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아나>

족장의 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주'의 지위를 거부하는 '디즈니'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어쨌든 디즈니의 성과는 항상 놀라웠다. 그 이야기가 '공주'의 이야기일지라도, '여성'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겨울 왕국>을 통해 자매간의 우애를, 그리고 이성애 로맨스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여성 서사를 보여줬다. 이번 겨울, 디즈니는 새로운 여성 서사를 가져왔다. <모아나>, 물론 한국을 '겨울 왕국'으로 'Let it go'했던 성과에는 못 미칠지라도, 이 영화는 자신의 방식으로 새로운 <모아나> 바람을 불게 하고 있다.

<모아나>는 캐릭터 설정부터 돋보인다. 우선 주인공 모아나는 여태껏 꽤 많은 디즈니의 작품들이 그러했듯 여성 캐릭터를 전면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디즈니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모아나는 백인 여성이 아니다. 모아나는 모투누이 섬의 족장이 될 인물이다. 이에 모아나는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을 '공주'라고 정의하고자 하는 모투누이를, 그녀는 거부한다.

그녀는 자신을 공주라 부르지 않는다. 자신을 공주와 그 '공주'라는 단어 속의 수많은 상징성들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디즈니의 여성 캐릭터들은 그저 디즈니의 '공주'들로 여겨졌다. 그녀가 여전사이거나 여왕일지라도, 디즈니의 여성 캐릭터 시리즈라는 이름 하에 그녀들은 모두 '공주'라 명명됐다.

모아나는 디즈니의 공주이지만 공주가 아니다. 그녀는 디즈니 시리즈의 여성 캐릭터인 만큼 '공주 캐릭터'로 분류되겠지만, '공주'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수동성 등의 맥락과 어긋난다. 이러한 모아나의 특별한 이중성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꽤 유효한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성의 경계를 무너뜨리다

 영화 <모아나>

영화 <모아나>의 주인공은 일반적인 '여성성'을 거부한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우선 첫째로 모아나는 일상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지는 '여성성'과는 거리가 먼 여성 인물이다. 그녀가 공주임을 거부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아나는 바다를 꿈꾼다. 심지어 가만히 있으면 섬의 족장이 될 수 있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바다로 나가고자 한다. 그녀는 진취적으로 자신의 꿈을 한 개인, 모아나로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를 'How far I'll go'를 통해 노래한다.

"알아. 섬에 사는 사람 모두 자기 할 일이 있어. 또 내 역할도 있지만. 자신을 갖고 더욱 강하게 힘을 모아서 할 수 있는데…."

모아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직시하는 캐릭터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무작정 수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그녀의 '운명'조차도 이 영화에선 주목해볼 만하다. <모아나>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바로 모투누이 섬의 특징이다. 모아나가 차세대 모투누이 섬의 족장이 될 예정이라지만, 모투누이 섬은 소위 말하는 '모계 사회'가 아니다. 현재 모투누이 섬의 족장은 모아나의 아버지, 투이다. 약간의 과대 해석일 수도 있지만, 남성이 아닌 인물 모아나가 예비 족장이 됐다는 점에서, 적어도 관객들은 모투누이 섬이야말로 성 역할을 해체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모아나가 후계자가 된 것은 그저 그녀가 투이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 전제에는 그녀의 성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냥 그녀는 '모아나', 한 개인으로서 인정받는다.

물론 페미니스트 내에서도 어떤 목표를 내걸고 설정할 것인가의 의견은 분분하다. 그리고 이 목표는 페미니즘에 대한 담론이 활발해지며, 조금씩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현 페미니즘 내에서 성을 해체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여지로 읽힐 수 있는 이 영화 <모아나>는 긍정적으로 읽힐 여지를 준다.

변화하는 남성 캐릭터, 마우이

 영화 <모아나>

영화 <모아나>는,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게 아님을 보여준다. 남성 캐릭터를 통해서.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또한 <모아나>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것은 모투누이의 변화하는 모습이다. 모아나와 모투누이가 만난 후, 모투누이는 모아나를 처음 보자마자 무시한다. 그는 꽤 '남성성'에 갇힌 인물로 비친다. 실제로 그의 모습은, 살집이 있고 근육도 꽤 많으며, 키도 훨씬 크다. 물론 정말로 여성과 남성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신체적 크기 차이도 정말 '당연한 것'인가, 생물학적 성 또한 일종의 만들어진 개념 아닐까, 라는 질문에서 모투누이와 모아나의 신체적 차이는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적어도 모투누이가 얼마나 '남성적'인 인물인지 보여주는 데에 있어서, 그의 신체적 특징은 꽤 빛을 발한 것 같다.

그의 '남성성'은 단순히 그의 신체적인 특징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hero of men'이라 칭한다. 물론 그 후 그는 자신의 말을 'men and women'으로 정정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모아나의 말을 몇 번이고 자른다. 모투누이는 모아나를 동굴에 던지고 모아나의 배를 타고 떠나려 든다. 그리고 모아나가 배에 타자 그는 몇 번이고 모아나를 던져버린다. 그는 모아나가 배 모는 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맨스플레인'을 하고, 자신이 공주가 아니라 족장의 딸이라 이야기하는 모아나에게 그게 그거라고 이야기한다. 그저 옷이 예쁘고 동물 친구를 가졌으니 똑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남성적인' 모투누이가 정말로 그가 이야기하던 대로 강하고 영웅적인 인물이었던가? 그는 테피티의 심장을 무서워하고 테카를 무서워한다. 그를 이른바 '맨 박스'에 자신을 가둬버렸던 셈이다. 물론 그런 그는 변한다. 그가 변할 수 있던 계기는 사실 모아나와의 관계가 컸다. 그가 모아나를 인정할수록, 그는 자신의 맨 박스 또한 해체할 수 있었다. 그가 맨 박스를 깨며 함께 깨낸 것은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투누이와 내면의 모투누이의 불협화음도 있었다. 결국, 폭언을 퍼부은 후 떠났던 모투누이는, 다시 테카와 싸우러 돌아온다. 자신의 갈고리가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는 것을 각오하고 말이다. 모아나가 테 피티의 심장을 되찾아주고, 테카가 테 피티로 돌아오자, 그는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영화 초반의 모투누이와는, 꽤 달라진 모습이다.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는 타마토아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를 연상시킬 여지를 준다. 타마토아는 그의 주제가 'Shiny (빛나)' 에서도 알 수 있듯, 빛나는 것들을 좋아한다. 그는 자신이 빛나는 이유를 '멋있으니까'에서 찾는다. 그가 자신을 빛난다 하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이 외관적으로 '멋있기' 때문이다. 그는 '빛나는 것'을 좋아하는 물고기들을 한심하다 이야기하지만, 정작 자신의 온몸에 빛나는 것들을 갖춘다. 그리고 그는 정말 그 '빛나는' 테피티의 심장 때문에 모아나와 모투누이를 놓친다.

또한, 테카가 사실은 테 피티였다는 점에서, <모아나>는 자연에 대해서도 함께 질문을 던진다. 모투누이가 저 나름의 방법으로 테피티의 심장을 훔쳤던 것은 결국 사람들의 삶에 죽음만을 선사했을 뿐이었다. 이는 인류의 행적으로 자연이 파괴되어, 정작 사람들이 또 다른 방식으로 고통받게 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새로운 과학과 기술은 또 한 편으로 새로운 질병이나 환경 오염들을 낳았다. 정말로 인류에게 나쁜 마음을 먹고 무슨 행동을 했든 사람이 정말 몇이나 있을까.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 질문을 던지다

 영화 <모아나>

<모아나> 두 주인공의 관계는 무엇일까.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최근 디즈니 작품의 동향 아닌 동향이었다. 예를 들어 겨울 왕국에서의 결말은 엘사와 안나의 우애 회복과 아렌델의 평화에 주목했다. 물론 크리스토퍼와 안나의 이성애적 로맨스 성공이 영화 내에서 그려졌지만, 우선 크리스토퍼는 전통적 '왕자님'과는 거리가 멀었고, 한스 '왕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크리스토퍼와 안나의 로맨스는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을 보였다. 주토피아에서는 결말에서 닉과 주디의 관계가 우정인 듯 우정 아닌 관계였고, 이에 팬덤과 관객들 내부에서도 '닉주디'의 결말이 어찌 되느냐는 이야기가 활발했다. 그 둘은, 직장 동료로, 또 친구로, 그리고 묘한 연인인 듯 연인 아닌 관계로 끝났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정과 사랑은 아주 다른 별개의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둘이 뭐가 그리 본질에서 다르단 말인가. 뭐, 어디까진 우정이고 그 이상으로는 사랑이야 하는 명확한 기준이라도 있는가. 둘은 정말로 이름 붙이기 나름일 뿐이다. 성적인 것이 포함되면 사랑인가? 그렇다면 가족애 등의 사랑은 무엇인가? 우정은 친구끼리의 사랑이 아닌가? 사랑과 우정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제시하고, 이에 대해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둘을 같다고 무작정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고민을 나눌 기회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에 대해 질문을 던져볼 기회도 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모아나>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것이 '사랑'으로 규정되는 것이든 '우정'으로 규정되는 것이든, 둘은 그 관계를 통해 자아를 확장했다. 모아나와 모투누이의 이야기가 더욱 돋보이는 것은 그 둘이 서로 간의 관계를 통해서 자아를 확장해나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 한 사람 때문에 타인이 조금은 수동적인 상으로 변하는, 소위 말하는 구원 서사와는 다른 결을 보인다. 둘은 한 개인 대 개인으로서, 상호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더 나은 방향으로 자아를 확장했다. 그리고 둘은 각자 원하는 것을 이뤄내고, 어쨌든 넓은 바다와 세상을 항해하고 날 수 있는 인물들로 변했다.

문화 콘텐츠에 더욱 엄격한 잣대가 들이밀어 지는 것은 그 문화 콘텐츠가 미치는 파급력에서 그 이유가 찾아진다. 그러기에 더 파급력이 있을 만한, 발언권이 있을 만한 콘텐츠에는 더 많은 책임감이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디즈니사의 <모아나>는 꽤 책임감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 <모아나>

좋은 의미와 영화적 재미를 모두 붙잡는 작품은 드문 편이다. <모아나>는 그런 영화다.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모아나 디즈니 페미니즘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