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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새벽길. 밤이 추운 건 이슬 때문이다. 텐트 위로, 그리고 살결 위로 촉촉이 내려앉은 이슬 위에 밤공기가 스치면, 그만큼 시린 게 없다.
 횡성 새벽길. 밤이 추운 건 이슬 때문이다. 텐트 위로, 그리고 살결 위로 촉촉이 내려앉은 이슬 위에 밤공기가 스치면, 그만큼 시린 게 없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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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이야. 알람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새벽 6시다. 긴장해서 네다섯 시쯤 일어날 줄 알았는데. 간밤에 자꾸 깬 탓에 늦잠(?)을 잤다. 딱딱한 바닥에 이제 조금 적응하는가 싶더니, 슬슬 간밤의 쌀쌀한 날씨가 견디기 힘들어진다. 밤이 추운 건 이슬 때문이다. 텐트 위로, 그리고 살결 위로 촉촉이 내려앉은 이슬 위에 밤공기가 스치면, 그만큼 시린 게 없다.

새벽 안개가 자욱하다. 날이 이런 건지, 횡성이 원래 이런 동네인 건지. 오늘은 짐 챙기기가 간편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나기 위해 텐트 외에 아무 짐도 꺼내지 않고 바로 잔 덕이다. 새벽이슬에 젖어 침낭과 텐트가 축축하고 무겁지만 괜찮다. 조금만 더 들고 걸으면 된다. 오늘 목표인 횡성군 시내까지는 8km. 2시간 반 정도만 걸으면 된다.

아침 9시 전에 도착해 숙소를 잡고 하루 종일 쉴 계획이다. 쉬긴 쉬지만, 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그런 날이다. 쉰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누가 우릴 감시하는 것도 아닌데. 학교생활, 직장생활에 익숙한 탓인지 쉰다는 것에 대한 괜한 죄책감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오늘은 그것에서도 해방이다. 어쨌든 8km를 걷긴 걷는 거니까.

오늘은 짐 챙기기가 간편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나기 위해, 텐트 외에 아무 짐도 꺼내지 않고 바로 잔 덕이다.
 오늘은 짐 챙기기가 간편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나기 위해, 텐트 외에 아무 짐도 꺼내지 않고 바로 잔 덕이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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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가득 낀 길을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안개 속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산등성이가, 나무가, 길이, 슥 나타났다 다시 슥 사라졌다.
 안개가 가득 낀 길을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안개 속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산등성이가, 나무가, 길이, 슥 나타났다 다시 슥 사라졌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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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가득 낀 길을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안개 속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산등성이가, 나무가, 길이, 슥 나타났다 다시 슥 사라졌다. 풀줄기 사이에 쳐진 촘촘한 거미줄 한가운데, 몸이 맑은 거미 한 마리가 지독하게 집중한 자세로 매달려 있다. 거미줄에는 새벽이슬이 송골송골 달려 있었다. 제 나름의 견고한 세계를 영위하는 새벽 마을에 발을 잘못 들인 방해꾼이 된 기분이다. 우리는 조용히 안개 속을 걸었다.

"다시 느껴진다."

더스틴이 속삭이듯 말했다.

"뭐가?"
"아웃사이더의 느낌."
"…."
"한국에 4년을 살았는데…. 난 늘 이사를 했잖아. 4년이면 꽤 오래 머문 시간이야. 근데 늘 오늘 처음 온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


네가 더 마음을 열어야 해,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평소에 하던 그런 말들을, 오늘은 하지 못하겠다. 사람들은 외국인, 이라는 단면으로만 그를 인식한다. 어제 나는 외국인이랑 결혼한 여자, 라는 단면으로만 나를 보는 사람을 만났다(관련 기사: "왜 외국인이랑 결혼했어? 저 사람이 부자야?).

나는 그 이상을 말하고 싶은데. 그 이상을 듣고 싶은데. 우리가 누구인지, 당신은 누구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시시콜콜하지만 너이기 때문에, 나이기 때문에 특별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은데.

다시 느껴진다. 아웃사이더의 느낌.
 다시 느껴진다. 아웃사이더의 느낌.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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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줄기 사이에 쳐진 촘촘한 거미줄 한가운데, 몸이 맑은 거미 한 마리가 지독하게 집중한 자세로 매달려있다.
 풀줄기 사이에 쳐진 촘촘한 거미줄 한가운데, 몸이 맑은 거미 한 마리가 지독하게 집중한 자세로 매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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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앞에 서니 한없이 소심해진다

8시 반. 횡성에 도착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돈 쓸 핑계를 찾아봤다. 오늘은 추석이니까, 어제 밥을 제대로 못 먹었으니까, 어제 야영해서 숙박비를 아꼈으니까, 써도 된다. 그러니까 침대방을 얻자. 한우를 사 먹자.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 커피도 사 먹자. 휴식이다!

아침 8시 반. 횡성에 도착했다.
 아침 8시 반. 횡성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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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2만 5천 원짜리 깔끔한 모텔방을 찾았다. 샤워를 하고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웠다. 은은한 담배 냄새마저 아늑하게 느껴지는 천국 같은 방이다. 빠르게 잠이 들었다가 오후 3시쯤 아무 아쉬움 없이 일어났다. 5시에 밖으로 나가 거리를 돌아다니다, 적당해 보이는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정육점과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정육식당이었다.

식육처리 기능사라는 사장님이 하얀 셔츠를 입고 고기를 썰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기를 주문하는 방식은 다양했다. 원하는 부위를 원하는 그램 수만큼 주문해 그 자리에서 썰어주는 고기를 가져다 구워 먹는 사람도 있었고, 적당한 양을 미리 포장해 놓은 고기를 가져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바로 썰어주는 게 맛있겠지만, 돈 쓰자고 작정을 하고 나왔지만, 막상 한우 앞에 서니 한없이 소심해진다. 나는 차마 '꽃등심 500g이요!'라고 외치지 못하고 포장육이 든 냉장고 앞을 서성거리며 최종 가격을 가늠해봤다. 상차림 인당 4000원에 맥주 4000원. 거기에 고깃값을 합치면…. 채끝, 안심, 꽃등심, 살치…. 뭘 사지.

이건 가격대비 양이 너무 적나. 그래도 이왕 먹을 거 조금 먹더라도 맛있는 부위를 먹어야 하나. 채끝은 뭐지. 살치가 맛있는 거였나? 맛에 실패가 없으면서,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아야 하고, 배도 적당히 불러야 하는데. 맛에 실패가 없으려면 아는 걸 먹자. 꽃등심과 안심. 너무 비싸지 않게 150g씩만. 둘이서 300g 먹으면 배도 적당히 부르겠지.

포장육 두 팩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야채와 밑반찬 조금이 차려졌다. 절인 양파를 한 입 집어 먹고, 고기를 올렸다. 지글지글. 연한 기름 냄새가 났다.

횡성 한우!
 횡성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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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는다.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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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에는 한 가족이 앉아 있었다. 엄마와 아빠, 중학생뻘 되는 딸과 아들. 횡성에 사는 가족인가. 추석이라 횡성 할머니 집에 온 걸지도. 아빠는 열심히 고기를 구웠고, 엄마는 다 구워진 고기를 아이들 접시 위로 갖다 바쳤다.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드폰 게임에 빠져 있다.

"좀 먹어."

엄마가 말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엄마가 신발이라도 씹으라고 했다는 듯한 표정이다. 세상 다 싫은, 세상의 온갖 짜증을 다 안은 표정. 아 나라면, 지금의 나라면, 고기를 구워주고 입 앞에 갖다 바쳐주고 무엇보다, 이 비싼 한우를 사주는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당장 일어나 손뼉을 치며 식당을 한 바퀴 돈 후 엉덩이춤이라도 춰볼 텐데.

하지만 그러지 말자. 나도 가끔 저런 딸이었으니까. 아무리 비싼 고기를 사준 데도 회식 자리는 싫었으니까. 지금은 상황이 다를 뿐이니까. 그러니까 옆자리 딸을 욕하지도, 고기 사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을 애석해하지도 말자. 그냥, 눈앞에 구워지고 있는 고기를 맛있게 먹자!

식육처리기능사 사장님. 늠름하게 고기를 썰고 계신다.
 식육처리기능사 사장님. 늠름하게 고기를 썰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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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으음!"


고기를 씹는 더스틴의 눈이 살짝 감겼다. 콧구멍은 살짝 커졌다.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만 볼 수 있는 진귀한 표정이다. 고기는 몇 번 씹자마자 눈처럼 녹아들었다. 고기의 참맛을 느끼기 위해 상추 대신 양파만 살짝 곁들여 먹었다. 몇 점 안 되는 고기를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우리는 꽤 다정했다. 방금 이 부분 정말 맛있었어. 너도 먹어봐. 이거 진짜 맛있겠다. 너 줄게. 아니 너 먹어. 그럼 반 나눠 먹어.

한웃값은 총 7만 3천 원이 나왔다. 아깝지 않았다. 식당을 나와 건너편 롯데리아로 갔다. 삼천 원짜리 망고 빙수를 사서 2층으로 올라갔다. 중학생뻘로 보이는 남녀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야 저 새끼가 너 좋아한대. 꺼져 새끼야! 거친 욕을 하다 낄낄 웃는 아이들. 어색하면서도 다정한, 앳되고 설레는 감정이 상큼한 망고 냄새와 함께 공기 속을 떠다녔다. 나는 마지막 남은 망고 조각을 더스틴에게 양보했다. 창밖을 봤다. 밖은 까매져 있었고, 하늘엔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디저트.
 디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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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점 안 되는 고기를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우리는 꽤 다정했다.
 몇 점 안 되는 고기를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우리는 꽤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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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공근면에서 횡성군 시내까지 걷기
경로: 횡성 공근면 - 횡성군 시내
거리: 약 8.3km
소요시간: 약 2시간 30분
난이도: 약
추천: ★★★☆☆ (안개 낀 새벽에 걸을 것을 추천!)

경로 소개


횡성 공근면 - 횡성군 시내


국도를 따라 쭉 걷는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새벽에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뿌연 안개 사이로 보이는 산, 나무, 촉촉이 젖은 풀잎들이 인상적이다.

한적한 길이 끝나면 횡성군 시내다. 유명하다는 횡성 한웃집은 대부분 둔내면 쪽에 있지만, 시내에도 고깃집이 여럿 있다. 이왕 왔으니 적당해 보이는 곳에 들어가 한우를 즐겨볼 것을 강력 추천!



태그:#국토종단, #도보여행, #안개, #횡성, #횡성 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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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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