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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반세기 삶은 '차려 자세'의 연속이었다.

"차려 자세는 군인의 기본자세이다. 그러므로 내면적으로는 군인정신에 충일하고 외형적으로는 엄숙 단정해야 한다."

군의 제식동작 교범에서 기술하고 있는 차려 자세의 정의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라면 이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봤을 것이고 40세 이상 중년들은 이 글귀를 달달 외우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교범에서는 차려 자세의 요령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양발 뒤꿈치를 동일선상에 두고 가볍게 붙인 상태에서 발의 내각은 45°를 유지한다. 양다리는 곧게 펴고, 무릎은 붙이며 엉덩이는 양쪽에 균등히 힘을 주고 아랫배는 몸 쪽으로 끌어당기는 듯 힘을 주며, 가슴은 펴고 어깨는 자연스럽게 내린다. 어금니를 다물고 턱은 바싹 당기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기분을 유지한다. 눈은 눈높이로부터 정면 위로 15°를 유지하며 크게 뜨고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차려 자세'는 한마디로 "부동자세"다. 경직성과 획일성을 상징한다.

차려 자세는 경직성과 획일성의 상징이다

'차려 자세'는 한마디로 '부동자세'다.
 '차려 자세'는 한마디로 '부동자세'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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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차려 자세를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무렵부터다. 그 시절 우리는 우측 손을 '바른손'이라 불렀다. 왼손은 틀린 손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밥을 먹고, 글씨를 쓸 때 왼손으로 하면 잘못된 것으로 지적받았다. 아침저녁으로 관공서 등에서 국기 게양식을 하거나 하기식 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움직이던 동작을 멈추고 차려 자세로 태극기를 향해 예의를 표해야만 했다. 

나를 포함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또한 정신적으로도 차려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1968년 12월 5일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신념이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부터 '민족중흥'이라는 무거운 사명의 굴레를 짊어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민족중흥을 주도하는 정부 지침대로 움직이는 인간으로 양성되어야 했다.

나의 차려 자세는 고등학교 때부터 더욱 반듯해져야 했다. 나의 모교를 폄하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지만 나의 고교생활은 군대생활과 같았다. 정규교과시간에 군사훈련이 편성됐고 여름방학 때면 2주에서 3주간 군부대에서 병영훈련을 해야 했다. 교장선생님도 교육자 출신이 아닌 월남전 파병 경험이 있는 해병대 장군 출신이었다.

내무반과 같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엄격한 점호를 했다. 1, 2, 3학년 간의 사이가 마치 병사, 장교, 장군으로 구분되는 군대처럼 철저한 위계를 가진 생활이었다. 그 절정은 국군의 날 행사 준비였다.

우리 학교는 고등학교 중 전국에서 유일하게 학생군사교육단(301학군단)을 운영하고 있었고 고등학교를 대표하여 국군의 날 행사에 참가했다. 국군의 날 하루의 행사를 위하여 2개월 이상 열병 및 분열(행진)연습을 해야만 했다.

행사의 핵심은 차려 자세와 행진이었다. 사열대 앞에 대오를 맞춰 차려 자세로 서 있었던 우리는 사열대 위에 있던 고관대작들에게 보이는 존재였다. 마음대로 움직이거나 말을 해서는 안되었다. 우리가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지휘자의 구령에 맞춰 절도 있는 경례를 하고 오와 열은 물론 좌·우 대각선까지 맞춰 행진을 할 때 뿐이었다.

차려 자세를 정확히 하기 위해 무릎이 붙지 않는 사람은 잠들기 전 허리띠로 무릎을 동여매고 잠을 자야 했고 분열에 참가하는 400명의 보폭을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 연병장이라 불렀던 운동장 트랙에 76cm(군인의 바른걸음 보폭)간격으로 표시를 해놓고 하루 종일 그 간격에 맞추어 걸음마를 연습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썼다.

대학 1, 2학년 2년간 나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 차려 자세를 풀고 '쉬어' 자세를 할 수 있었지만 그 시간마저 비상계엄 등으로 아주 편안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시절 속리산 문장대 바위에 엎드려서 찍었던 사진을 나는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 사진 중 가장 긴 머리의 자유 분방한 모습이라 생각해서다.

대학 3, 4학년은 ROTC 장교 후보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34년간은 줄곧 군인으로 나는 차려 자세를 유지하며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신혼여행 때 아내와 찍은 사진 속에서도 나는 주먹 쥔 엄지손가락 둘째 마디가 양복 재봉선과 일치할 정도로 정확한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편히 쉬어'자세가 불편하다

얼마 전 34년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제 차려 자세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편히 쉬어' 자세가 불편했다.
 얼마 전 34년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제 차려 자세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편히 쉬어' 자세가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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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마 전 차려 자세에서 해방됐다. 34년의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경직된 군인에서 자유로운 시민으로 신분이 바뀐 것이다. 더 이상 내면적으로 군인정신에 충일해야 한다거나 외형적으로 엄숙 단정해야만 한다고 강요받지 않는다. 그러나 '편히 쉬어'자세가 불편했다. 은연 중, 그리고 강하게 희망하던 자유로운 신분이 되었는데 내가 편안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밤늦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아침 늦게까지 늘어지게 잠을 자는 아들 모습이 꼴 보기 싫어 잔소리가 늘어났다. 약속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여유를 부리며 나타나는 친구의 모습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일 할 만큼 일했으니 당분간 쉬는 시간을 갖고 해외여행이나 다니자는 아내에게 '100세 시대 노후준비도 안된 사람이 철없는 소리하고 있다'며 핀잔을 주면서 여기저기 구직사이트를 뒤지고 이력서를 썼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할 때도 나는 불편하기만 했다.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인위선택의 예로 들었던 '헤이케의 게'가 생각났다. 일본 단노우라(현재의 시모노세케) 지역의 어부들은 과거 그 바다에서 벌어진 전투로 죽어간 사무라이들을 생각해 등딱지가 사무라이를 닮은 게는 먹지 않고 바다로 살려 보냈다고 한다. 그런 일이 몇 백 년 반복되면서 게 등딱지의 사무라이 형상이 더욱 뚜렷해졌다는 이야기.

생태계가 '자연'이 아니라 바라보고 선택하는 '사람'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쪽으로 진화하고 번식하는 것처럼 나 역시 보이는 존재로서 보고 있는 사람들 마음에 드는 행동에 길들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헤이케의 게'처럼 되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다.


태그:#차려 자세, #경직성 획일성, #국민교육헌장, #301학군단, #열병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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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고 사회 초년병으로 살고 있음. 군대에서 경험하지 못한 인권문제, 봉사활동, 인문학 등에 관심을 가지고 제 2의 인생을 가꾸어 가는 중. 다문화 사랑방을 운영하는 인생 3모작을 꿈꾸고 있음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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