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인 내가 디즈니를 좋아한다고 하면 의외라고들 한다. 여성성을 '공주'로 재생산해낸 디즈니를 좋아하는 것이 꽤 이질적이라는 이야기다. 아마 <미녀와 야수>에 출연한 엠마 왓슨도 비슷한 맥락에서 비판 받았을 것이다. 페미니스트로 열렬히 활동하는 그녀가 '디즈니 공주' 중 하나인 벨을 연기한다고 해 논란이 됐다.

디즈니 팬으로서 디즈니에 대한 일말의 '실드'를 쳐보자면, 나는 어쨌든 디즈니가 여성의 몸을 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라도 여성 인물들이 주가 된 서사를 이끌었던 것이 그 당시에는 페미니즘적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디즈니 공주'들의 여성상을 사회적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아름다운 백인 여성들로 만들고, 또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처럼 왕자가 찾아와주길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가둬놨다는 점은 비판 받을 만하다. 하지만 디즈니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는 듯하다. 기존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실사 영화로 재구성하면서 캐릭터들의 서사를 좀 더 추가한다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바로 <미녀와 야수>처럼.

 <미녀와 야수>스틸샷

<미녀와 야수>스틸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디즈니를 좋아하는 페미니스트

<미녀와 야수>의 벨은 처음 애니메이션으로 개봉됐을 당시에도 여성주의적인 맥락에서 기존의 '공주들'과는 다르다는 평가를 받았던 영화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 붐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지금 다시 만들어졌다는 점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 영화가 인권 감수성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다면 더더욱.

흔히 영화나 애니메이션 속 파티 장면을 떠올리면 우리는 시스젠더 백인 남녀들을 상상한다. 아니면 한국인의 기준으로, 한국인과 비슷한 피부색을 지닌 황인종의 남녀를 상상한다. 그들은 각자의 이성과 고정된 성역할을 수행하며 춤을 춘다. 이는 스스로 상정하는 일종의 '기준'에 대한 문제다. 그리고 기준이 되지 못한 존재들은 자연스레 지워진다. 마치 이 세상에 그들이 부재한 것처럼 말이다.

비가시화라는, 자연스럽게 혹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지는 폭력에 대항하여 오늘 날에는 다양한 움직임들이 있다. 이는 특히 서사를 재현하는 영화나 연극 등의 재현 예술에서 이뤄진다. 인종적 당위성이 없는 역할에 일부러 백인 외의 인종을 캐스팅함으로써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차별이나 존재 지워버리기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는 <해리포터와 저주 받은 아이>를 무대화 할 때 헤르미온느를 흑인으로 캐스팅 했다. 물론 이런 과정에서 '캐릭터 붕괴다' 같은 이야기들이 나왔지만, 오히려 이는 우리가 자연스레 인지하지 못했던 차별을 다시금 인지하게끔 한다. 실제로 그들이 캐릭터를 잘 수행해냈을 때, 피부색이 인간을 판단할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교훈을 제공하기도 한다.

<미녀와 야수>에선 무도회 장면에서 춤을 추는 여성이나 무도회의 가수와 옷장으로 흑인 여성을 캐스팅했다. 이는 백인 중심적인 사회에서 다소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연출과, 노래 속에서 관객들은 동화된다. 동시에 인종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기존의 백인 중심적이던 세상에 대해 말이다.

비단 인종적인 문제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성애를 전제로 하던 디즈니의 지난 관습과 달리, <미녀와 야수>에서는 퀴어 캐릭터를 직접 등장시킨다. 개스톤의 친구로 등장하는 르푸가 그렇다. 르푸는 개봉 이전부터 '미녀와 야수 동성애'로 많은 이야기가 됐다. 심지어 몇몇 기독교 단체에서는 불매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르푸의 개스톤에 대한 감정은 르푸가 개스톤의 문제를 인지함에도 그를 막지 못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한다. 개스톤은 이를 교묘히 이용한다. 르푸에게 정서적인 압박을 가한다. 르푸는 개스톤의 문제를 알지만 개스톤을 돕는다.

 <미녀와 야수>에서 동성애 캐릭터로 등장하는 조시 르푸 포스터.

<미녀와 야수>에서 동성애 캐릭터로 등장하는 조시 르푸 포스터.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하지만 성을 공격하던 날, 자신이 위험에 처했는데 '영웅의 시간'이라며 자신을 버리고 가는 개스톤을 보며 르푸는 스스로 개스톤의 친구이기를 거부한다. 이후 그는 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마지막 무도회 장면에서 르푸가 또 다른 남성으로 분류되는 인물과 춤을 추게 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퀴어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를 통해 <미녀와 야수>는 퀴어에 대해, 그리고 이성애 중심주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야수와 개스톤, 그리고 '남성'

서사에 있어서 관객들은 자연스레 주인공에 몰입한다. 주인공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반대로 주인공과 반하는 인물은 자연스레 악역으로 인지하며 그들의 행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관객들을 만나온 디즈니는 이를 활용하여 '남성성'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다. 악역으로 그려지는 개스톤은 철저히 '남성'적인 인물로 나온다. 그는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전쟁을 사랑하고 전쟁을 떠올릴 때 행복해한다. 심지어 개스톤은 '남자 중의 남자'라 이름 된다.

개스톤의 '남성성'을 풍자하는 노래도 나온다. 이 곡 '개스톤'의 가사는 꽤 우스꽝스럽다. 하루에 달걀을 4판 먹었다, 레슬링을 할 때도 남들을 잘 문다, 뒤에서 총을 쏜다 등. 남성성을 대변하는 인물 개스톤의 '남성성'을 희화화하는 모습은 남성성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한다.

사실 이 전의 많은 서사들에서 '남성성', 혹은 '마초'스러움은 쿨하고 멋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남성성에 대한 신화를 재생산하고 그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는 사회적 맥락과 맞닿아있다. 사회적으로 남성성은 영웅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개스톤은 이를 너무도 잘 아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남자답다'고 불리는 외모를 과시하고, '남자답게' 전쟁에 나갔다온 것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의 '남성성'이 과연 정말로 '멋진 것'일까? 개스톤이 정말로 '영웅'일까?

이는 주인공인 야수와도 비교된다. 야수의 존재했을지도 모를 맨박스는 벨과의 관계를 통해서 해체된다. 예컨대, 기존의 남성성에 '수줍어하는 모습' 따위는 포함되지 않았다. 수줍음은 주로 '여성성'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것이었다. 물론 오늘날 섹슈얼리티의 카테고리는 다양해졌지만, '수줍어하는 남자 주인공'은 기존 서사들 특히 '공주가 등장하는 서사'에서는 꽤 낯선 모습이지 않은가.

 실사판 영화 <미녀와 야수>

개스톤은 '남자 중의 남자'라 이름 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기존 디즈니 서사에 대한 재구성, '난 공주가 아니다'

<모아나>에 이어 <미녀와 야수>까지 관람하고 나자, 디즈니가 스스로 만들어낸 '공주'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를 스스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는 추측은 좀 더 확실해졌다. <모아나>의 '난 공주가 아니다'라는 대사는 이번 <미녀와 야수>에도 등장했다. 이 대사는 여태까지 공주 이야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디즈니에서 차용됐기에 더욱 흥미롭다.

사실 <미녀와 야수>는 서사 자체만으로도 기존의 공주와 왕자의 역할과는 다르다. 우선 벨은 공주가 아니다. 이건 단지 그녀의 신분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벨은 '공주'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여태까지 많은 동화 등에서 공주는 수동성을 내재화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자신을 구하러 와준 왕자에게 구출된다. 하지만 벨은 야수가 있는 성에 제 발로 찾아 들어간다. 그녀의 역할은 저주에 빠진 왕자를 구출하는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 얼마나 파격적인 일인가. 자신에 저주에 수동적인 왕자와 그를 구해줘야 하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여성 벨이라니. 재밌지 않는가.

물론 '공주'면 또 어떤가. 그 또한 하나의 성질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공주', 그리고 지금의 '여성성'은 여성의 몸을 지닌 사람들을 가둬두고 낙인찍는 데에 쓰인다는 점이다. 하나의 특징을 만들고 그 특징에 어긋나는 사람들은 특이한 사람, 다른 사람(이라 쓰지만 '틀린 사람'처럼 쓰이지 않는가), '웃긴'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 '공주'들의 '여성성'으로 불리는 개개인들의 특성조차 폄하되지 않으려면, 기존 특성에 대한 해체가 필요하다. 마치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디즈니의 '공주들'처럼 말이다.

야수를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벨

 <미녀와 야수>의 한 장면. 벨은 기존의 여성 캐릭터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인물이다.

<미녀와 야수>의 한 장면. 벨은 기존의 여성 캐릭터와는 여러 면에서 다른 인물이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와 벨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꽤 잘 드러난다. 그들의 감정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우선 디즈니는 벨이 어떤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데에 주목했다. 그녀는 여성으로 분류되지만 책을 읽는 데에 관심이 많고 지적 호기심이 많다. 그녀의 그런 학문에 대한 열정은 빨래터에서 만난 아이에게 글을 읽어주는 미덕으로도 이어진다. 그런 벨은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재밌는 여자'로 분류되며 타자화 되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도 때론 사회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예쁜 얼굴 때문이었다. (이 속에서 여성은 '외모'로 평가되고 분류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벨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구하고 자신이 감옥 속에 갇히기를 택한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가두고 자신을 아버지와 이별시키며, 자신에게 자유를 빼앗아 간 야수를 싫어한다. 벨은 야수뿐 아니라 성을 낯설어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물들에 마음을 연다.

그녀는 탈출한 자신을 구하러 온 야수를 다시금 구하며 그에게 친절을 느낀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야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의 미덕을 확인하는 것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책을 소유한 그는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벨에게 새롭게 느껴진다. 벨과의 시간 속에서 야수는 수줍어하는, 이른바 기존의 '남성성'과는 조금 거리가 먼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야수에게 매력을 느끼는 과정 속에서도, 벨은 여전히 자유를 갈망한다. 그녀는 그 성 안에 갇힌 신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마법의 거울을 통해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아버지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를 걱정하는 벨을 보고, 야수는 벨을 놓아준다. 아버지를 구하러 간 벨은 성을 공격하러 가는 사람들을 보며 다시 야수를 구하러 성으로 돌아온다. 그 순간, 그녀는 그 성과 야수를 선택한 존재가 됐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 여성 인물의 주체성을 읽을 수 있다.

 실사판 영화 <미녀와 야수>

그녀가 정말로 야수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의 미덕을 확인하는 것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사랑, 그 본질에 대한 질문

재구성 된 <미녀와 야수>는 여태까지 디즈니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했듯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한다. 상대방의 겉모습이 아닌 서로의 미덕, 혹은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것, 서로를 믿는 것 – 혹은 믿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 그리고 자아를 확장하는 것 말이다.

사회적으로 여겨지는 '사랑'의 관점에서 본다면, 야수가 벨을 놓아주는 행동은 사실 '미친 행동'이다. 첫째로, 벨은 자신의 저주를 풀어줄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존재다. 아니, 유일했다. 남은 장미의 꽃잎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둘째로, 벨은 돌아올지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야수는 그 순간 벨을 어느 정도 믿은 셈이다. 하지만 또 동시에, 그는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벨을 놓아줬다. 자유가 부재한 채로 아버지와 헤어져서 사는 삶이 벨에게 행복을 주지 않을 것임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수와 벨, 두 개인이 그 과정에서 선택했던 많은 것들을 떠올린다. 두 인물은 상대방을 사랑하며 많은 주체적인 결단들을 내린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바꿔주거나 구원시키지 않았다. 스스로를 바꾸고 스스로를 '구원'했다. 그러기에 <미녀와 야수>가 남성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여성 인물이나, 여성을 뮤즈처럼 여기고 타자화하는 서사와 차이점을 보일 수 있는 것 아닐까?

 실사판 영화 <미녀와 야수>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와 벨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꽤 잘 드러난다.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다시 디즈니 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디즈니 공주'가 현 시대에서 비판을 받아야 할 점은 그녀들이 만들어낸 고정된 여성상에 대한 비판이리라. 어쨌든 비판은 시대적인 배경을 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언젠가, 성 평등이 이뤄진 시대가 오면 그녀들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지 않을까. 그녀들 또한 한 여성, 아니 한 '존재'로.

<미녀와 야수>의 이야기, 그리고 그 결말에서의 세상은 좀 더 나아졌다. 같은 장소에서 무도회가 열리지만 그 무도회는 오프닝의 무도회와는 달랐다. 성은 더 이상 외로운 곳이 아니었고, 음악, 춤, 아름다움이 회복된 공간이었으며, '사랑'이 더해진 공간이 됐다. 연인간의 이성애적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이라는 가치가 피어난 공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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