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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지난해 4월 28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건강한 노동, 안전한 사회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 참석해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며 산재사망에 대한 기업의 처벌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지난해 4월 28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건강한 노동, 안전한 사회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에 참석해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를 추모하며 산재사망에 대한 기업의 처벌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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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연 광장이 정권만을 바꾸는 게 아니라, 새 시대를 열어 가려면, 노동자 건강 정책,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따져보았다. - 기획자 말

지난겨울,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오랫동안 해온 일을 병이 생겨 할 수 없게 된 다니엘이 질병 수당을 받으려 한다. 의사 소견 때문에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관공서 직원은 다니엘에게 구직 활동을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나이 많은 그에겐 온라인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조차 버거운데 말이다. 생활에 필요한 수당 몇 푼을 받기 위해 그는 자존심을 몽땅 내놓아야 한다.

"자존심을 잃으면 모두 다 잃는 거요."

영화의 배경은 영국이었지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여러 노동자가 떠올랐다. 최초요양신청에 도움을 받기 위해 직업환경의학과를 찾은 연로한 전직 광산 노동자들. 여러 해 직업병 인정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반올림과 반도체 노동자들. 질병 판정위원회에 출석해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며 잘 부탁드린다고 위원들에게 고개 숙이던 어떤 산재 노동자.

산재보상의 높은 장벽... 입증책임

일하다가 다치거나 병을 얻었을 때, 보상받기 위해 넘어야 하는 장벽이 너무 높다. 몸이 아프거나 다친 노동자가 직접 근로복지공단을 방문해 신청해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장벽은 입증책임 문제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협소한 산재 보상 승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당사자가 업무 관련성을 입증해야 한다. 그 과정은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하고 긴 법적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노동자는 사망하기도 한다. '지금' 일하면서 어떤 물질을 다루는지조차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일하는 노동자들을 부지기수로 만난다. 그런데도 그렇게 일하다가 병이 생기면 노동자 스스로 그걸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직업병 유발 가능성이 있는 유해물질 정보를 영업비밀이라는 핑계로 회사가 공개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재해 당사자인 노동자가 입증하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는 지금의 구조를, 사업주가 업무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인정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

산재보험 사각지대의 노동자들

이러한 입증책임은 산재보험 제도가 가진 문제점이다. 하지만 이런 산재보험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이 테두리 밖에 있는 노동자들도 많다. 골프장 경기보조원, 보험설계사와 같은 특수고용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등은 이러한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근로복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6년 7월 기준 특수고용노동자는 45만 6254명에 달하지만, 그중 10.9%만 산재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특히 특수고용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사업장 중 산재보험에 가입한 사업장은 2012년 7147개에서 2016년 7월 기준 6091개로 14.7% 감소했다. 특수고용노동자 10명 중 9명은 일하다 다치거나 병을 얻어도 산재보상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렇게 노동자 개인이 산재보상을 받기가 어렵다는 문제도 있지만, 구조적인 산재 은폐는 더욱 견고한 장벽과도 같다. 한국의 산재 사망률은 OECD 국가 중 10여 년간 1위를 지키고 있지만, 산재율은 0.59%로 OECD 전체 평균(2.7%)보다 낮은 수준이다.

이 단순한 통계만으로도 산재 은폐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은수미 전 의원(더불어민주당)이 2011~2013년 사내하청 노동자의 건강보험 사용 내역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추정 산업재해율은 공식 재해율의 평균 23배에 이른다.

이렇게 심각한 산재 은폐 문제의 이면에는 그것을 부추기는 제도 문제가 있다. '보험료 개별실적 요율제'는 사업장의 재해 발생 정도에 따라 요율을 최대 50%까지 인상 또는 인하하는 제도로, 산재보험 도입 당시부터 산재예방을 위해 시행되어왔다.

'산재은폐' 부추기는 이상한 산재예방 제도

즉,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업종과 사업장에 보험료를 더 많이 부과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도입 취지와는 달리, 오히려 사업주가 보험료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산재를 공상 처리하거나(산재 은폐) 위험한 작업이나 공정을 외주화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현실이다.

산재가 산재로 처리되지 않으면 그에 대한 부담은 산재보험이 아닌 건강보험으로 돌아간다. 기업이 부담해야 할 보험료를 국민들이 나눠서 부담하도록 떠넘기는 셈이다. 게다가 산재가 통계로 잡히지 않고 은폐되고 있으니, 실제로는 더 많은 산재 보험료를 부담해야 할 대기업들이 오히려 막대한 규모의 산재 보험료 감면 혜택을 받고 있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고용노동부로부터 받은 '개별실적 요율제 적용 산재 보험료 감면현황'을 보면, 30대 상호출자 제한기업 집단 중 삼성이 2015년 1009억 원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았고, 현대자동차 785억 원, SK와 LG가 379억 원을 각각 할인받았다.

작년에만 원하청 노동자 14명이 업무상 재해로 숨진 현대중공업도 228억 원을 할인받았다. 산재를 은폐함으로써, 실제로 발생한 산재에 대한 부담을 일반 국민(건강보험)에게 돌리는 것은 물론, 그 덕분에 산재 보험료 감면 혜택까지 받은 것이다. 이렇게 산재 은폐를 부추기는 개별요율제, 그로 인해 대기업에 보험료 감면 혜택이 몰리는 불합리한 구조를 바꿔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노동자가 만드는 일터' 2017년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산업재해, #산재은폐, #대선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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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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