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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말산 남쪽 은언군 묘역에 있었으나 지금은 구파발 역 근처 한 사찰 경내로 옮겨져 있다. 1851년에 제작된 것으로 비문은 철종이 직접 짓고 글씨는 조인영이 썼다.
▲ 은언군 신도비 본래 이말산 남쪽 은언군 묘역에 있었으나 지금은 구파발 역 근처 한 사찰 경내로 옮겨져 있다. 1851년에 제작된 것으로 비문은 철종이 직접 짓고 글씨는 조인영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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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구파발역 2번 출구를 나와 은평둘레길 제3코스 이말산 묘역길로 향합니다. 구파발역을 출발해서 진관근린공원과 하나고등학교를 거쳐 은평한옥마을에 이르는 약 2.7㎞ 코스입니다. 동북방향으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북한산의 화강암 연봉들이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성미를 연상케 한다면 해발 132.7m의 야트막한 토산인 이말산(莉茉山)은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기승을 부리던 꽃샘추위도 한풀 꺾인 3월의 어느 날, 스펀지처럼 부드러운 이말산 흙길을 따라가 봅니다.

이말산이라는 지명은 산에 말리화(茉莉花), 즉 재스민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같은 지명을 사용했던 걸까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완산 이씨 묘역의 이세철 묘비와 조선 영조 연간에 정래교가 쓴 창랑 홍세태의 묘지명 등을 보면 '이말산(莉茉山)'이라는 지명은 적어도 18세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말산의 '이말(莉茉)'은 정말로 재스민을 뜻하는 것일까요? 한자로 이말(莉茉) 이나 말리(莉茉)는 둘 다 재스민을 뜻하는 단어임에 틀림이 없으나, 재스민이 외래종으로 조선시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뭔가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구나 최근, 조선 숙종 영조 연간에 활동했던 역관 이영수의 묘비에서 '이말산(李末山)'이라는 표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말'이 곧 재스민이라는 주장은 더욱 신뢰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말(莉茉)'은 어쩌면 처음부터 한자어가 아닌, 단지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의 음을 빌려 표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말(李末)이라는 한자표기도 가능했던 것 같구요. 그렇다면 우리말 '이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말이었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라고 해서 도성으로부터 십리 이내에는 묘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말산은 바로 성저십리의 경계 밖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도성 서쪽의 대표적인 매장지(埋葬地)로서 특히 내시, 궁녀, 역관, 의원 등 중인계층의 묘가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이 같은 특수한 환경이 이말산이라는 지명과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닌지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봉분은 파헤쳐진 채 사라지고 문인석만 홀로 남았다.
▲ 이말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인석 봉분은 파헤쳐진 채 사라지고 문인석만 홀로 남았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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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이씨 묘역을 지나면서부터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석물들이 눈에 띕니다. 어차피 유한한 인생, 삶의 끝자락은 곧 죽음의 문턱과 맞닿아 있을진대 여기저기 파헤쳐진 봉분들과 주인 없이 흩어져 있는 석물들을 대하노라니 왠지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살아서의 삶은 비록 고단하였을지라도 죽어서나마 편히 잠들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이거늘 오늘의 이말산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고혼들의 비명으로 가득합니다.

다시 발걸음을 은언군 이인의 묘터로 옮깁니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난 은언군 이인(李䄄)은 조선 제22대 군왕 정조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1754년에 태어나 10세 때 은언군으로 봉해졌으나 사도세자가 죽은 후 할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사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정조 10년인 1786년에는 장남 상계군의 역모죄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강화도에서의 유배생활 중에도 정순왕후 등 반대세력으로부터 역모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그나마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죽자 결국 1년도 못 되어 부인과 며느리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향년 48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이 은언군의 묘가 양주군 신혈면 산 78-1번지 이말산 언덕에 있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손자가 조선 제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하였기 때문에 왕의 친할아버지로서 그의 묘에는 제각이 설치되고 여러 가지 석물들과 신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신도비의 비문은 1851년에 철종이 직접 짓고 조인영이 글씨를 썼으며 이후 철종은 정기적으로 할아버지 은언군의 제각을 찾아가 참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겨난 지명이 제각말, 또는 잿말이라는군요.

그러나 이 같은 호사도 잠시, 은언군의 제각은 6·25 때 불타 없어졌고, 육칠십년 대 개발 광풍을 타고 그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무덤을 지키던 석물들이며 묘비와 신도비 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신도비는 현재 구파발역 근처의 한 사찰 창건주의 송덕비로 둔갑해 있고, 장군석과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은 창건주의 무덤을 지키고 있으며, 묘비는 그가 사약을 받은 것이 천주교와 연관이 있어서인지 현재 절두산 성지에 옮겨져 있습니다.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간 천재 시인 홍세태

본래 은언군 묘역에 있었던 무인석과 문인석, 장명등 등의 석물들은 현재 은언군이 아닌 한 사찰 창건주의 묘를 지키고 있다.
▲ 은언군 묘역에 있던 석물들 본래 은언군 묘역에 있었던 무인석과 문인석, 장명등 등의 석물들은 현재 은언군이 아닌 한 사찰 창건주의 묘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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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는 말에 의하면 은언군의 묘는 효종과 현종 숙종 등 40여 년간 4명의 임금을 모셨던 상궁 옥구임씨 묘비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혹시나 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물들을 기웃거려보지만 글자들은 대개 마멸이 심하여 알아볼 수가 없고 또 땅속 깊이 처박혀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니 그나마 남아있을지 모를 은언군의 흔적 찾기는 난망 중에 난망한 일입니다.

임상궁 묘비 근처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진실을 알고 있겠거니 하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상선 노윤천의 묘 쪽으로 발걸음을 돌립니다. 본래 이말산의 남동쪽 기슭에는 여러 성씨의 가족 묘역과 내시, 궁녀, 역관, 의원, 여항시인 등의 수많은 무덤이 산재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조선 숙종 영조 연간에 활약했던 위항시인 창랑 홍세태의 묘가 이곳 이말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창랑 홍세태는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간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대대로 역관 무인 등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이씨 집안의 노비였으므로 그 역시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5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시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까닭에 그의 이런 재능을 알아본 청성군 김석주와 동평군 이항이 은자 200냥을 내어 그를 속량시켰다는 유명한 일화가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실려 있습니다.

성품이 강개하여 자신을 무시하거나 오만하게 구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김창흡, 이규명 등과 신분을 초월한 망형지교를 맺었습니다. 23세 때 식년시 잡과에 응시하여 한역관(漢譯官)으로 선발되었고, 1682년 통신사 부사 이언강의 자제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일본 사행 길에는 시와 그림으로 실력을 마음껏 뽐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미천한 신분과 강개한 성품은 평생 동안의 족쇄가 되어 그의 앞길을 막고 가난에 허덕이게 했습니다. 물론 같은 중인 출신으로 내수사에 들어가 부를 축적했던 임준원의 도움도 받았고, 또 김석주, 김창협, 김창흡, 홍상한, 최석정 등 당시의 명문 세도가들로부터도 일정 부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가난했고 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의 자전적 시 <염곡칠가> 중 두 번 째 노래에 가난에 대한 그의 안타까운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내여, 아내여! 그대와 혼인한 후로
온갖 근심 속에서도 금슬만은 좋았다오
쓰디쓴 씀바귀 먹으면서도 
달달한 냉이 먹듯 성내는 기색 없었으니
그대 아니었다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었겠소
손톱만큼이라도 보답하여 
남은 생애 위로하지 못함을 슬퍼하나니
다만 죽어 함께 묻히기를 기약하는 수밖에...

아아, 두 번째 노래여, 노래 참으로 슬프니
가련한 이내 뜻을 하늘은 아실는지?

일본 타카츠키 칸논노사토(高月?音の里) 역사민속자료관 소장이다. 1883년 아시카곤사이(安積艮齋)가 예전 초상화를 구해 모사한 것이다. 홍세태 초상화는 1682년과 1711년 히토미 가쿠잔(人見鶴山)이 그린 바 있다.(출처 오마이뉴스 블로그 창랑 홍세태 초상화)
▲ 창랑 홍세태의 초상화 일본 타카츠키 칸논노사토(高月?音の里) 역사민속자료관 소장이다. 1883년 아시카곤사이(安積艮齋)가 예전 초상화를 구해 모사한 것이다. 홍세태 초상화는 1682년과 1711년 히토미 가쿠잔(人見鶴山)이 그린 바 있다.(출처 오마이뉴스 블로그 창랑 홍세태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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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데다 자식 복마저 없었던 홍세태는 끝내 아들을 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출가한 두 딸도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불행도 그의 시작(詩作)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시는 어려운 글자나 전고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화려한 수식과 미사여구를 구사하지도 않았으며 일상 속에서 겪는 삶의 애환을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써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문집을 출간하기 위해 돈을 마련해놓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이덕무는 그의 청장관전서에서, "어찌하여 살아있을 적에 은전 70냥으로 돼지고기와 좋은 술 등을 사서 70일 동안 즐기면서 일생동안 주린 창자나 채우지 않았는가?" 하고 그 어리석음을 꾸짖었으나 그 자신 <맹자>를 팔아서 식구들의 양식을 마련했던 아픔이 있는 사람인지라 어찌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겠습니까?

홍세태의 문집 <유하집>은 그가 죽은 지 6년 후에 사위 조창회와 문객 김정우에 의해 14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이 문집에는 부(賦) 3수, 시(詩) 1627수, 문(文) 42수 등 모두 1670여 수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그가 직접 쓴 서문에는 식암 김석주와 농암 김창협 같이 그의 문학적 재능을 제대로 평가해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서문을 짓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문학적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유하집> 말미에 첨부된 정래교의 묘지명에 따르면, 홍세태는 1725년 을사년 정월 보름,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양주 이말산 신혈리 남동쪽 언덕에 장사지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인 이씨 역시 3년 후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습니다. 후에 영조 때의 문신 조현명은 창랑 홍세태에 대해, "간이 최립과 더불어 조선의 빼어난 위항시인으로 한유, 유종원과 자웅을 겨룰만하다"라는 평을 남겼으며, 그의 묘가 아무런 표지도 없이 필부들의 무덤과 뒤섞여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여러 사대부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시인 창랑 홍세태의 묘'라고 새긴 묘표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창랑 홍세태의 묘는 흔적도 없고 묘표 또한 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신분적 한계와 가난이라는 굴레를 오로지 뛰어난 문학적 성취 하나로 타개해나갔던 창랑 홍세태, 그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묵묵히 참고 기다려왔습니다. 흡사 소금수레를 끌며 태항산을 오르는 천리마처럼 언젠가 백락을 만나 우렁찬 울음을 터트릴 날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객이여, 객이여! 그대의 자(字)가 도장(道長)이라지 
스스로 이르기를 평생의 뜻 강개하였다지만 
만 권의 책 읽은 게 무슨 소용 있나?
늙고 나니 웅대한 포부도 풀숲에 떨어졌네
누가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했던가? 
태항산이 높아서 올라갈 수 없구나. 
아아! 첫 번째 노래여, 노래 부르려 하니 
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는구나



태그:#현해당, #북한산인문기행, #홍세태, #위항시인, #은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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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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