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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2월 28일 오후 2시 58분]

높이 29.8㎝, 몸통지름 19.4㎝의 고려시대 동종으로 다른 명칭은 ‘진관사명동종(津寬寺銘銅鐘)’이다.
▲ 진관사 동종 높이 29.8㎝, 몸통지름 19.4㎝의 고려시대 동종으로 다른 명칭은 ‘진관사명동종(津寬寺銘銅鐘)’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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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검색과 취득이 용이해졌다. 소위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각종 인터넷 매체에는 그야말로 정보가 차고 넘친다. 굳이 관련분야 서적을 구입하거나 현장을 방문하지 않아도 웬만한 정보들을 쉽게 취득할 수 있다 보니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이 정보의 신뢰성이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무한 복제 재생산되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둔갑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북한산 일대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 탐방을 목적으로 <북한산인문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심심치 않게 잘못된 정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유관 기관이나 단체에 연락을 해도 그 반응이 속된 말로 뜨뜻미지근하다고 할까.

목욕을 하다가도 손님이 찾아오면 지체 없이 달려 나가고, 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찾아오면 씹던 밥알을 내뱉고 달려 나갔다는 일목삼악발(一沐三握髮), 일반삼토포(一飯三吐哺)의 환대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야, 이건 정말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이 빠질 때가 있다.

삼천사지 발굴조사에서 나온 동종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삼천사 마애불을 지나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곳곳에 옛 절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이덕무의 <유북한기>에, 나한봉 아래 절터가 있는데 고려시대 삼천 명의 승려가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 삼천사지의 석축 삼천사 마애불을 지나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곳곳에 옛 절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이덕무의 <유북한기>에, 나한봉 아래 절터가 있는데 고려시대 삼천 명의 승려가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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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사와 진관사는 북한산 서쪽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금은 폐사되고 없지만 신혈사라는 옛 절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려 현종이 왕자 시절 삼각산 신혈사에 유폐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 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고 했으나 절의 노승이 방에 땅굴을 파서 숨기고 그 위에 와탑(臥榻)을 설치하여 화를 면했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그래서 절 이름이 신혈사이고, 훗날 현종이 왕이 되어 자신을 구해준 노승을 위해 지어준 절이 진관사이다. 이 당시, 왕자가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어 술사(術士)에게 물었더니, 닭은 꼬끼오 하고 우니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를 징조요, 다듬이소리는 어근당하니 임금 자리가 가깝다는 해몽을 내놨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닭 울음소리를 고귀위(高貴位)로, 다듬이 소리를 어근당(御近當)으로 풀이한 까닭이다.

삼천사는 고려시대 대 가람으로 지금도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기슭에 옛 절터들이 산재해 있어 당시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증취봉 아래의 일명 대지암 터는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이 과거 삼천사의 주지이며 고려 현종의 왕사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의 탑비전이 있던 곳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 당시 삼천사지 발굴 조사에서 각종 도자기류와 기와조각, 석재보살두, 사리함 등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서 그런지 지금도 삼천사를 소개하는 각종 인터넷 자료에는 삼천사지 발굴조사에서 나온 동종(銅鐘)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그런데 삼천사지에서 출토된 동종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지면 대답은, "아니오"이다. 어찌된 까닭인지 삼천사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이 동종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동제범종'이라는 이름으로만 보관되고 있으며 더구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도 않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기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동종은 안타깝게도 삼천사지 발굴조사와는 관련이 없다. 그나마 관련이 있다면 현재의 삼천사 입구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정도이다.

사실 이 동종은 1967년 11월 당시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에 거주하던 윤경민씨가 집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이후 국립박물관에 귀속되었는데 문제는 왜 하필 이 종이 삼천사지 출토 종으로 둔갑했느냐 하는 것이다.

원인은 이 종의 발견 장소와 시기, 발견자 등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채 거의 50년의 세월이 흘러왔다는 사실이다. 발견 장소는 고려시대 진관사 터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단서가 되는데도 간과되었다.

발견자 역시 발견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도 지금껏 잊혀져 왔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재관리에 큰 구멍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발견지, 발견장소, 발견자 등에 대한 구체적 정보 제공해야

북한산 일대의 문화재 답사를 위주로 하며 3회차로 진관사와 삼천사 일대를 둘러보았다. 진관사에는 본래 추사가 쓴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었는데 6.25전쟁으로 불타고 없다. 다행히 사진 자료가 남아있어서 이를 기반으로 곧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 북한산인문기행답사 북한산 일대의 문화재 답사를 위주로 하며 3회차로 진관사와 삼천사 일대를 둘러보았다. 진관사에는 본래 추사가 쓴 대웅전 현판이 걸려있었는데 6.25전쟁으로 불타고 없다. 다행히 사진 자료가 남아있어서 이를 기반으로 곧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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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특정 기관이나 단체를 비난하거나 비하할 목적도 없다. 다만 잘못 알려진 정보를 바로잡고 그 원인을 시정하여 앞으로 더 이상 이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는 것 뿐이다.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진관사 동종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종은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에 소개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술명용출사소종(戊戌銘龍出寺小鐘)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도 소개되고 있어 혼선을 주고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보다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또 해당지자체에서도 인터넷상에 떠도는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고, 동종의 발견장소가 학술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만큼 그 위치에 안내판을 설치하는 것을 포함해서 이 지역 사찰 터에 대한 전문적인 학술조사를 조속히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북한산은 이천만 수도권 시민들의 휴식처이고 또 진관사 삼천사는 북한산 서부 지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유관기관들이 힘을 합해서 그릇된 정보를 바로잡고 새로운 정보를 발굴하여 제공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이야기가 있는 산,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사찰로 시민들의 품에 한결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태그:#현해당, #북한산, #진관사, #삼천사, #북한산인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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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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