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남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거나 좋은 목적을 가진 착한 마음.
대상을 좋게 보거나 대상의 좋은 면을 보려고 하는 마음.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그분들도 선한 의지로 우리 없는 사람들과 국민들 위해 좋은 정치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뜻대로 안 됐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부산대학교 '안희정의 즉문즉답' 행사(19일) 중에서

정치권에서 가장 '핫'한 인물로 떠오르고 있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발언이 '또' 도마 위에 올랐다. 19일 부산대학교 행사 중 미르·K스포츠재단을 예로 들며,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농단이 '선한 의지'로 이루어졌을 수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논란이 일자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비유와 반어"였다며, "어떤 선의라도 법과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취지였다고 해명했다.

통섭:
막힘이 없이 여러 사물에 두루 통함.
서로 사귀어 오감.

"사물을 의심하고 그것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해부하는 방식이 20세기까지의 우리가 바라보는 지성과 철학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을 분해할 수 없는 그 요소를 모두 통섭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때 그 온전한 객관적 진리에 갈 수 있다…." - JTBC, <JTBC 뉴스룸> 연속대담 "안희정 '누구의 주장도 '선의'로 받아들이는 게 소신'"(20일) 중에서

안희정 지사는 20일 <JTBC 뉴스룸>에 출연, 손석희 앵커와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장시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20세기 지성사"와 "21세기 지성사"는 다르다며 "통섭"을 강조하는 그의 말은 오히려 논란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21일 현재까지 페이스북, 트위터, 주요 포털 사이트 등에서는 그를 향한 비판과 비난이 일고 있다.

'미래인재 컨퍼런스' 축사하는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에 출마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21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4차혁명과 미래인재 컨퍼런스’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 '미래인재 컨퍼런스' 축사하는 안희정 더불어민주당 대선경선에 출마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21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4차혁명과 미래인재 컨퍼런스’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결국, 21일 오후 서울 상공회의소에서 열린 '4차 혁명과 미래인재' 콘퍼런스에서 "마음 다치고 아파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다. 제가 그 점은 아주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의 예까지 간 건 아무래도 많은 국민께 다 이해를 구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런 점에서 제 예가 적절치 못했다"고 덧붙였다.

19일 논란부터 21일 사과까지, 참으로 급박했다. 안희정이 왜 이런 취지의 말을 했는지 '번역'하려면, 그가 과거 출연했던 프로그램에서 어떤 발언들을 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치철학자 같은 안희정

 방송 프로그램에서 안희정의 모습

SBS <대선주자 국민면접>에 출연하여 나름의 예능감을 선보였던 안희정. 그는 진중권·전여옥 면접관의 질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변호했다. ⓒ SBS


"연정 형태가 협치에 가장 좋은 모델일 것이고, 노무현 정부 때도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일입니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새누리당과도 연정할 수 있냐'는 질문을 주시기에, 저 촛불광장의 국가 개혁 과제에 그들이 합의한다면, 대화는 못할 것 없죠. 구성은 못할 것 없습니다. 의회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니 이 국가 개혁 과제를 놓고 동의한다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 SBS <대선주자 국민면접> '안희정' 편 중에서

안희정 지사가 사용한 '어휘'가 새로울지언정, 그 말의 '맥락'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대연정' 논란에서도 그러했듯이, 안희정은 '진영논리 타파'라는 목적을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얼마 전부터는 그것이 연정을 통한 협치였다. JTBC <썰전>에서 유시민이 '큰 기술'이라고 평가했던 것처럼, 분명 '유효'한 한 방이었다. 이어서 이번에는 정치적 반대파도 선의를 지닌 존재라고 인정하자고 제시했다. 그들도 선의가 있었을 것이라는 건, 다시 말해 상대를 배제하고 척결해야 할 제거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대화하고 타협하는 파트너로 보자는 얘기이다.

진영논리에 빠지게 되면 정치는 그 기능을 멈춘다. 기본적으로 상대를 악마화하면, 동료의 카타르시스는 자극할 수 있지만, 상대를 비난하는 데 급급해진다. 반대편을 함께 공존해야 할 파트너가 아니라 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상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악의가 있을 것이라 의심하니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토론과 설득이 사라진다. 논쟁 대신 감정 싸움이 자리하게 된다. 그런 정쟁이 반복되다 보면 대중에게는 정치 혐오가 싹트고, 갈등 조정과 자원 배분이라는 정치의 목적은 실현불가능한 것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안희정이 제안하는 건, 상대의 진심을 믿고, 그 목적에 맞는 '수단'에 대해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환경을 살리는 목적이라면, 4대강 사업의 결과가 정말로 수질을 개선시킬지, 우리나라의 강들을 살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정말로 4대강 사업인지 논쟁하자는 것이다. 그 목적 자체가 '토건·건축 자본의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인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대신 말이다. 그래야 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안희정 지사는 믿는 것 같다.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봤을 때, 안희정의 논리에는 분명 수긍이 가는 면도 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안희정의 모습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 <뉴스포차>에 출연한 안희정. 박성제 MBC 해직기자의 질문에 열심히 답하던 그는, 홍여진 <뉴스타파> 기자와 대연정, 구속 영장 발부에 관하여 공방을 주고 받기도 했다. ⓒ 뉴스타파


박성제 "이어가지 말아야 할 역사도 있어요."
안희정 "이어가지 말아야 할 역사는 이어가고 싶어도 못 이어갑니다. 박정희의 독재를 지금 이어갈 수 있습니까? 민주주의 시민혁명 앞에서 이어가고 싶어도 못 이어갑니다. 이어가려고 했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농단이 난 거예요. 본인도 그러잖아요. '나라를 위해 내가 K스포츠·미르재단 만들어서 좋은 일 하려고 그랬는데 왜 그게 문제예요?' 이러거든. 나는 그것이, 박정희 시대의 사고 때문에 그런 생각이 가능한 거 아닐까요?"
박성제 "본인들은 그게 진짜로 문제의식이 없이, 실제로 나라를 위해 했다고 생각하는 게 더 문제죠."
안희정 "그게 문제인 거죠. 시대랑 안 맞는 거죠." - <뉴스타파>, "[뉴스포차] 대선주자와 한잔① 안희정 '대연정, 선거공학인가 진심인가'" 중에서

<뉴스타파>의 <뉴스포차>에 출연했던 안희정은, 박성제 MBC 해직기자의 말에, 박근혜의 의도가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안희정의 '선의' 그리고 '통섭'의 발언을 두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옹호하는 거냐, 표에 눈이 멀었냐와 같은 비난은 그래서 온당하지 못하다. <뉴스포차>에서 그는 '참보수' 대신 '진보데이'를 고르며 스스로 "진보 정치인"이라고 규정했다. 안희정에게도 전제는 있다. 새누리당(자유한국당)과 연정하기 위해서는 촛불 광장에서 요구된 개혁 과제에 '동의'해야만 한다. 그것이 '선의'라고 하더라도 그 방법이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불법적으로 자행된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희정의 발언을 숙고하고 받아들이기에 지금 광장에 나선 국민의 마음에 상처가 너무 크다. 어휘 자체가 너무 현학적일 뿐더러(철학을 전공한 그의 이력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터이다), 그는 지나치게 큰 그림만 그리려고 한다. 대권주자로 뛰고 있는 그에게선, 정치철학을 강의하는 지성은 일부 보일지언정 담대한 정치인이 보여줘야 할 감동은 잘 보이지 않는다. 2010년 5월 24일, 당시 충남도지사 후보였던 안희정은 논산시 강경읍에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다 못 이룬 미완의 역사를 완성하겠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때 그의 연설이 줬던 울림을 생각해보면 아쉽기만 하다.

무엇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을 한다고, 그 말 자체가 설득과 감화의 힘을 지니는 건 아니다. 그 바른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그 말의 힘을 배가하기도 반감하기도 한다. 지적이고 차분한 이미지는 안희정이 보유한 강점 중 하나이지만, 지적으로 보여야 한다고 해서 어려운 개념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추상적일 뿐더러 와 닿지 않는 말을, 심지어 촛불 민심의 정서로는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뱉어놓은 뒤 '진의가 왜곡됐다'는 식으로 해명해서는 곤란하지 않은가. '정서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르나, 결국 내 말이 맞다'는 식의 태도로는 그가 말하는 새 시대의 정치를 하기 어렵다. 결국 정치인은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하며 설득해야 하는 직업이니 말이다.

안희정의 선의는 어디로 향해 있나

 방송 프로그램에서 안희정의 모습

< JTBC 뉴스룸 >에 출연하여 오랜 시간 '선의' 발언에 대해 자신을 변호했던 안희정. 손석희는 집요했고, 안희정은 꼿꼿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언어가 대중 설득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 JTBC


"저는 지난 7년 동안 지방정부를 이끌면서 많은 주장과 어깃장과 주장들 틈 속에서 지방정부를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 많은 어깃장을 어깃장과 비난으로만 제가 받아버리면 대화가 안 되는 현실을 너무나 많이 겪었습니다. 저분이 왜 화가 나서 나한테 저렇게 어깃장을 놓을까를 그분의 감정과 그분의 말 자체를 제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여야만 저는 대화가 된다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 새정치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JTBC, <JTBC 뉴스룸> 연속대담 "안희정 '누구의 주장도 '선의'로 받아들이는 게 소신'"(20일) 중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투사' 안희정이 어떻게 의사당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중요시하는 '민주주의자' 안희정이 됐는지를 살피려면 그의 지난 7년을 봐야 한다. 안희정은 충청도라는 험지에서 지방자치단체장에 당선되며 야권의 깃발을 꽂았다. 이를 탈환하려는 보수 여권의 공세에 맞서 꿋꿋하게 그 자리를 사수했다. 나아가 충청의 맹주로 성장하며 자신의 튼실한 지역 기반도 만들었다. 그를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싸움은 선명한 강성 노선이 아니라 다수의 반대파를 포용하고 인정하는 싸움이었다.

자신을 '빨갱이'로 바라보는 지역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도의회에서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포진하고 있는 다른 당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싫어하는 사람과도 마주 앉아야만 하는 '직업 정치인'으로서 그를 잘 보여주는 장면은 아마도 지난 2011년, 충남도청으로 항의하러 온 전북도민들 앞에서 그가 보여준 모습일 것이다. 세종TV의 영상을 보면 "형님! 동생 얘기 좀 들어보시라니까"라고 안희정은 항의하던 도민과 포옹한다. 그것이 설령 정치적 '쇼'일지언정, 그가 실천하고 싶은 정치적 리더십이 어떤 것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안희정은 분명 야권이 보유한 자산 중 하나인, 좋은 정치인이다. 이재명이 성남이라는 여권 성향 '부자 동네'에서 야권의 깃발을 꽂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보인 것처럼, 안희정 역시 (야권 입장에서) 변방인 충청도 내 정치적 '적'들과 줄다리기하며 도정을 이끌었다. 지난 7년의 안희정 지사 도정은 그의 행정력을 증명한 시간임과 동시에 중앙에서 어떤 모델의 리더십이 먹힐지를 시험해보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재명이 선명하고 시원한 카리스마를 보이며 전통적인 야권 지지자의 응원을 받고 있다면, 안희정은 외연 확장을 통해 중도 나아가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표심을 가져오는 길을 택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안희정의 모습

<뉴스포차>에서 기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열변을 쏟아내고 있는 안희정. 그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왜 지켜야 하는지, 국회와 정치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많은 시간을 할애해 설명했다. 홍여진 기자가 "기승전'민주주의'"라고 평할 정도로. ⓒ 뉴스타파


나 역시 안희정의 선의를 믿는다. '삼권분립'을 존중하기에 구속 영장 발부에 대해 쉽게 평가하지 않으려 하고, 국가 간 협의를 함부로 뒤집을 수 없기에 '사드 철회'를 약속하지 않는 그를. 원칙과 절차에 따른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민주주의자' 안희정을. 그러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듯이, 선의가 있다고 해서 모든 언행이 옳은 것은 아니다. 나라를 위해 좋은 일 하겠다고 나선 박근혜 대통령이 저러고 있는 것처럼, 더 나은 정치를 위해 투신한 안희정의 리더십이 '지금, 여기'에 가장 적합한 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서양속담)"

21일 오전,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양 속담을 올렸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선의로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다. 지킬 박사도 선의를 갖고 하이드를 만들었다. 이명박·박근혜의 선의가 대한민국 국민을 지옥으로 이끌었다. 안희정의 입장을 요약하면, 선의에 대해서는 믿고, 과연 그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인지 지옥으로 가는 길인지에 대한 문제만 정치가 집중하자는 것일 테지만.

하지만, 안희정의 선의가 지옥으로 향하는 또 다른 길은 아닐지 물음표가 떠오른다. 어쩌면 그는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닐까. 악의로 똘똘 뭉친 상대가 있음을, 민주주의 제도 자체가 잘 정비되어 있어도 시대 자체가 역행할 수 있음을 모르는 걸까.

안희정 선의 통섭 뉴스룸 뉴스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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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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