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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딸아이의 친구 엄마 따라 우연히 들리게 된 학습지 이벤트 행사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표적인 학습지 브랜드였고, 딸아이의 친구는 이미 올 1월부터 그 브랜드의 한글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그 학습지에 관심이 있어 따라간 건 아니었다. 겨울 동안 자주 보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그 친구를 만나 둘이 너무 놀고 싶어하던 바람에 그 친구엄마의 계획에 동행하게 된 거였다. 천원을 내고 아이가 그린 그림으로 컵을 만들어주는 이벤트였는데, 사실 학습지 권유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내가 그런 생각과 계획이 없으니 권유를 받게 되더라도 그리 고민될 건 없겠다 싶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고민이 될 게 하나도 없었다.

길가에 천막을 치고 그 안에는 그 회사 영업사원으로 생각되는 3-40대 여성 몇 명, 그리고 우리처럼 놀러온 한 아이가 엄마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가 천막 앞으로 가자 함박웃음을 띤 여성이 다가와 반가워 하며 그 학습지의 회원인지 아닌지를 물어봤다.

돈 천원에 괜히 거짓말할 건 없겠다 싶어 난 회원이 아니라고 했더니 아이의 학습능력부터 테스트하자는 것이었다. 같이 온 딸아이의 친구만 먼저 그림을 그리게 하겠다 하길래 둘이 손잡고 왔는데 따로 하면 곤란할 것 같다고 말했다. 마지못해 순서를 바꾸어 주긴 했는데, 사실 거기서부터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테스트 받는 건 경험삼아 한 번 해볼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아이들을 '나름'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그저 같이 놀고 싶어 온 아이들을 회원, 비회원 상품으로 나누어 따로 앉혀 다른 걸 하게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들에 대한 기본 고려가 배제된 채 그저 상품 파는 데만 목적이 있는, 그리 지각있고 배려심 있는 곳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테스트는 내 주장대로 그림 그리고 나서 하기로 하고 딸아이와 친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그림을 어느 정도 그리고 있었을 때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여자 상담자가 내 딸 이름을 부르며 다 했느냐고 물었다.

그림 그리기 시작한 지 10분쯤 밖에 안 됐을 시간이었는데다, 다했냐는 그녀의 말투가 부드럽게 들리진 않았다. 다행히 자기의견 강한 우리 딸은 아직도 더 그려야 한다고 했고, 나도 그리고 싶은 만큼 충분히 그리라고 딸에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 상담자 왈,  "얘! 너무 많이 그리면 복잡해" 그러는 것이다. 참, 어이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그녀에게 "복잡해도 괜찮아요. 아이가 그리고 싶은 걸 충분히 그리는 게 중요하죠"라고 말하니 그분께선 아무말도 못하고 다시 대기모드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그림을 다 그린 후 그 그림을 도자기컵에 붙여 굽는 동안, 난 약속대로 딸아이를 그녀 앞에 앉히고 테스트를 받게 했다. 처음부터 우리 딸에겐 아직 어려운 한글 단어질문을 해댔다. 다행히도 우리 딸은 기죽지 않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아는 숫자나 글자는 써보기도 했다.

내가 그런 상황에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아 내심 미안했는데 딸아인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저 그 천막 앞에 전시해 놓은 장난감 사은품에 눈이 꽃혀 엉덩이가 들썩들썩하는, 유아에서 아동으로 넘어가는 중인 여섯살 아이였던 것이다.

2-3분 정도 테스트를 끝내고 나니 우리 딸의 한글과 수학 단계를 적어주며 유치원에서 교육받더라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단단히 준비해야 한다며 마치 나를 위에서 가르치는 듯한 느낌의 어조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글 단계를 이야기 할 땐 '너는 6세인데 XX 등급부터 해야겠네'라며 마치 혼잣말 하듯 말했다. 그건 누가 들어도 학습지를 안하니 이 정도 밖에 안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더니 초등생 정도는 되는 아이들이 적은 듯한 한글 단어장을 나에게 보여주며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느니, 글밥이 매우 많은 동화책 한 권을 펼치며 이 정도는 읽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느니 했다. 이젠 뭐 어이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 이게 무슨 코미디인가 싶었다.

여기서 내가 그들에게 어떤 논리를 펼치든 그들은 놀이를 가장한 프로모션행사로 소비자를 유혹해 학습지를 팔면 되는 거였다. 차라리 난 그들이 좀더 고급전술을 쓰길 바랐다. 오늘 그 천막 안에서 그들이 내게 보여준 영업술은 최하였다. 최소한 아이를 배려하는 척도 하지 않았고, 전문가라고 하기엔 어떤 인덕이나 여유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우리나라 사교육의 낮뜨거운 문제가 한점 부끄러운 척도 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용은 없고 당위만 있었다. 배려는 없고 경쟁만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닥쳐봐야 현실이 어떤 건지를 아는 게으른 엄마일 뿐.

내 주변에도 아이를 키우며 학습지 한두개쯤 하게 되는 경우는 흔하다. 많든 적든 돈이 들어가는 선택 과정엔 분명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또, 엄마마다 아이 교육에 대한 생각이 다르고, 아이마다 발달 속도나 성향도 다르니 자신의 아이들을 가장 잘 아는 부모가 (매우) 심사숙고해 취사선택하게 될 것이다.

다만, 그러한 고민 과정에 놓여 궁금해서 찾아온 소비자인 학부모들을 압박감 느끼게 하는 권위적인 영업전술로 고객을 유치해보겠다는 그들이 대한민국 사교육 열풍의 엉뚱한 시작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왜일까? 대한민국은 교육에 관한 한 아직도 부모 입장에서의 트라우마가 많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한글 깨우치는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되는-정확히는 그들에 의해 판단되고 결정되는- 순간, 뒤처짐이 두렵고, 그건 결국 부모로서의 내 자존심과도 연결되곤 한다.

그들은 그 부분을 건드린다. 남들에겐 아닌 척해도 내 밑바닥에 깔려 있는 우열의식. 학습능력이 훌륭한 아이를 기준으로 삼아 내 아이를, 아니 정확히는 엄마인 나를 건드린다.

천막 안에서의 2-30분. 참 긴 시간이었다. 그들의 제안에 고민할 여지는 없지만, 내 생각을 다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가장 중요한 건 아이이고, 아이에 대한 기본 이해와 배려가 없는 곳에서 아이를 '놀게'하고 싶진 않다는 것.

혹 무엇을 선택하게 되더라도 그건 아이가 원하고 즐겁다는 가정 하에서만이다. 부모로서의 나는 언제나 '아이의 행복' 편이어야 하므로.



태그:#사교육, #학습지, #유아교육, #영업전술, #학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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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떠오르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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