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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김민희 분)가 사랑하는 유부남 감독 상원(문성근 분). 그는 영희를 앞에 두고, 한때 당신과 나와 나눴던 사랑을 영화로 만들 것이라 선언한다. 이를 듣던 영희는 반문한다. 도대체 그런 영화를 왜 만드냐고. 옆에서 듣던 상원의 조감독 승희(안재홍 분)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소재와 내용보다도 '어떻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면서 상원의 입장을 두둔한다. 이에 힘을 얻은 상원은 자신의 영화관을 힘주어 피력한다.

홍상수 영화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고 홍상수 영화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소재와 내용적인 면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별 차이점이 없었다. 부적절한 관계에 놓인 남녀 간의 지리멸렬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면에서는 오히려 <강원도의 힘>(1998), <옥희의 영화>(2010),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보다 더 얕아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홍상수 영화가 늘 그랬던 것처럼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가 싶은 의문점이 들었다.

사랑 그리고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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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주요 테마는 사랑이다. 상원과 사랑에 빠진 영희는 대중의 지탄을 받고 독일 함부르크로 도망치다시피 떠난다. 함부르크에서 친한 선배 지영(서영화 분)과 함께 지내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한 영희는 이후 강릉에서 친분이 있는 선배들과 차례대로 만난다. 그리고 우연히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상원과 술자리를 갖게 된다.

유부남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은 여자의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강원도의 힘> <옥희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도 진지하게 다룬 바 있다. 사실 이 영화들뿐만 아니라 홍상수 영화 속 여자들은 언제나 한심하고 지질한 남자들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괴로워하는 여자주인공의 속내를 좀 더 내밀하게 천착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간의 반복이었다. 특정 장소를 특별한 이유 없이 빙빙 맴도는 인물들의 움직임은 느릿하게 흘러가는 홍상수 영화에 기묘한 리듬감을 안겨주었다. 지난해 개봉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2016)에서도 특정 공간 반복과 기시감은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반복적인 패턴은 홍상수 영화에서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요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홍상수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공간 반복을 과감히 삭제했다. 한 번 나왔던 장면은 웬만하면 나오지 않는 홍상수의 영화는 그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을 보는 것 같은 신선함을 주기도 한다.

대신, 홍상수의 또 다른 트레이드마크인 줌인, 줌아웃 촬영은 한층 더 깊어진 기분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1,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독일 함부르크에서 진행한 1부의 촬영은 <하하하>(2009) 이후 홍상수 감독의 다수 영화를 촬영한 박홍열 촬영 감독(영화 내내 검은 옷을 입고 영희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미스터리한 남자로 맹활약을 펼치기도 했다.)이 맡았고, 2부는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2004)부터 홍상수 감독과 종종 작업해온 김형구 촬영 감독이 촬영을 진행했다.

그간 홍상수 영화를 여러 번 봐왔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처럼 인물을 감싸는 풍경의 여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은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내가 기억하는 홍상수 영화 속 카메라는 인물이 거니는 풍경을 세밀하게 보여주기보다, 인물의 움직임에 더 집중해왔다. 배우의 시선에 따라 줌인 처리된 풍경들도 더러 있었고, 분명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되는 장면들이 종종 있음에도 불구, 이상하게 홍상수 영화는 특정 공간을 반복해서 돌아다니는 인물의 움직임이 뚜렷한 촬영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영희의 움직임보다 카메라 무빙이 더 돋보이는 촬영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대다수의 한국 영화처럼 카메라의 움직임만 앞선 나머지 정작 인물의 무빙은 보이지 않는 차원과는 다르다. 그 흔한 매치 컷 없이 오직 원샷, 원씬, 원테이크 기법을 고수하는 홍상수 영화 특성상 고난도의 카메라 무빙을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줌인, 줌 아웃을 사용하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카메라 움직임은 한층 유려해진 뉘앙스다.

여러모로 촬영이 인상적인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가장 좋았던 장면을 꼽으라면, 영화 초반에 지영이 사는 아파트 테라스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영희가 지영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라는 제목에 걸맞게 해변을 거니는 장면도 아니고, 예고편에서 등장했던 영희가 절하는 모습, 영화에 등장했던 강릉의 봉봉 방앗간에서 담배를 피우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 꽃을 만지면서 향기를 맡는 신을 제쳐놓고 이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이는 서로 대화를 나누는 영희와 지영에게 집중하면서도 여백이 느껴지는 촬영 구도의 힘이 컸다.

이 외에도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유부남과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영희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도, 유독 공간의 여백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그 이전에도 홍상수 영화에는 인물의 시선에 따라 공간의 여백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종종 있었다. 다만, 특정 장소를 반복해서 돌아다니는 인물들의 움직임 때문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상원을 잊지 못해 힘들어하는 영희의 모습과 허무함이 느껴지는 엔딩과는 달리,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긍정적인 기운이 드는 영화다.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냉소적이고 허무했던 홍상수 영화에 거대한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은 김민희와 처음으로 작업 했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였다. 이 영화에도 어김없이 홍상수 영화 특유의 지질한 남자들이 등장하고, 여자는 그 남자 때문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아니, 더 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는 알아서 남자를 피한다. 여기까지는 홍상수 영화에서 늘 나왔던 뻔한 패턴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비슷하면서도 결과적으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이야기를 만들면서, 남자 스스로가 자신이 가진 지질함을 인정하고 여자 또한 이를 너그럽게 받아주는 상당한 변화를 꾀한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는 여자의 욕망을 전적으로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홍상수 영화에서는 전례 없는 남자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했다.

반면,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등장하는 남자들은 홍상수 영화 남자들 특유의 지질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질남의 종합선물세트

 <밤의 해변에서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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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막판에 등장하는 상원은 그간 홍상수 영화에 등장했던 지질남들의 종합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 때문에 괴로운 영희의 마음을 살펴보기 이전에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의 한 구절을 태연하게 읽으며 구구절절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남자의 모습은 안쓰럽기보다 실소가 나올 정도다. 반면, 영희의 지인으로 등장하는 극장 프로그래머 천우(권해효 분)는 영희에게 이런저런 훈계를 늘어놓으며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도, 영희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녀의 앞날을 응원해주는 제법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메인 캐릭터 영희 다음으로 돋보이는 캐릭터들은 영희의 주변을 맴도는 남자들이 아니라, 영희가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여자 선배들이다. 함부르크에서 영희와 함께 지낸 지영이 무심한 듯하면서 영희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며, 영희 스스로가 지친 마음을 다독 이게 도와주는 따뜻한 맏언니라면, 2부에 등장한 준희(송선미 분)는 향후 영희가 배우로서 재기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걸크러시 면모를 선사한다. 여전히 영희는 상원을 사랑하지만, 상원에게 있어 그녀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 그 이상의 정서적 유대감을 얻지 못한다. 사정상 만나지 못하는 물리적 거리감이 영희와 상원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하지만, 영희 또한 상원과의 관계를 더는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다.

대신, 영희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해주고 지지해주는 여성들과의 유대관계를 통해 자신을 덜 망가뜨리면서 어떠한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녀답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한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서는 허무하다 못해, 슬퍼 보이기까지 했던 엔딩이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던 영희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긍정적인 신호탄으로 보였다면 과대 해석일까.

혹자들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두고 홍상수와 김민희가 겪었던 경험담을 토대로 만든 자전적 이야기라고 입을 모은다.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유부남 영화감독과 촉망받는 여배우 간의 관계를 모티브로 삼았지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두 남녀의 은밀하고도 아슬아슬한 사랑 이야기를 보여 줬는지는 여러 의문이 든다. 오히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괴로워하는 여자가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며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차분한 드라마에 가깝다.

차라리 '일반 국민의 정서'에 비추어봤을 때 부적절한 사랑에 빠진 인물들의 궤변으로 가득 찬 블랙코미디가 보고 싶다면, 홍상수의 전작들을 추천하고 싶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전부터 홍상수 영화는 늘 허울만 좋은 궤변으로 관객들의 실소를 자아내는 대사들과 상황들이 넘쳐 났고, 그것은 으레 홍상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특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홍상수 영화는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다만,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 영화 최근작 중에서 홍상수 영화 특유의 뻔한 소재와 내용을 '어떻게' 관객에게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홍상수의 차기작은 기존 그의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던 일종의 패턴에서 '어떤' 방식의 변화를 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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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김민희 영화 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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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에서 여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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