난삼아 새긴 문신 탓이었을 거예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끌고 간 것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서별로 할당량이 있었다고."

1980년, 그의 나이 23세 때를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국가가 그를 또 한 번 짓밟은 해다. 그는 불심 검문에 걸려 신군부가 불량배 소탕이란 명분으로 만든 삼청교육대(三淸敎育隊)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다. 지옥의 소년 수용소 선감학원을 탈출한 지 5년 만에 또 다른 지옥으로 끌려간 것이다.

"부모들 부탁을 받고 뚝섬유원지(뚝섬 한강공원)에서 초등학생 7명 보호자 역할을 하던 중이었어요. 저도 옷을 벗고 아이들과 함께 수영하고 있었죠. 갑자기 경찰이 다가오더니 경찰서로 가자고. 제가 끌려가니까 '어~휴' 애들은 울고불고 난리가 나고."

성동경찰서를 거쳐 그가 끌려 간 곳은 육군 5사단(경기도 연천) 연병장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빨간 모자를 뒤집어쓴 조교들이 미친 듯이 날뛰며 젊은이 노인네 가리지 않고 짓밟았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라는 소리만 나면 겁에 질린 사람들이 통나무처럼 굴렀다. 그 틈에 끼어 한일영씨도 1시간 넘게 무지막지한 폭력에 시달렸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죄 없는 민간인을 이리 무지막지하게 때려도 됩니까?"

모진 매질을 견디다 못한 그가 느닷없이 일어나 조교들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이 그를 고통의 수렁 속으로 밀어넣었다. 이 한마디 때문에 조교들에게 찍혀 그는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계속 얼차려를 받았는데,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은 '지옥 탕'이었다.

"연병장 한쪽에 있는 구덩이인데, 그 안에 진흙과 물, 오줌이 뒤범벅돼 있었어요. 단체로 소변을 보는 곳이거든요. 그곳에 저를 집어넣고는 잠수를 시키는 거예요. 숨이 막혀 나오려고 하면 긴 막대기로 머리를 눌러 버리고요. 그 오물을 입과 코로 수도 없이 넘기며 견뎌야 나올 수 있어요. 식사 시간을 뺏고는 자기들이 먹다 버린 음식 쓰레기를 내밀기도 했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먹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 한 달을 버틴 거죠."

죽으려고 혀 깨무니 아프고 피만 나와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피해자 한일영 씨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피해자 한일영 씨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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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 같은 한 달간의 순화교육을 마쳤지만, 그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입소 첫날에 입바른 소리를 한 탓이다. 근로봉사대라는 곳에 끌려갔는데, 그곳도 순화교육장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맞고 얼차려 받고, 거기에 강제 노동까지 얹혀 있는 곳이었다. 이미 '찍힌' 그에게 가해지는 매질과 얼차려는 특히 더 심했다.

'이렇게 당하다가는 죽겠다'는 생각에 그는 탈출을 결심했다. '부대 주변에 발목 지뢰가 수두룩하다'는 군인들 말이 거짓이거나 과장임을 이미 눈치챈 터였다. 탈출을 막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군인들 말이 사실일지라도, 운이 나빠 발목지뢰를 밟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옥을 탈출해 자유를 찾고 싶었다. 어차피 아무 잘못 없이 납치당해 끌려 왔으니 선감학원처럼 무사히 탈출만 하면 괜찮을 것이라는 순진한 마음도 탈출을 결심하는데 한몫을 했다.

근로 봉사대에 끌려간 지 두 달여쯤 되던 어느 날, 그는 오전 작업이 끝날 때쯤 소변을 보러 가는 척하며 숲에 들어가 납작 엎드렸다. 군인들 눈을 피하려고 포복을 해서 숲을 빠져나온 뒤 기차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군인들 모습이 보이면 다시 납작 엎드려 몸을 숨겼다. 이런 식으로 부대 3개를 통과해 그는 기차역(신탄리역)에 도착했다.

그는 역 주변에 숨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흙투성이 군복, 이 차림새 자체가 '군부대에서 도망친 사람'임을 알리는 광고판 같아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어서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그는 기차에 몰래 올라타 화장실에 숨었다. 잠시 후 기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그러나 기쁨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대광리역에서 멈춘 기차가 출발을 하지 않았다. '군부대 사정으로 연착한다'는 방송만 여러 번 들렸다. 도망쳐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발이 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착 착 착'하는 군화 소리가 화장실 앞에서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헌병들은 "네가 한일영이지?"라고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그를 끌어내려 차에 태웠다. '이제 끝이구나, 차라리 죽자!', 그는 있는 힘을 다해서 혀를 깨물었다. 혀는 끊어지지 않고 피만 입안에 가득 고였다. 엄청나게 아프기만 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근로봉사대에 다시 끌려가는 것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군사재판을 받고 공주 교도소로 넘어가 1년간 복역했다. 불량배 검거령인 '계엄 포고령 13호'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대쪽 판사는 개뿔, 전두환 하수인이었을 뿐"

 대법원 판결문, 이회창 씨 이름도 있다.
 대법원 판결문, 이회창 씨 이름도 있다.
ⓒ 한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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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봉사대에 돌아가지 않고 재판을 받은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느닷없이 끌려와 입바른 소리를 한 탓에 찍혀서 고초를 겪은 사정을 이야기하자, 군 헌병대 장교는 그에게 A급과 B급을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A급은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고, B급은 순화교육 후 근로봉사를 해야 하니, 형식만 놓고 보면 A급이 더 무거운 벌이다. 그러나 한일영씨는 A급을 선택했다. B급을 선택하면 그가 목숨을 걸고 탈출한 그 끔찍한 근로봉사대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전과 기록이 남을 수 있지만, 당시는 그걸 걱정할 수가 없었어요. 일단 살고 봐야 하잖아요. 재판을 받게 되면 법정에서 저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었고요."

그러나 군사법원은 그의 호소를 들어 주지 않았다. 대법원도 국가 편이었다. 그를 재판한 대법원 판사 중에는 '대쪽 판사'라는 별호를 가지고 정치에 입문, 나중에 대통령 후보까지 된 이회창씨도 있었다. 한일영씨는 재판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며 "대쪽은 개뿔, 전두환 눈치만 본 주제에!"라고 지나가는 말처럼 여러 번 뱉었다.

교도소에서 1년을 복역하고 나왔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삼청교육대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도대체 나하고 무슨 원한이 있다고, 한 달에 한두 번씩 경찰이 조사하러 오는 거예요. 그것도 꼭 직장으로 쫓아와서 삼청교육대 갔다 왔다고 광고를 하니 어떻게 직장을 다닐 수 있겠어요. 참 배려심도 없는 사람들이죠. 파출소로 오라고 해도 될 것을."

그래서 그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넝마주이, 고철 수집 같은 일을 하며 살아야 했다. 절망감에 자살 시도만 3~4차례 했지만 모질지 못해서 그런지 성공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착한 부인을 만나 마음을 잡고 대전에 정착해서 아들딸 낳고 살고 있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렵다. 최근에야 간신히 기초 생활수급자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선감학원과 삼청교육대의 악몽 속에 살고 있다. '지금도 악몽을 꾼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국가가 내 인생을 망쳤다. 꿈을 꿀만 하면 나를 구렁텅이에 빠뜨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을 보며, 그가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전두환이 삼청교육대만은 잘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미워요. 교회 목사님이 이 얘기를 해서 대판 싸운 적도 있어요. 지금도 그 교회 안 나가고요."

인터뷰를 거의 마칠 즈음에 그가 한 말이다. 억울함과 원망이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시켜 준 말이었다.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는 국민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곱씹게 해준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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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공동체부, 경기도 담당. 교육에세이 <날아라 꿈의학교> 저자.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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