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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일어나보니 밖이 훤했다. 보름을 사흘이나 넘겼는데도 달은 하나 이지러지지 않고 교교하게 떠 있었다. 옛 사람들은 이럴 때 시를 읊고 술잔을 기울였던가 보다. 

달을 사랑한 사람 중에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이 있다. 얼마나 달을 사랑했으면 죽음마저도 달과 함께 했을까. 호수에 일렁이는 달빛을 쫓아 물에 들어갔다가 최후를 맞았다는 말이 전해 내려올 정도이니, 과연 시선(詩仙)이란 칭호가 붙을 만도 하다.

우리 민족의 대문장가 이규보.
 우리 민족의 대문장가 이규보.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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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엔 이태백, 고려에는 이규보  

중국에 이백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이규보(1168~1241)가 있다. 이규보는 고려시대의 대문장가로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었다. 마치 당나라의 이태백처럼 시를 잘 지으며, 또 빨리 짓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이규보는 생전에 8천여 수의 시문을 지었는데 그의 글을 모은 '동국이상국집'에 2천여 수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

​이규보는 경기도 황려(지금의 여주) 사람이지만 만년의 15년간은 강화도에서 지냈다.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그의 유택이 있으며 이규보의 호를 따서 지은 '백운곡'이라는 마을도 이웃한 불은면에 있다. 또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문들 중에는 강화도에서의 생활을 담은 것들도 많으니, 어찌 생각하면 이규보는 강화 사람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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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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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는 '글로 나라를 빛내겠다(文章之華國)'는 생각을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고려는 부처님의 가호로 적을 물리칠 수 있기를 빌며 팔만대장경을 판각했다. 그때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작성한 것도 이규보였다. 또 몽골과의 외교적인 문서 역시 그의 손을 빌리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우리 민족문학의 거목으로 널리 숭상 받고 있는 이규보이지만 그의 삶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이규보는 어릴 때부터 똑똑하기로 소문이 나서 신동으로 불리었다. 글 짓는 재주가 비상해서 11살에 벌써 어른들의 시모임에 불리어가서 시를 지었다고 하니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다. 이규보의 생애를 담은 연보(年譜)에는 '2살 때(1169)부터 책을 즐겨 가지고 놀고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며 읽는 시늉을 했다. 11살 때 삼촌인 이부(李富)의 친구들이 이규보가 지은 시의 댓구(對句)를 보고 탄복했다'는 글도 있다.

이규보는 민족의식을 고취한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썼고〈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이규보는 민족의식을 고취한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썼고〈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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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나라를 빛낸 이규보

이규보의 아버지는 당시 최고의 사학교육기관인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에 아들을 입학 시켰다. <고려사>에 보면 "무릇 과거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구재학당(문헌공도)에 들어가서 배웠다"라고 나와 있을 정도로 그곳은 당시 최고의 명문 사학이었다. 과거를 통해서만 입신출세를 할 수 있었으니 문헌공도에서의 공부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뒷받침을 했건만 이규보는 번번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본시험인 '예부시'를 보기 위해서는 예비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을 해야 하는데 이규보는 이 예비시험에 연거푸 세 번씩이나 떨어졌다.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였는데, 어떤 연고로 그렇게 낙방을 했던 것일까.

대개의 경우 18살 무렵이면 예비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을 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처음 시험을 본 16살부터 내리 세 번씩이나 떨어지고 나서 남들보다 늦은 22살 때에야 겨우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재수에 삼수를 거쳐 사수까지 했으니, 지금에 봐도 딱하기 짝이 없다. 네 번 째 본 시험에서 비로소 일등으로 합격했지만, 천재로 소문났던 그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과 규격에 맞춘 일종의 모범답안을 써야 하는데 이규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피가 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틀에 자신을 가둘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당시 유행하던 시문을 짓기보다는 자신만의 생각을 글에 담았다. 그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것을 추구했고 또 그 길로 나아갔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만의 문학 세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거푸 세 번씩이나 낙방의 쓴 잔을 마셔야 했고,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규보가 거듭해서 과거시험에 낙방한 원인을 그의 '연보(年譜)'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공은 이 4~5년 동안 술로 기세를 부리며 마음대로 살면서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는 것만 일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았으므로 잇달아 응시했어도 합격하지 못했다.'

이규보는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민족의식을 고취한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썼고〈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이규보는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민족의식을 고취한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썼고〈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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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을 따르지 않은 천재

신동으로 불리던 이규보가 예비고시인 국자감시에서 연속해서 실패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비웃어댔다. 그래서 온갖 소문들과 억측들이 돌아다녔다. 이규보를 술주정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미쳤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소문을 들을 때마다 자신은 미치지 않았으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미친 사람이라고 이규보가 쏘아붙였지만 자존감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규보는 공부에 매진했고, 드디어 네 번 째 도전한 시험에서는 당당히 일등으로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시험공부에 열중했는지는 시험을 앞두고 이름을 바꾼 것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연거푸 세 번 씩이나 과거 시험에 낙방한 그는 몹시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험을 앞두고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다. 마치 앞날이 막막하고 두려울 때 사람들이 점집을 찾는 것처럼 이규보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이규보가 이름을 바꾼 것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그의 연보에 남아 있다.

'공은 처음에 이름을 인저(仁氐)라고 했다. 기유년(명종 19, 1189)에 사마시에 나가려고 했을 때, 꿈에 어떤 촌백성인 듯한 노인들이 모두 검은 베옷을 입고 마루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옆 사람이 이르기를 '이들은 28수다'라고 하므로, 공은 깜짝 놀라 황송한 마음으로 두 번 절하고 "내가 금년 과시에 합격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한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저 규성이 알 것이오"라고 하므로, 공은 즉시 그에게 나아가 물었으나 그의 대답을 미처 듣기 전에 꿈에서 깨어 그 결과를 듣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조금 후에 또 꿈을 꾸었는데, 그 노인이 찾아와 이르기를, "그대는 꼭 장원을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이는 천기이니만큼 절대로 누설해서는 아니 되오"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 부르는 이름'규보'로 고치고 과시에 나아갔는데, 과연 제1인으로 합격했다.'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이규보 묘소.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이규보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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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이규보 묘소.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에 있는 이규보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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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까지 바꾸고 도전한 시험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이규보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이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그의 아버지의 열망이고 바램이기도 했을 것이다. 연이어 떨어지는 시험에 두 부자가 얼마나 실망하고 절망했을지 이 일화는 보여준다.

네 번째로 도전한 시험에서 이규보는 당당히 일등으로 합격한다. 개명까지 한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나 보다. 그의 나이 22세에 비로소 합격했으니 이는 당시 국자감시 급제 평균 연령인 18.6세에 비해 늦은 감이 든다. 그 다음 해에 치러진 본고사격인 예부시는 한 번 만에 합격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서기까지는 또 근 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중앙 문벌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에 그를 천거해줄 사람이 마땅하게 없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관리로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었으니, 하나는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음서제였다. 음서제(蔭敍制)란 지배층의 자손들이 과거 시험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되는 제도를 말한다. 지방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이규보가 벼슬길에 나가는 길은 오로지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명문 사학인 최충의 '문헌공도'에서 수년간 공부를 했던 것이다.

이규보는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규보는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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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대란 시대가 끝나길

일명 '취준생'과 '공시생들'로 넘쳐나는 지금의 현실에서 이규보를 돌아본다. 마치 고려시대 이규보처럼 노량진의 학원가에는 공무원 시험을 분비하는 수험생들로 밤낮이 따로 없다. 부모의 후광이나 물려받을 재산이 별로 없는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취업을 위한 전력투구를 할 수밖에 없다. 이규보는 '글로 나라를 빛내겠다'는 큰 포부를 가졌지만 지금의 청년들에게서는 그런 말마저도 사치로 들릴 듯하다.

지난 4월 8일에 있었던 공무원시험에서는 역대 최고인 약 25만 명이 지원을 했다고 한다. 평균 경쟁률이 46.5대 1이니 몇 퍼센트 안 되는 확률에 기댄 채 청년들은 오늘도 책을 파고 있는 것이다.

'신은 크게 쓰기 위해서 시련과 고난을 주어 단련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또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라는 뜻의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도 있다. 이규보에게는 해당되는 말이지만 취업 문제에 골몰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납득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쉽지 않은 말이다. 취업 대란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어두운 터널이 끝나고 밝은 빛이 보이기를, 공시생 아들을 둔 한 어미로써 간절하게 빌어본다.


태그:#이규보, #동국이상국집, #공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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