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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입니다. 군, 면마다 처녀들을 강제로 모집하라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 공장이라고 해서 속이면서, 군복을 만들어야 하는데 기술이 없어도 배우면 된다고 하면서요. 일본의 명령을 거역하면 살지 못하고 가족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다른 데로 추방시킨다고 했습니다. 내 나이가 만으로는 14살, 그러니까 15살이었는데, 배우면 되겠지 죽기야 하겠나 하면서 간 것이 공장이 아니고 일본군을 상대하는 공장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해방되고 나서는 한국으로 가는 배가 오면 보내준다고 했는데, 수개월 동안 기다리다가 겨우 목숨만 살아서 돌아오니 제 나이 22살이라고 하더라고요. 8년이라는 세월을 암흑 속에서 목숨 지켜 살아온 돌아온 우리들이 1억 원 받으려고 고생했겠습니까. 돈이 문제입니까. 일본이 그렇게 나쁜 짓을 했는데 자기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본에게 사죄받는 것입니다. 일평생을 억울하고 한을 풀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이 돈 받겠다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자식을 키우고 있겠지만, 우리들도 귀한 집 자식이었습니다. 법적으로 기자들 모아놓고 사죄와 우리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고 용서하고 법적 배상을 해달라는 것이 요구입니다." - 김복동 할머니

2월 22일, 김복동 할머니가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연이 열리는 서울시청 대회의실 단상에 올랐다. 김복동 할머니는 올해로 92세의 나이였지만 목소리에 힘을 주고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다. 할머니의 말에 강연장을 찾은 시민들은 숙연해졌다.  

2월 22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연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시민 200여명이 참석했다.
▲ 시청에서 열린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2월 22일 시청 대회의실에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연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시민 200여명이 참석했다.
ⓒ 강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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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2월 22일,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연이 서울시청 대회의실에서 시민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서울시와 서울대학교 인권센터는 지난해 12월 31일,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위안부' 이야기>를 발간했다. 이날 행사는 책 발간에 맞춰 대중 강좌로 마련된 자리였다.

'위안부' 이야기는 서울시가 2016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관리 사업' 중 하나로 '위안부' 피해자 10인의 생생한 증언은 물론 미국, 태국 현지 조사를 통해 새롭게 발굴한 역사적 입증자료까지 망라해 교차분석한 첫 사례집이다.

박원순 서울 시장은 이날 강연 인사말에서 2000년 동경에서 열린 '일본군 성노예전범국제법정'에서 남북공동검사단의 수석검사를 맡았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박 시장은 "재판부는 피고로 기소된 히로히토 일황과 옛 일본군 간부 등에게 유죄판결을 내렸지만, 1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은 변한 것이 없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쟁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여전히 먼 길을 다니며 평화운동가가 되었다. 시민들이 위안부의 역사를 바로 알고 기억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강연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뤄졌다.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의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에 다가서기,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교수의 증언으로 듣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이다.

정신대, 종군 위안부가 아니라 일본군 '위안부'



강성현 교수는 우선 명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 교수는 과거에 '위안부'가 정신대라고 불려왔는데, 정신대는 전시 체제 아래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조직을 말하는 일반적인 명칭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종군위안부라는 말은 자발적으로 따라 군을 따라 다닌 것을 의미해 강제적으로 성노예 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일본군 '위안부'라고 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진주만 폭격을 시작으로 일본군들은 그 세력을 확장했다. 일본군의 확장과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또한 중국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버마(미얀마) 등 태평양 전쟁터로 끌려다녔다. 해외에서 발견된 서류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버마 미치나에서 포로로 잡혔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일본인 업자(가운데 고개숙이고 이는 사람)
▲ 시어러 미군병장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사진 버마 미치나에서 포로로 잡혔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일본인 업자(가운데 고개숙이고 이는 사람)
ⓒ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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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위안부' 이야기>는 서류, 사진, 증언들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 사실들을 설명하고 있다. 미군 164통신사진중대 시어러 병장이 1944년 8월 14일에 촬영한 두 장의 사진엔 미군 공문서 '일본인 전쟁포로 심문보고서 제49호'(1944.10.1.)에서 언급된 위안부들의 모습이 담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은 버마(미얀마) 미치나에서 포로로 잡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일본인 업자인 기타무라 부부이며 이들이 이송되기 전 고별파티에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전쟁터에서 일본군 참호 속에서 죽은 여성들이 발견됐는데, 처음에는 미중 연합국의 포격 및 폭격에 의해 사망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하지만 미국 공문서 중국-버마-인도전구 '작전일지'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한 '위안부'다.

그 밖에도 미군 공문서 'ATIS 연구보고서 120호 : 일본군 위락시설'(1945.11.15.)에는 위안소에 대한 가장 상세하고 종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초기, 미군은 위안부와 위안소를 공창의 개념으로 이해했으나, '위안부'가 일본군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제도로 이용되었음을 확인한다. 이 보고서에는 일본군이 필리핀의 마닐라, 타클로반, 브라우엔, 남태평양의 라바울, 버마, 수마트라, 남서태평양지역 등 태평양의 다양한 지역에서 위안소 운영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행사장 주변 전시물에 시민들이 붙인 메시지들. '할머니 늘 건강하세요', '더 이상 이렇게 상처받는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빨리 진실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등의 문구가 써있다.
▲ 할머니들의 마음에도 봄이 오기를 행사장 주변 전시물에 시민들이 붙인 메시지들. '할머니 늘 건강하세요', '더 이상 이렇게 상처받는 분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빨리 진실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등의 문구가 써있다.
ⓒ 강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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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의 중요성에 대한 강연을 진행했다. 박 교수는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은폐했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말하는 것은 피해자 관점에서 합법적 공간에서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여성들에게 어떠한 경험이었고, 그 본질이 무엇인지인지 알 수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피해자 중심의 피해자 증언듣기는 민주주의와 페미니즘의 사회적 기반 위에서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청중의 형성되었을 때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 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단 39명이다. 그리고 여전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일본과 2015년 12·28 협약을 맺었고, 화해치유재단을 만들었다. 현재 피해자들에게 1억 원의 개별 보상하는 방안을 진행 중이다.



태그:#일본군위안부, #위안부, #3.1절,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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